소식

<박원순의 희망탐사 32>

경북 의성군 안사면 쌍호리에는 30여년의 세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공동체가 있다. 이른바 쌍호공동체.

전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농민공동체로 명성이 자자한 쌍호공동체는 지금은 환경농업공동체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원래 첫 시작은 가톨릭농민회 쌍호분회였다. 농민운동을 시작으로 해서 유기농공동체로 탈바꿈한 쌍호공동체는 현재 17가구가 마을 공동의 일을 회의로 결정하며 공동체를 이끌고 있다.

투쟁과 삶, 그리고 생명의 공동체란 말이 딱 어울리는 쌍호공동체는 그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내실 있는 공동체로, 또 공동체 성원 모두의 의견을 존중하는 공동체로 유지되어 왔다.

작고 강한 쌍호공동체
”?” 쌍호공동체라는 명칭은 1990년대 초반 생명농업을 하면서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그전에 쌍호공동체의 정식 명칭은 가톨릭농민회 쌍호분회였다. 1978년 우영식씨의 노력으로 쌍호분회가 생겼고, 농민운동을 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일궈 나갔다.

그것이 가능했던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쌍호리 자체가 가톨릭 신자가 주축으로 된 마을이었다는 점이다. 공동체 회원들은 쌍호리를 “천주교 박해시대 때 피난해 들어와 살던 사람들이 옹기를 굽고 팔며 살아왔던 동네”라고 추측한다.

그 역사적 근원이 무엇이든 쌍호리는 가톨릭 신앙으로 뭉쳐진 동네였고, 가난하고 어려웠지만 구성원 대부분이 가톨릭 신자이다 보니 마음의 부족함 내지는 어려움을 서로 이해하며 공동체를 이끌어 올 수 있었다.

쌍호공동체를 오늘날까지 이어온 두 번째 동력은 1978년 가톨릭농민회 쌍호분회 시절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월례회의다.

한차례도 거르지 않고 열린, 마을주민 모두가 참여하는 월례회의는 마을의 온갖 대소사는 물론 내년에는 무엇을 심을 것인지, 수확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등을 공동으로 결정한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는 사람이 나오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그 안건을 검토할 만큼 모든 마을 주민들의 의견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이어져 온 월례회의는 쌍호공동체의 근간이 되었다.

“서로 단합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회의였습니다.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총회가 한달에 한번 열립니다. 연말은 총회이니까 일년에 월례회의가 11번 열리는데 1978년 3월경 시작해서 지금 343차 회의가 되었습니다. 월례회의와 총회는 모두 부부동반을 원칙으로 합니다. 공동체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과거에는 가정의 어려움까지 회의에서 논의하기도 했습니다.”

치열한 운동으로 세상이 바뀌었다

가톨릭농민회 쌍호분회였던 시절, 쌍호리 주민들은 투쟁에도 앞장섰다. 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정부가 잘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그들은 투쟁의 길로 나섰다.

“형사들이 마을 주위에서 잠복근무를 했기 때문에 회의록을 숨겨놓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간첩이라는 얘기도 들었죠. 가톨릭농민회에서 나왔다 하니 조합장의 다리가 덜덜 떨리는 것도 보았습니다. 가톨릭농민회는 당시 잘못을 바로잡는 기관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관(官)으로부터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도 우리에게 상의를 하러 오기도 했죠. 전두환 정권시절에는 합판에 사진을 붙여 광주학살 사진전을 쌀 매수하는 장소에서 벌였습니다.

농지세나 수세(水稅)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재벌들을 위해서는 인프라를 다 해 주는데 농민들의 경우 보(堡)도 농민이 다 만들었지 정부가 해 준 것이 없었습니다. 나무 땔감이나 밀주 등에 대해서까지 경찰이나 세무서등이 나와서 뒤지고 간섭하고 통제했습니다. 결국 우리들이 모여 공부를 하고 농지세나 수세에 대한 부당함을 깨달아 나가게 됐습니다. 사실 싸움은 머릿수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실이 안 되어 있으면 싸울 수 없습니다. 서로 아껴주고 돕는 내실이 중요한 거죠. 남편은 남편대로, 부인들은 아이를 등에 업고 투쟁에 참여했습니다.”

정부 정책에 반하는 운동을 하면 탄압을 받게 마련이다. 농민인 이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국민들이 억압 속에서 살아오면서 억압체제를 당연시했는데 가톨릭농민회 운동을 하면서 그에 저항했기 때문에 좋지 않은 시선”으로 농민운동을 보았다. 그러나 이들은 치열한 운동으로 아주 소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세상을 바꿔 나갔다.

