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최근 한국 사회 전체를 긴 호흡으로 전망하는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희망제작소가 진행 중인 ‘시대정신을 묻는다’ 연구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다. 서로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지만 오랫동안 한국 사회 전체를 조망하며 대안을 모색해온 지식인을 연달아 인터뷰한 뒤 공통점을 찾아내는 기획이다. 결론으로 현재 한국 사회가 한 걸음 더 전진하려면 어떤 시대정신이 필요한지 찾는 내용이다.

이 기획을 진행하느라, 운 좋게도 다양한 분야의 석학을 두루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눈다. 그런데 인터뷰 대상자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경우가 많다. 보수적인 이도, 진보적인 이도 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같은 전직 경제관료도, 조한혜정 연세대 명예교수 같은 페미니스트 문화인류학자도 있다. 학자도 있고 현장을 누비는 운동가도 있다. 얼핏 보면 같은 문제의식과 같은 대안을 내놓기 어려운 이들이다.

대화하기도 숨 쉬기도 어려운 사회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 지금 절실하게 필요한 두 가지 열쇳말이 공통적으로 떠올랐다. 하나는 ‘둘러앉아 이야기하기’이고, 다른 하나는 ‘매우 새로운 실험’이다.

‘둘러앉아 이야기하기’를 강조하는 이들은 한국 사회의 합의 구조가 깨진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한다.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 사이에도 대화와 토론을 통해 다름을 인정하며 컨센서스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밟을 수 있어야 사회가 건강하게 유지되는데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다.

‘매우 새로운 실험’을 강조하는 이들은 한국 사회가 독점과 경직성이 너무 강해 실험과 유연성을 잃어버리고 있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여긴다. 새로운 생각이 자라나도록 기존 체제가 좀더 말랑말랑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엉뚱한 생각을 가진 이들이 숨 쉬고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한국 사회는 대화하기 어렵고 숨 쉬기 어려운 사회라는 게 이들의 말 속에 들어 있는 뼈였다. 사실 한국 사회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박정희 시대를 살고 있다. 마치 1970~80년대처럼, 산업화를 이끈 이들과 민주화를 이끈 이들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사회가 굴러간다. 의사결정의 중심축이 여전히 그들 사이의 대립에 있다.

시곗바늘을 그때로 되돌리면, 보수도 진보도 문화적으로 비슷해 보인다. 산업화는 ‘일사불란’ 구호로 이뤄졌다. 위에서 결정하면 온몸 던져 만들어내야 했다. ‘하면 된다’는 맹신과 ‘까라면 까’는 복종이 동력이었다. 민주화는 ‘대동단결’ 구호로 이뤄졌다. 거대한 악마와 싸우기 위해 때로는 스스로 악마처럼 행동해야 했다. 압도적인 악마 앞에서 동지들 사이의 크고 작은 차이는 무시되어야 했고 모두 한 방향을 바라봐야 했다. 산업화도 민주화도 진행 과정에서는 소수의 생각이 발을 붙이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다양성은 자주 미숙하거나 타락했다는 손가락질을 받았다.

문제는 그런 체제가 더 이상 정당하지도 않지만 효율적이지도 않은 시대가 됐다는 데 있다. 경제문제는 이제 일사불란한 태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다양한 아이디어가 쏟아져나오고 새로운 기업이 등장하며 경쟁해야만 성장동력이 만들어질 수 있다.

‘대동단결’로는 해결 안 된다

정치문제 역시 대동단결로는 해결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독재에서 벗어나는 과정에서 한국 정치의 문제가 다수 의견이 사회 운영에 반영되지 않는 데 있었다면,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의 문제는 소수 의견이 사회 운영에 반영되지 않는 데 있다. 모두 뭉쳐 누군가에게 맞서 싸울 생각을 할 게 아니라, 더 많은 목소리가 대표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 생각을 해야 정치가 살아난다.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변화한 시대에 맞게 다양한 생각이 나타날 수 있을까?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자리, 새로운 실험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리가 늘어나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자리에 꼭 필요한 두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전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둘러앉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이견을 조정하고 이해관계를 맞추는 사람,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다. 그리고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시도하는 사람, 돌연변이다.

인터뷰 대상자 중에는 한국 사회의 연대의식이 깨졌다는 걱정을 하는 이가 많았다. 공동체 복원을 중요한 가치로 내세운다. 그런데 과거처럼 획일적 공동체를 다시 만들 수는 없다. 모두의 생각과 존재는 이미 너무나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동체 복원에는 반드시 그 모든 ‘다름’을 한자리에 둘러앉히고 함께 대화할 수 있게 만드는 능력을 지닌 퍼실리테이터가 필요하다.

인터뷰 대상자들은 어쩌면 실망스럽게도 ‘그래서 이런 답이 있다’고 말해주지는 않았다. 지금은 많은 것이 혼란 속에 있고,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필요한 게 다양한 실험과 시도라는 것으로 이야기가 모아졌다. 여러 새로운 것이 뛰어오르는 가운데 대안이 발견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새로운 정책과 제도, 새로운 기업, 새로운 삶의 방식 등 그 새로움의 영역도 다양할 수 있다. 새로운 시도는 그것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나와야 가능해진다. 그들이 돌연변이다.

