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시장은 조용했다. 한 때는 시끌벅적한 상인들의 농담과 뜨내기 손님의 호기심 어린 눈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거대한 채소 도매시장으로 삶의 활력이 넘쳤지만, 이제는 무채색의 공간이 되어버린 안양 석수 시장. 이 쇠락한 재래 시장을 다시 살리려는 사람이 있다. ‘생활이 예술’이라는 신념을 붓 삼아, 회색의 공간을 생명력 넘치는 원색으로 다시 칠하려는 이다. 지난 1월 23일 안양 석수 시장을 찾아 예술공간 ‘스톤앤워터(Stone&Water)’의 박찬응 관장을 만났다.

그는 ‘석수 시장 레지던시(Residency) 프로그램’ 등으로 공공미술계에서는 대부 격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의 밑그림을 따라 수많은 예술가가 석수 시장의 다양한 공간을 이용해 작품을 설치하고, 퍼포먼스 공연을 펼치는 등 활발한 창작 활동을 벌여 왔다. 박 관장의 안내를 받아 둘러본 석수 시장 곳곳에서 그 작업의 결과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거리를 걸으며 마주치는 간판 하나, 커피 자판기 하나에서도 예술가의 손때 묻은 흔적을 느낄 수 있었고, 여기저기 재활용품을 이용한 기발한 예술 작품들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시장 한 편, 예술공간 ‘스톤앤워터’가 자리 잡고 있는 회색빛 건물은 시장의 여느 가게 건물과 다를 바 없다. 입구 위에 그려진 선 굵은 벽화만이 이곳의 정체성을 어렴풋이 짐작게 할 뿐이다. 2층 박 관장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벽면 가득 빽빽이 붙어있는 일정표가 손님을 맞이한다. 그의 머리에서 시작된 공공 미술 프로젝트들이 바로 이곳에서 기획되고 행해졌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사무실 옆 전시 공간에는 성탄절을 맞아 기획된 철 지난 전시회가 아직 한창이다.

오스트리아 거리에서 석수 시장을 떠올리다

“졸업 후 생계 문제로 방황 하던 때 체 게바라의 책을 읽었죠. 순식간에 읽었습니다.‘이럴 때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번쩍 들더군요.”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그는 80년대 중반부터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대중미술 활동을 시작했다. “사회가 바뀌지 않으면 미술도 안 된다” 는 신념이 있었다. 걸개그림을 그리고, 1989년에는 ‘안양문화예술운동연합’ 을 창립하기도 했다. 이후 출판사를 차려 제법 돈도 벌었다. 그러나 번 돈을 모두 쏟아 부어 최신 장비를 들여 놓자 IMF가 닥쳤다. 박 관장은 “기계 산 값도 다 못 치르고 아주 쓴 맛을 봤다”며 당시를 회상한다.

“돈 500만원을 빚내서 아이들 데리고 다섯 식구가 비행기에 올랐습니다.”
시련을 겪은 후 떠난 유럽여행.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텐트에서 잠을 자며 유럽 각지를 떠돌아다녔다. 그는 “마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오스트리아 빈에 들렀을 때다. 저마다 개성을 지닌 거리의 간판들, 창조적인 작업으로 유명한 건축가 훈더트 바서의 건물을 보면서 그는 어린 시절 뛰어 놀던 석수시장 거리를 떠올렸다. 박 관장은 “혁명을 하겠다던 사람이 거리 1km를 변화시키지 못할까” 라고 생각했다.

귀국 후 그는 석수시장을 예술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생활 속의 예술’이라는 생각을 떠올렸고, 2002년 석수시장 내에 예술공간 ‘스톤앤워터’를 열었다.
박 관장은 ‘스톤앤워터’를 “보충 공간(Supplement Space)”이라고 설명한다.
“대안의 대안입니다. 대안은 양자택일의 개념인데 반해, 예술은 보충하고 대신하는 거죠.”

그에게는 ‘예술은 경계를 따라 흐른다’ 는 신념이 있다. 박 관장 자신도 항상 미술계의 ‘변두리’에 머물렀고, ‘스톤앤워터’가 자리 잡고 있는 석수 시장의 위치도 서울과 안양의 경계다. 그는 “예술은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서 꽃피어야 하고, 꽃 핀다”고 강조했다.

2004년 박 관장은 60명이 넘는 예술가들을 초청해서 ‘안양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오래된 교각에 그림을 그리고, 쓰레기를 주워 조형물을 세웠다. 하천 주변에는 시민들이 찍은 사진이 걸렸고, 예술가들은 퍼포먼스 공연을 펼쳤다. 이 프로젝트의 성공은 그에게 “돈이 문제가 아니라 예술가들의 상상력이 관건”이라는 확신을 심어줬다.

”?”경계 하던 주민들이 떡 갖다 주며 격려해

3년 전부터는 매해 ‘석수시장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독일, 미국, 베트남 등 국내외 예술가들을 초청해 시장 곳곳의 빈 가게에 입주해 작업을 하게 했다. 그는 “작가들이 직접 입주해서 작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반드시 머물면서 주민들과 만나고 서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바탕 위에서 작품이 나와야 하죠.”

