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지인이 은퇴 뒤 이사를 갔다. 수십 년 살던 서울을 떠나 지방 도시로 거처를 옮겼다. 서울에서 전세금을 빼서 충분한 면적의 집을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고도 3천여만원이 남았다. 그는 돈을 어디에 쓸지 고민하다, 그중 2천만원을 친구들에게 쓰기로 결정했다. 낯선 지역으로 와서 아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 가능한 한 많은 이들을 집으로 불러 대접하면서 관계를 유지하는 데 투자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 1년 동안은 전국에서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수많은 친구들 집에 초대받아 가게 됐다. 베푼 것을 돌려받는 과정이었다. 여러 지역을 방문하고, 오랜만에 직장과 관계없는 대화를 집중적으로 나눌 수 있었다. 삶은 풍요로워졌다. 은퇴 뒤 사라질 수 있었던 지인 네트워크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평생 일터를 중심으로 살던 사람은 은퇴와 함께 혼자만의 고립된 삶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높다. 바로 그때 그는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는 대신 친구 관계에 투자하겠다는 결정을 했던 것이다. 금전적으로는 손실이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할 때보다 더 순수하고 친밀한 네트워크가 구축됐다. 친구 관계를 편익으로 환산해본다면 금전적 손실을 만회하고도 크게 남는 투자였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은퇴 뒤 관계 면에서는 대박이 터진 셈이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 먹는 일은 공포스러운 일이다. 다들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 노년을 상상하지만, 바로 뒤 묵직한 질문이 따라온다. ‘그 여유를 위해 얼마를 모아두어야 할까? 그만큼을 모으기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금융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5억원설, 10억원설, 20억원설이 머리를 스쳐간다.

‘전문가’라는 타이틀에 걸맞지 않게 결론이 우악스럽다. ‘여유 있는 노후를 보내려면, 내가 평생 한 번도 만져보지도 써보지도 못한 거금을 통장에 쟁여두어야 한다.’ 그 통장을 갖지 못한 이들은 한해 한해가 초조하고 공포스러울 뿐이다.

어차피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이다. 초현실적 금액을 설정해두고 스스로 불행해질 필요는 없다. 어쩌면 금융상품을 팔아야 하는 금융사들의 공포마케팅의 결과일지 모른다. 오히려 문제는 나의 내면에 있다. 나는 노후 준비에 대한 질문을 바꿔볼 준비가 되었는가? ‘노후에 얼마가 필요한가, 그 얼마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과감히 폐기하고, ‘노후에 나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가?

물론 돈은 중요하다. 사망 직전까지 적절한 수입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도 필요하다. 가장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일이다. 우리는 일을 통해 자신이 사회에 여전히 필요한 존재라는 점을 확인한다. 그리고 배움이 필요하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지 않는 순간 성장이 멈추고, 성장이 멈추는 순간 삶은 피폐해진다.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친구가 필요하다.

하나하나 따져보자. 우선 돈이다.

돈은 흐름이다. 늘 자산보다 소득이 중요하고 현금이 중요하다. 10억원 필요설은 잊어버리자. 자산 중심 사고방식이다. 오히려 한 달에 얼마의 소득이 필요한지를 생각해보자.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14년 낸 ‘초고령사회와 노후소득’ 보고서에서는 65살 이상 월평균 가구 지출을 153만원으로 추정했다. 상위 10%는 236만원, 하위 10%는 84만원이다. 물론 이 수치는 평균이며 근사치일 뿐이다. 얼마나 필요한지는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그럼 노후 수입은 어떻게 될까? 국민 대부분이 가입한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30년 동안 월급 200만원을 받으며 일한 사람이라면 65살 이후 국민연금 80만원가량을 받게 될 것이다. 여기에 기초연금을 더하면 연금소득이 된다. 현재 기초연금은 국민연금 가입 기간에 따라 10만~20만원에서 결정된다. 보수적으로 잡으면 90만원가량의 연금소득이 생긴다고 볼 수 있다.

월급 200만원을 받으며 30년을 일했다면 현재 한국 사회에서 상당히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연금소득은 필요 지출액에 많이 못 미친다.

연금을 꾸준히 강화해가면 돈을 ‘모아두는’ 일은 거의 필요 없게 된다. 역설적으로 노후를 위해 무리하게 모아두지 않고 적절하게 일하고 적절하게 소비하며 보람 있게 사는 여유를 줄 수 있다. 물론 그만큼 세금도 더 내야 한다.

노후생활에 필요한 것은 돈만이 아니다

소득에 더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일’이다.

한 달 50만원 월급을 받는 단시간 일자리라도, 연이자율 3%인 경제에서는 2억원의 자산에 해당한다. 저금리 시대에 노동과 임금의 가치는 과거보다 훨씬 더 올라간다. 그래서 자산보다 몸뚱아리가 더 중요해진다. 사실 일은 돈을 벌기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자신이 여전히 이 사회에 필요하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일이 필요하다. 돈이 아니라 보람을 벌기 위한 일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은퇴 뒤 이상적인 일은 필요 지출액과 연금 수령액의 차이를 메우는 약간의 소득과, 사회에 기여하는 보람과, 다른 이들의 인정을 받을 수 있으며, 노동시간이 길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단시간 일자리나 사회공헌 일자리가 더 많이 필요하다.