“농민들이 쌀을 싣고 가는데 입고료, 출고료 내는 것을 당연시했습니다. 도로부역도 마찬가지였고, 술 적발하러 다닌 것도 우리 모두가 당연시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농민회 운동을 하면서 국민을 각성시켜 나갔죠. 모든 농민들이 함께 하지는 못해도 농민회가 옳다는 것을 알기는 했습니다. 그런 활동 때문에 많이 바뀌었죠.”

쌍호공동체 회원들은 모두 이런 역사를 직접 체험했다. 그것이 쌍호공동체를 끈끈이 이어주는 기제로 작동했다. “그때 싸웠던 동지들을 보면 가슴 뭉클하다”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삶과 투쟁이 멀지 않았던 그들에게 삶과 투쟁을 함께 했던 동지들이야말로 그들을 지탱시켜주는 힘이었을 테니 말이다.

살며 싸우며, 이들은 자신이 처한 처지에 대해 제대로 알기 위해 공부도 많이 했다. 그때 이해찬 전 국무총리나 이우재 현 한국마사회 회장으로부터 학습을 했다고 하는데 쌍호공동체 회원들은 현재 이들의 변화된 모습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는 못했어도 아주 열심히 학습을 했습니다. 이해찬 씨, 이우재 씨 등으로부터 많이 배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르치는 것은 잘했는데 꼭 자신이 가르친데로 사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골프장 논란을 보면서 씁쓸했지요. 그 사람들을 통해 의식화는 많이 되어도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농민의 힘으로 역사를 바꾼다고 생각을 했는데 항우가 이를 잡아 바위에 놓고 쳤는데 이는 구멍사이로 기어나가는 형국입니다. 그래도 운동이 없으면 발전이 없습니다. 운동한 것에 후회는 없습니다.”

생명농업은 투쟁사업보다 더 힘들다
”?” 가톨릭농민회 쌍호분회가 생명농업을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가톨릭농민회가 전농으로 통일되고, 1994년 WTO가 시작되면서 생명농업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처음 유기농을 시작할 때 주변 사람들은 미친 짓이라고 했다. 그러나 쌍호공동체는 회의를 통해 유기농을 시작했다.

생명농업을 시작하면서 쌍호공동체는 상업적인 영농을 지양했다. 수요와 공급 문제 때문이었다. 그리고 유기농을 위해 자급적인 농자재와 퇴비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상업적인 영농을 지양합니다. 다른 분회는 경작면적을 확장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들이 힘들어졌습니다. 수요와 공급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유기농이 부족했기 때문에 많이 경작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WTO가 시작되면서 많은 단체와 농민들이 유기농을 하기 때문에 이제 공급과잉이 되었습니다.

유기농이라는 것도 사실상 상업농과는 다릅니다. 규모화를 통해 유기농이 진전될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유기농은 생태적으로 살려내는 것만을 중시해서 유기농과 관계된 농자재도 비료 사듯이 구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역기반의 자급적인 농자재와 퇴비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눈앞에서 농자재와 퇴비가 만들어지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똥도 멀리서 사오면 방부제를 넣었는지, 유전자조작식품을 넣었는지 모르지 않겠습니까.”

쌍호공동체는 마을의 농작물 생산 구조(3천평 정도의 소작을 하는 소농구조)에 맞게 한 작물에만 집중하지 않고 소량다품종을 철칙으로 삼고 있다. “한 품종을 한 경우 수입에 대체할 수 없고, 땅의 윤작 체계 때문”이다. 벼농사는 우렁이농법, 오리농법을 통해 짓고 있고, 각종 채소를 조금씩 짓고 있다. 무엇을 지을 것인지는 마을 회의를 통해 결정한다.

이렇게 생산된 농작물은 부산이나 서울의 가톨릭 교구와 결연해서 팔아왔다. 채소만 보아도 매년 4천만 원 정도를 판다고 한다. 생산된 것은 대부분 소비가 된다. 소농구조를 지킨다, 다품종생산을 한다, 공동작업을 한다는 원칙 덕분이다. 쌍호공동체는 기계도 공동으로 구입하며 쌀겨를 사서 퇴비도 공동으로 만드는 등 모든 영농을 공동으로 한다. 생명농업은 품앗이가 없으면 제대로 하기 어렵기 때문에 모든 일을 공동으로 수행한다.