원래 주민들은 예술가들이 시장에 오가는 것을 경계하며 시큰둥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예술가가 입주하고, 주민들과 서로 살을 맞부딪히며 작업을 시작하자 벽은 곧 허물어졌다. 박 관장은 “나중에는 주민들이 말도 안 통하는 외국인 예술가에게 떡도 갖다 주고 친구가 되더라”며 웃었다.

“예전에는 혁명이나 정권 교체 같은 것을 꿈꿨지만,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주변부터 변화시키는 것으로 지향이 바뀌었죠.”
그는 말로만 떠들 뿐 실천해서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믿는다.

서두를 생각은 없다.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바뀐 것은 많지 않아도 그는 초조해 하지 않는다. 지속적으로 천천히 스며들어야 ‘문화’가 되고, 그것이 쌓여 ‘전통’이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처음 들어올 때 30년을 생각했습니다. 이곳에서 천천히 문화 바이러스를 퍼트리는 거죠.”

그가 꿈꾸는 것은 ‘전형과 전이’의 전략이다. 석수시장에서 만들어진 ‘전형’이 다른 지역으로 ‘전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위 ‘개발’ 이라는 전략이 물량 공세로 밀고 들어와 쓸어버리는 것이라면 이는 게릴라식 전략인 셈이다. 박 관장은 “문화 바이러스를 통해 개발 바이러스를 이길 수 있다” 고 힘주어 말했다.

물론 모든 프로젝트의 중심에는 주민이 있어야 한다. 그는 안양시와 같은 지방자치단체의 공공미술프로젝트에는 “주민들이 없다”고 비판했다.
“갑자기 외국인들이 나타나 길거리에서 작업을 하고, 주민들은 그저 ‘저게 유명한 작가 작품이구나’ 라고 내뱉으며 지나갑니다. 주민과 전혀 결합하지 못하는 거죠.”

”?”“철저히 실패하는 것을 해보고 싶다”

박 관장은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공무원들에 대한 적지 않은 불만이 쌓인 듯했다. 한 번은 유명한 건축가에게 안양유원지 주차장의 설계를 맡겼다 황당한 일을 겪은 적도 있다. 공무원들이 건축가에게 연락 한 번 없이 마음대로 설계를 변경해 시공을 끝내버린 것이다.
“비엔날레 한 번 갔다 온 공무원들은 자신이 전문가라고 생각합니다. 지원에 그쳐야 하는데 잘 모르면서 개입하고 간섭하죠.”

행정 편의에 따라 문화예술정책을 재단하는 것도 문제다. 그는 “경기도의 모든 박물관과 미술관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경기문화재단’ 안에 통합되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게다가 100년 이상 지속되어야 할 정책들은 연속성을 갖지 못한다. 그럴싸한 계획을 내놓으며 지원을 약속했던 정부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말을 바꾼 일이 부지기수다.
그는 “해마다 정부에서는 수많은 프로그램을 내놓지만 어떻게 지속해 갈는지 걱정”이라며 말끝을 흐린다.

인터뷰를 마친 후 그의 안내로 옥상에 올랐다. 발 아래로 회색 슬레이트 지붕들이 ‘ㅁ’자를 그리며 광장을 이루고 있다. 원래 채소를 사고파는 이들로 꽉 메워져 시장의 심장부 역할을 하던 곳이다. 지금은 주차 공간으로 전락해 일렬로 늘어선 차들만이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박 관장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다시 불러들일 꿈을 꾸고 있다. 바로 예술의 힘을 통해서다.

박 관장은 최근에 읽은 책의 한 구절을 소개하며 “사람들이 안 해본 방식으로 실패하는 것이 예술가”라고 정의했다. “이 곳에서 일을 하면 뭔가 신이 난다”는 그다.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뼈 속까지 예술가인 그다운 대답이 돌아온다.
“예술가는 익은 밥 먹고 설은 짓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철저히 실패하는 것을 해보고 싶습니다.”

(정리 / 이현구)

지난 2002년 안양 석수 시장에서 문을 연 스톤앤워터(Stone&Water)는 보충대리공간(Supplement space)입니다. 기존의 전시공간(미술관, 갤러리, 기존 대안공간 등)을 보충하고 대신한다는 뜻이죠. 좁은 틀에 갇혀 있던 미술의 영역을 일상 속으로 확장해 손상된 도시와 생활 환경을 보완하는 ‘생활 속의 예술공간’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스톤앤워터는 공간 내에서 철저히 관객 중심의 전시를 기획하고, 석수 시장 등 지역 사회의 현안에 대해 미술의 영역에서 대안을 제시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역성, 공공성, 생태주의를 기반으로 <2004년 안양천 프로젝트>, <2005~ 2007 석수시장 프로젝트>, <2005~2007 교육예술프로젝트>를 추진했고, 올 해에는 지금까지의 프로젝트를 하나로 통합하는 <2008 석수아트프로젝트(SAP)>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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