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그 시간, 벌써 넉 달이 지났군요. 1월이었으니까요. 정말로 오랜만에 당신의 분노를 보았던 그 자리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불합리한 세제와 무능한 정치, 비겁한 재벌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부조리에 분노한 열혈 대학생을 만난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세금이었습니다. 연말정산을 해보니 300만원을 내놓아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는 게 그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이 나라에는 근로소득세를 정산해 300만원을 내놓기는커녕, 근로소득세 총액이 300만원을 넘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승리 뒤 꺼내지 못한 이야기

그럼에도 당신과 당신의 동료들은 승리했습니다. 야당은 세금폭탄이라며 목소리를 높였고 경제부총리는 당황하며 머리 숙였습니다. 그리고 지난 5월12일, 연말정산 보완대책이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증세 기준점이 원래 3500만원에서 5500만원으로 올랐습니다. 7천만원 이하 소득자의 세금 부담도 일부 낮췄습니다. 이달 월급날에 당신은 연말정산 방식 변경으로 내놓았던 돈을 일부 다시 돌려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차마 꺼내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신은 나라가 중산층을 괴롭힌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연봉이 6천만원 이상이라면 이번에 연말정산을 한 근로소득자 가운데 상위 16.5%입니다. 6명 중 1명입니다. 당신은 대학에 진학한 자녀를 위해 국가장학금을 신청하려다 깜짝 놀랐을지도 모릅니다. 소득 상위 20%까지의 고소득 가정에는 국가장학금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이 울분을 토하게 한 300만원은 물론 큰돈입니다. 이번에 연말정산을 신청한 사람 1600만 명 중 수입이 정확히 가운데 있는 사람은 월 200만원을 못 법니다. 중위 소득이 연 2300만원이니까요.

대략 중위 소득의 150% 이상을 고소득층으로 분류합니다. 그렇다면 연소득 3500만원 이상이면 고소득층입니다.

당신은 중산층이 아닙니다. 압도적인 고소득층입니다. 한국은 대다수 월급쟁이가 저소득자인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당신은 월급쟁이 유리지갑을 털어갔다며 목청을 높였습니다. 네, 투명하게 지갑을 내보인 당신의 정직은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연말정산을 모두 마치고 나서 실제로 낸 세금은 253만원, 4.22% 안팎일 것입니다. 연소득 6천만원 월급쟁이의 평균 실효세율이 그러니까요. 실효세율은 지난해보다 0.11%포인트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연봉 3천만원인 사람은 0.41%포인트가 높아졌군요. 게다가 당신의 국민연금과 건강보험료는 회사에서 절반을 내줍니다. 그럴듯한 회사를 다니지 못하는 이들은 얻을 수 없는 특권입니다.

이번에 월급쟁이들이 부담한 실효세율은 사실 너무 낮습니다. 연봉 1억원이 넘는 사람은 이 나라 상위 3% 부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실제로 낸 세금은 1천만원에 미치지 못합니다. 소득 상위 9%인 연봉 7천만원은 실효세율이 5%, 5500만원이라면 3% 중반밖에 되지 않습니다. 자녀 수나 교육비, 의료비 등 공제 항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평균은 이렇습니다. 근로소득세 실효세율이 이래서는 복지 확대가 불가능합니다. 이른바 초고소득 부자에게도 세금을 거둬야겠지만, 그것만으로 복지 재정을 다 메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99%이다’가 망쳤습니다

맞습니다. 당신에게 이번 세제개편은 불리했습니다. 연 6천만원 이상 버는 이는 어쨌든 부담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이달 월급날이면 늘어난 부담분 가운데 상당 부분을 돌려받을 겁니다. 게다가 이전 다섯 해 동안, 6천만원 이상 버는 당신의 세금 부담은 줄었습니다. 그동안 당신보다 덜 버는 이의 세금 부담은 늘었습니다. 소득세는 계속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물론 불의를 향한 당신의 분노는 정당합니다. 연봉 6천만원인 당신이 10만 년을 일하며 모조리 저축해도 모을 수 없는 돈을 편법 투자와 일감 몰아주기 몇 번으로 쌓은 재벌 3세를 압니다. 이들이 소유한 대기업은 여러 가지 명목으로 법인세를 감면받아 중소기업보다도 낮은 세율을 적용받습니다. 탈세와 조세 회피를 일삼는 이들도 눈에 띕니다. 당연히 바로잡아야 하는 일입니다. 이들의 기득권이 깨지는 게 중요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순서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때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것처럼 기세등등하던 ‘월가 점령 운동’은 결국 형체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최상층 1%만을 겨냥한 게 패착이었습니다. ‘우리는 99%이다’라는 구호가 일을 망쳤습니다. 나와 내가 어울리는 가족과 친척과 친구는 변화하지 않아도 되고, 평생 한 번 만나보기조차 어려운 억만장자들만 바꾸면 세상이 바뀐다는 믿음은 애초 문제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20%이다’라는 구호 아래 고소득 직장인들이 먼저 나서서 개혁을 주도했다면 좀 다른 상황이 펼쳐지지 않았을까요?