능력 있는 퍼실리테이터와 새로운 돌연변이가 더 많이 등장하려면 그렇게 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여러 환경이 필요하겠지만 제도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복지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불안이 줄어들어야 새로운 실험도 가능하고 반대자를 포용하는 여유 있는 대화도 가능하다. 조금만 방심하면 경쟁에서 밀려나 생존을 위협받을 수 있는 환경에서 다양성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논의가 본격화하고 있는 청년수당 또는 청년활동지원금과 국회의원선거(총선)에서 주요 공약으로 제시된 노인 대상 기초연금 강화 정책은 매우 중요해 보인다. 경제적으로 최소한의 ‘비빌 언덕’을 만들어 불안을 줄여주는 정책이기 때문이다.

청년수당·기초연금제 개선 실험에 주목

서울시는 지난 4월11일 그동안 논란이 되던 ‘청년활동수당’을 7월부터 지급한다고 발표했다. 2015년 11월에 발표한 청년활동지원사업의 구체적인 계획도 함께 공개했다. 청년들이 구직활동에 나설 수 있도록 최장 6개월간 활동비 50만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매달 50만원씩 현금으로 지급되는 수당의 용도는 지정되지 않았다. 다만 지원대상자를 공모해 평가하는 과정에서 가구소득, 부양가족 수, 미취업 기간을 평가하지만 사회활동 참여 의지 및 진로 계획의 적절성도 평가한다. 그리고 매달 활동보고서를 받아 활동 내용 적절성 여부에 따라 수당 지급 지속 여부를 결정한다. 즉, 사회활동을 제대로 기획해야 받을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교육·훈련 프로그램도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기초자치단체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나왔다. 서울 노원구는 구직활동을 하는 청년과 청소년에게 취업지원준비금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노원구와 노원교육복지재단은 지역에 거주하는 만 16∼24살 미취업 청년과 청소년 50명을 뽑아 1인당 200만원을 지원한다고 밝혔다. 가구 재산은 1억5천만원, 가구소득은 중위소득의 120%(526만원)를 넘지 않는 사람이 대상이다. 200만원의 지원금은 교육비 등으로 쓸 수 있다.

예산 규모는 크지 않지만 이런 지방자치단체의 실험은 기존 정당들을 자극했다. 이번 총선에서 주요 정당이 청년수당 공약을 앞다퉈 내놓았다. 더불어민주당은 월 60만원씩 6개월간 지급하는 취업활동지원금 도입을 공약했다. 국민의당도 월 50만원씩 6개월간 지급하는 후납형 청년구직수당 도입을 공약했다. 지방자치단체에서 시작한 실험이 큰 반향을 일으키는 모양새다. 20대 국회에서는 두 정당의 의석을 합치면 과반이 되었으니 곧 도입할 수 있게 됐다.

기초연금에서도 변화가 가능하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총선에서 기초연금법 개정 추진을 통해 현재 소득 하위 70% 노인에게 월 10만~20만원을 차등 지급하는 기초연금을 2016년 20만원 균등 지급으로 제도를 개선하고 2018년까지 단계적으로 30만원으로 인상하겠다고 공약했다. 국민의당은 기초생활수급자에게 수급액만큼 ‘줬다 뺐고’, 국민연금 가입자에게 연금 수령액과 비례해 감액하는 현행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했다. 또 어르신 일자리를 두 배 늘리면서 수당과 기간을 확대하겠다고 공약했다. 기초연금과 어르신 일자리 모두 국가가 주도해 노인소득을 늘리겠다는 내용이다.

아직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한 청년이나 노동시장에서 나온 노인층의 소득 증대는 궁극적으로 불안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새로운 실험을 해보다 실패해도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은 맞지 않는다는 믿음을 줄 수 있다. 결과적으로 마음 놓고 새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돌연변이의 생존 기반이 된다. 또한 잠재적 경쟁자인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패배하더라도 생존을 위협받지 않을 수 있다는 안정감을 준다. 따라서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과 공존하며 대화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돌연변이를 많이 키우자

지금 한국 사회에 던져진 가장 큰 질문은 무엇일까. 성장을 위해서라도 ‘다양성’을 수용해야 한다는 점은 명확해졌는데, 이를 어떻게 수용할 수 있느냐로 귀결된다. 퍼실리테이터와 돌연변이를 많이 키우는 일, 그리고 그들을 키울 수 있는 교육 환경과 경제복지 환경을 구축하는 일이 중요한 답이 될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리는 유쾌해야 할 먹고사는 일이 불안과 고통과 분열과 질시의 열쇳말이 되어버린 이상한 시대에 살고 있다. 조화로운 삶을 옥죄고 깨뜨리는 ‘먹고사니즘’을 조화로운 삶을 강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새로 치장하려 노력하며 글을 썼다. 그동안 부족한 글에 공감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 한겨레21 / 2016.04.18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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