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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416 기억저장소

▲사진제공:416 기억저장소


시간이 멈춰버린 안산에서
– 김순천 (금요일엔 돌아오렴 공동저자/세월호 참사 작가기록단 단장)

사고 당일인 4월 16일, 나는 단원고 근처에 있는 안산문화예술의 전당에 있었다. 12여 년 넘게 ‘사회적인 고통’을 기록해온 나는 심신이 많이 지쳐 치유작업의 일환으로 그림을 배우고 있었다.

그날은 지극히 평범하고 펑화로운 날이었다. 그림을 그리다가 사고 소식을 들었고 충격을 받아 밖으로 나왔다. 나는 거기서 가슴을 움켜쥐고 뛰어가는 단원고 학부모들을 보았다. 진도로 가는 버스를 타러 가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니 엄청난 일이 우리에게 벌어졌다는 걸 알았다.

퍼뜩 막내동서 딸인 하은이가 단원고 학생이란 게 생각이 났다. 그런데 갑자기 1학년인지 2학년인지 헷갈렸다. 아들 새빈이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잠깐만… 2학년 같은데?” 나는 숫자 ‘2’를 듣자마자 놀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 순간 배터리가 나가서 전화가 끊겼다. 집으로 가려는데 택시는 잡히지 않고 버스도 없었다. 나는 어지러운 상태로 안산 예당에서 집까지 2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단숨에 뛰어갔다. 배터리를 충전하여 동서한테 전화를 해보니 다행히 하은이는 1학년이었다. 아들도 나도 사고의 충격으로 자주 보는 하은이의 학년이 갑자기 헷갈린 것이다. 저녁 무렵에 남편은 진도로 내려갔다. 너무 많은 이웃들이 일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마을이 온통 비상상황이었다. 우리는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밤을 보냈다. 친한 친구 일곱 명 중 다섯 명이 단원고 3학년이었던 아들 새빈이도 잠을 자지 못하고 친구들과 함께 모여 있었다.

다음날 나는 단원고로 갔다. 막내동서는 다른 학부모들이랑 함께 사람들에게 물과 김밥을 나눠주고 있었다. 진도로 내려가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대형 스크린을 보며 빨리 구조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배 안에 아이들이 살아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떤 할머니(나중에 우리 아파트에 사는 박지윤 학생의 할머니인 걸 알았다.) 진도에 내려가 있는 아들에게 직접 전화를 받았다. 기자들이 벌떼처럼 할머니에게 몰려들었다. 사진을 막 찍어댔다. 할머니를 보호하려는 사람들과 기자들 사이에 고성이 오갔다. 사람들이 다 예민해져 있었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우리 마을과 학부모들의 삶이 송두리째 뒤집어질 줄은 몰랐다.

아이들이 살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이 확인될수록 동네는 점점 조용해졌다. 무서운 침묵이 흘렀다. 길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갑자기 마을에 빙하기가 찾아온 것 같았다. 한 달이 넘는 긴 장례식이 이어졌다. 격렬한 통곡 소리만 들렸다. 너무 많은 아이들이 세상을 떠나 장례식을 치를 자리도 없었다. 아이들은 차가운 냉동고에서 자신의 장례식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그 뒤로 나의 시간은 뒤엉키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또 어떤 때는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버려 날짜를 셀 수가 없었다. 나는 바보가 되었다. 멍한 순간이 많아졌다. 감각이 사라지고 판단이 사라졌다. 일상에서 작은 실수들이 반복되었다.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리거나 어떤 일을 절반만 하고 그대로 두었다.

멍해진 반면에 지금까지 쓰지 않았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한편으로는 예민해졌고, 근본적인 질문을 많이 하게 되었다. 인간은 왜 사는가. 사회란 도대체 무엇인가. 사회가 이렇게 인간들에게 잔혹한 것이라면 그게 굳이 필요한가. ‘그런데 내가 왜 이런 질문들을 하고 앉아 있지?’ 내 자신이 어지러웠고 모든 게 뒤섞여버렸다. 이 질문들은 뭔가 죽음과 맞닿아 있을 때 내가 살고 싶어 나오는 소리들이었다. ‘사회적인 공포’를 느낀 것이다. 내 존재가 더 이상 사회적 생존을 이어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너무나 불안한 공포 속에서 끊임없이 나에게 나오는 질문들이었던 것이다. 아, 내가 지금 살고 싶구나.

영만이 어머니께서 삭발을 하면서 이런 말을 했다. “짐승 같은 세상이 아니라 행복한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짐승 같은 곳에서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는 소박하고 작은 마음이 내 안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유가족분들 곁을 지키면서 기록작업에 참여한 것도 살고 싶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자식을 잃은 많은 부모님들을 마을에 함께 살면서 일상적으로 지켜보았다. 어떤 어머니는 한 번 울기 시작하면 울음이 멈춰지지 않아 고통스러워했다. 밤 12시가 넘어 죽은 딸이 있는 추모공원에 가서 얼굴을 보고 와서야 진정이 되었다. 어떤 어머니는 딸을 만나러 간다고 세상의 경계를 넘으려고도 했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나는 그 당시 구급차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덜컥거렸다. 어떤 실종자 가족은 고통으로 심장이 너무 아파 온몸의 핏줄이 터지는 아픔을 겪었다. 무엇보다 큰 아픔은 희생된 아이들의 형제와 자매들이 외롭게 제2, 3의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적나라한 고통들을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낸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기 위해 숨기고 싶은 생각이 없다. 우리는 그 모든 고통의 증상들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외면하지 말고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그들이 자식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자식을 향한 처절한 사랑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번지고 있는지까지도 말이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나는 기억할 것이다. 살고 싶고 숨쉬고 싶기 때문에……

안산에 사는 김순천 님은 르포 작가이자 르포문학 강사입니다. 사회적 고통으로 힘겨워하는 이들을 위해 사람들의 내면 깊숙한 목소리를 글로 담아내는 작업을 오랫동안 이어오고 있습니다.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 평전 <인간의 꿈>을 비롯해 <대한민국 10대를 인터뷰하다>, <대한민국 나쁜 기업 보고서> 등을 집필했고, 젊은 르포 작가들과 함께 청계천 사람들의 삶을 담은 <마지막 공간>과 비정규직 인터뷰 <부서진 미래> 등을 공동으로 펴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담은 <금요일엔 돌아오렴> 집필에도 참여했으며, 세월호 참사 작가기록단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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