단시간 일자리는 ‘미니잡’이라고도 불리는 파트타임 일자리다. 여기에 사회 기여와 자존심을 더하면 ‘사회공헌 일자리’가 된다. 돌봄, 사회적 경제, 비영리 같은 영역의 일이 그것이다. 노년층에게 이상적인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기술 변화가 가파르다. 로봇과 소프트웨어는 점점 더 많은 역할을 할 것이다. 이미 무인자동차와 드론이 사람이 할 일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공포스러운가? 그럴 일은 아니다. 대신 사람이 하는 것이 바람직한 다른 일을 찾으면 된다. 로봇이 당장 대체할 수 없는 일은 두 가지다. 창조적으로 기획하는 일과, 전통적으로 가족이나 친구나 이웃이 하던 ‘돌봄’ 영역의 일이다. 즉 창조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이 인간이 해야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노년에도 창조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일은 육체적으로 젊고 빠른 변화에 민감한 청년기나 중년기에 몰리게 될 것이다. 노년기에 집중적으로 할 일은 어쩌면 사랑하는 일이다. 과거에 친구나 이웃이 하던 일을 더 하는 것이 맞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일, 남의 고민을 들어주는 일, 사람들에게 공감해주는 일,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충고해주는 일이다.

사회 속에서 존재감을 잃지 않도록

동네 정자에 앉아 수다 떠는 어르신은 ‘상담’이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등굣길 초등학생들에게 ‘차 조심해라’라고 외치던 오지랖 넓은 어르신은 ‘안전 관리’라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서관에 찾아온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동화책을 권해주는 어르신은 사서 업무를 하는 중이다. 이미 할아버지·할머니가 하시던 아이 보기는 ‘보육’이라는 이름으로 노동의 영역으로 진입한 지 오래다. 일과 봉사, 일과 여가는 섞이고 합쳐진다. 일주일 10시간도 좋고, 20시간도 좋다. 어떤 방식으로든 건강한 노인이 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재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용돈 수준이라도 그 일의 대가로 수입을 얻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희망제작소의 최근 연구 결과를 참고해보자. ‘새로운 생애주기 관점으로 파악한 베이비부머들의 욕구 및 지원방안-사무직 중년층을 중심으로’ 보고서를 보면, 고소득자이거나 은퇴 대비 재정 준비가 잘된 사람도 80~90%가 은퇴 뒤 일을 계속 하고 싶어 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또한 금전적 필요 때문에 일을 하겠다는 사람은 조사 대상자의 절반도 되지 않고, 자아실현, 능력 활용, 사회적 기여 등의 동기로 일을 하겠다는 대답이 나머지 절반이었다.

마지막으로 지방 도시로 이사간 그가 과감하게 투자했던 ‘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저 친구가 있으면 즐겁다는 수준을 넘어선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일은 ‘회사’라는 커뮤니티 안에서 벌어진다. 삶도 그 커뮤니티 안에서 벌어진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모른다. 직장인들은 회사 사무실에 ‘거주’하기 때문이다. 언제든 점심 먹을 친구가 곁에 있고, 언제든 차 마실 동료가 옆에 있다. 직장 상사 욕을 같이 할 동료도, 정치 토론을 할 동지도 모두 갖춰져 있다. 그리고 대화가 깊어지면, 같이 회사를 나가 창업을 해볼까, 회사 안에서 새로운 사업을 같이 만들어볼까 도모해보기도 한다.

실은 회사를 떠나도 그런 사람들이 있어야 삶이 유지된다. 그런데 은퇴와 동시에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 어디서 그런 사람들을 찾을까? 가장 쉬운 길은 지역 커뮤니티다. 동네 도서관과 취미 동아리가 그렇다. 마을공동체의 지향점도 그렇다.

마을공동체의 모범 사례로 일컫는 서울 성미산마을에 사는 지인은 이렇게 말했다. ‘저녁에 맥주 마시기 가장 편한 곳이 동네’라고. 어쩌면 저녁에 편하게 한잔 걸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만들어진 것이 성미산 마을공동체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세상 이야기를 떠들썩하게 하며 기분 좋게 한잔 걸쳤는데,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고 다음날 아침에 피곤하다면. 이 사람들이 한 동네에 살고 매일 저녁 이런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이런 상념 끝에 모여들게 된 것이 아닐까.

동네 사람과 맥주 한잔 너머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같이 창업도 할 수 있고 일자리도 구할 수 있고 정치토론도 하고 사회단체 후원도 같이 하면서 세상을 구하는 투사가 되어볼 수 있다면. 꿈같은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회사에서 그런 친구를 만난다. 그런 회사를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노년에는 동네에 그런 친구들을 만들어두어야 한다. 그래야 삶이 이어진다.

관계·배움·건강 그리고 정치인에 투자하자

이 모든 것이 가능하려면 건강이 필수적이다. 노동시간을 줄이고 운동을 하며 취미생활을 개발해 건강하게 살아야 한다.

복지국가의 목표는 이런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라야 한다. 아직은 갈 길이 멀다. 하지만 국가가 해줄 때까지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자구책을 마련해두어야 한다.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가 일자리와 관계를 위해 투자해두는 일이다.

은퇴 뒤 얻을 새로운 일자리를 위한 투자는 자신에게 새로운 배움을 허락하는 일이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노년기에도 할 수 있는 단순한 일을 익히고, 새로운 학습공동체에 참여해 새로운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다.

지방 도시로 이사간 그를 다시 떠올려본다. 그 2천만원을 금융상품에 투자했으면 어땠을까. 빚을 보태 치킨집을 열었다면 어땠을까. 지금 같은 투자 성과를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친구에게 투자하기로 한 그 결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지혜로운 선택이었던 것 같다. 관계에 투자하고, 배움에 투자하고, 건강에 투자하자. 그리고 기초연금과 사회적 경제와 돌봄 일자리를 적극적으로 강화하겠다는 정치인에게 투자하자.

요즘 같은 상황에서는, 이게 주식이나 부동산보다는 더 나은 수익을 가져다줄 재테크 전략일 것 같다. 이상적인 복지국가가 만들어진다 하더라도, 국가가 친구를 만들어주거나 지식을 머릿속에 주입해줄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 한겨레21 / 2015.9.23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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