쌍호공동체는 도농결연사업도 벌인다. 도시 소비자들이 소를 공동으로 사주는데 현재 10마리 정도 된다고 한다. 농사를 짓고 나온 부산물로 소 사료를 만들어 키우고 있다. 이렇게 키워진 어미소는 송아지 2마리를 낳고 다시 도시민에게 간다.

“순환농업단계까지는 못가고 유기농 단계는 되었다”고 스스로를 평가하지만 농작물을 키운 부산물로 소를 키우는 것을 보면, 또 직접 퇴비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다시 농사를 짓는 것을 보면 순환농업단계도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유기농은 일상생활에서도 이뤄지고 있다. 세재를 덜 쓰고, 음식을 만들 때 조미료도 전혀 쓰지 않는다. 유기농을 하기 위해서는 이런 사소한 부분도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 때문에 쌍호공동체는 생명농업공동체로 성공리에 탈바꿈할 수 있었다.

쌍호공동체의 과제

쌍호공동체는 농사일로만 바쁜 게 아니다. 가톨릭농민회와 의성군농민회 활동도 해야 하고, 한살림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FTA 문제로 여의도에 가서 싸우기도 해야 하고, 도시에 가서 우리의 생활을 소개하고, 물건도 팔아야 한다. 또 마을로 찾아오는 도시민들의 방문도 받아야 한다. 그 일들을 쌍호공동체 안에서 모두 하자니 힘들기도 하지만 안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 일들이 모두 쌍호공동체가 갖고 있는 일거리이기 때문이다.

바쁘지만 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도와가며, 생명농업을 하며 잘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고민은 있다.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후계자들이 없다는 것이다.

“제일 큰 문제는 후계자들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회원이 60세가 넘었습니다. 젊은 세대들은 대부분 도시로 나가서 살고 있고, 우리를 이을 사람들이 없습니다. 재상산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자면 귀농운동을 벌여야 하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습니다. 현재로서는 대책이 없는 상태입니다.”

앞서 말했듯 쌍호공동체는 소농구조를 갖고 있다. 경작지가 넓지 않을 뿐만 아니라 넓힐 수도 없다. 소농구조를 유지하지 않고, 한 품종만 집중 생산할 경우 부담이 훨씬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아무래도 소득이 낮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은 직불제 시행을 주장하고 있다.

“유럽처럼 직불제를 시행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직불제는 WTO나 FTA의 적용대상이 안 된다고 합니다. 사실 농사를 짓는 데는 산촌이 불리하게 마련입니다. 평야지역은 사회간접자본이 잘되어 있고 시장도 가깝습니다. 조건이 불리한 곳에는 경쟁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건 불리지역에 직불제를 통해 가격을 조금이라도 보조해 줌으로써 경쟁이 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조건 불리지역에 직불제를 실시하는 것과 함께 이들은 농업외소득지원제도 마련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농업외소득지원제는 농촌환경을 살리는 것과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도시사람들이 쉴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농사보다 더 가치가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자연을 보호하고 공기를 정화하고 댐에 물을 가둠으로써 홍수를 예방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죠. 그런 식으로 해서 농촌환경문제에 중점을 두고 농외소득을 지원하는 것입니다. 자동차를 팔고 핸드폰을 많이 팔면 분배를 제대로 하라는 얘기입니다. 분배정의가 제대로 되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쌍호공동체가 갖고 있는 이러한 고민은 다른 농촌지역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문제다. 농촌에 새로운 세대가 들어오지 않는 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농촌의 대부분 마을은 사라질 운명에 처해있다. 현재로서는 딱히 이를 해결할 대책이 없는 실정이 더 우울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쌍호공동체는 어쩌면 이를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래에 대한, 미래의 생명농업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갖고 있는 이들은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진행되어온 월례회의를 통해 공동체를 가로막는 장애물을 건너뛰었듯 이러한 난관을 해결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농촌은 지난한 세월을 견뎌왔고, 또 견뎌내고 있다. 앞으로 더 얼마나 지난한 세월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지만, 또 그 길이 그리 순탄치 않을 것임은 자명한 일이지만 투쟁과 삶, 그리고 생명의 공동체인 쌍호공동체의 앞길에 기대를 걸어본다.

면담일시 – 2007년 2월 12일

면담장소 – 경북 의성군

면담인사 – 김정상(쌍호공동체 회장)
우영식(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장)
진상구(가톨릭농민회. 의성군농민회장)
강성중(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본부 총무)

  • 0makehop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