나는 아무 문제 없으니 나보다 훨씬 강한 이들만 변하면 세상이 바뀐다는 믿음은 세상을 영영 제자리에 붙들어두고 맙니다. 우리 ‘을’도 누군가에게는 다시 ‘갑’이 됩니다. 연봉 6천만원 이상인 당신은 이미 훨씬 많은 이들보다 세상을 바꿀 여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월급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주변에 그런 이들만 있게 마련이고, 월급 500만원인 사람은 주변에 그만큼이나 그 이상 버는 이들이 있게 마련이고, 월급 200만원인 사람은 주변에 그만큼 버는 이들만 있게 마련입니다. 아마도 당신은 당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지 모를 것입니다. 자신이 버는 돈이 얼마나 되는지 모릅니다. 이웃이 어떻게 먹고살아가는지를 전혀 모릅니다.

연봉 6천만원 받고도 힘든 4인 가구 가장이 있을 겁니다. 당신과 당신의 직장 동료는 다들 그럴 겁니다. 하지만 연봉 2천만원 받아서 식구 먹고살기도 빠듯한 4인 가구 가장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연봉 2천만원으로도 이웃을 위해 기부하고 자원봉사하며 사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월급 150만원 받아서 힘든 60대 어른도 있고, 아르바이트비가 월 100만원 남짓이라 힘든 20대 청년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연봉 2억원 받으면서도 힘들다고 이야기하는 4인 가구 가장을 본 일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보니 실제로 그는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습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 해도, 이 나라의 월급쟁이 절반이 월급 230만원 이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장시간 일하면서 일터에서 자존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에도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 이곳에서, 삶은 전쟁입니다. 대기업은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느라 힘듭니다. 자동차 회사는 더 많은 자동차를 팔아야 하고, 전자회사는 더 나은 스마트폰을 먼저 만들어내야 하고, 대형마트는 더 싼 물건을 더 많이 매장에 가져다놓고 팔아야 합니다. 1초라도 빠르고 1원이라도 값싼 제품만이 살아남는다, 나머지는 모두 죽는다는 메시지를 모두가 되뇝니다. 이러니 연봉 6천만원이라도 당연히 힘듭니다.

이 상황을 깰 투자가 필요합니다

협력업체는 더 힘듭니다. 대기업은 자꾸 납기를 당기고 가격을 낮추라 합니다. 경쟁사는 점점 늘어납니다. 직원 월급을 올려주기도 빠듯합니다. 그래서 이제 괜찮은 청년들은 중소기업에서 일자리를 찾지 않습니다. 악순환입니다.

협력업체에 납품하는 2차, 3차 협력업체는 당연히 더 힘듭니다. 대형마트와 경쟁해서 살아남아야 하는 슈퍼마켓이나, 영세 납품업체도 비슷합니다.

힘들게 살다보니 사람들도 더 강퍅해집니다. 정규직 노동자는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너그럽기 어렵지요. 자기 직장이 늘 불안한 줄 위에서 곡예 중이고 자신의 미래도 불안한데 왜 비정규직 이웃까지 챙겨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 법도 합니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실업자에게 너그럽기는 더 어려울 것입니다. 동네 슈퍼마켓과 편의점 주인이 점원과 청년 아르바이트생에게 너그럽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인지요.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 최고입니다. 출산율은 최저입니다. 청년들은 삶의 대안을 찾아헤매고 있습니다. 사회적 역할을 잃은 고령자들은 빈곤과 불안에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깨뜨리려면 투자가 필요합니다. 재정이 들어가는 일입니다. 물론 많이 버는 이가 더 많이 내야 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나누어 더 낼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부담도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뀌는 게 아니라, 99%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연봉 6천만원을 받는 이들 상당수도 허덕입니다. 하지만 실은 연봉이 적어서가 아니고, 세금이 많아서는 더욱 아닙니다. 자산이 없고 미래가 불안하며 부담해야 하는 비용이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그 불안이 당신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습니다.

그 불안을 줄이려면 복지를 강화해야 합니다. 그 재원은 같이 내는 세금에서 나옵니다. 누군가는 부담해야 합니다. 무엇인가 요구하려면, 부담하면서 요구하는 게 더욱 힘이 실립니다.

이달 월급봉투로 돌려받을 전리품을, 올바른 일을 하는 시민단체와 정책 대안을 만드는 민간 독립 싱크탱크에 대한 후원금으로 돌려주면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분노도 요구도 더 강한 힘을 발휘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요구하는 겁니다. 엉성한 과세에, 불공정한 세제에, 비효율적인 정부를 바로잡으라고 요구하시지요.

우리 모두가 이기려고만 하면서 결국 누구도 이기지 못하는 이 악마의 게임은, 어쩌면 서로 조금씩 져주는 것으로 시작해 끝낼 수 있지 않을까요?

악마의 게임을 끝낼 방법 하나

물론 져준다는 일은, 힘 있는 사람이나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매듭은 꼭대기에서 먼저 풀어야 합니다. 하지만 조금 돌려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결국 누군가에게는 더 힘 있는 사람이고 더 가진 사람입니다.

대기업이 협력업체에 조금만 져준다면, 대기업이 조금 더 쳐준 기계값·재료값으로 협력 중소기업은 그 직원이나 2차 협력 중소기업 노동자의 삶의 질을 조금 높여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긴 여유로 노동자는 윤리적이고 성실한 생산자에게 값을 조금 더 쳐주고 사는 소비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소비자를 보고, 유통업체는 좋은 납품업체와 지역 중소상인에게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납품업체에서 일하는 정규직은 미래의 불안에 덜 시달릴 수 있고, 비정규직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청년 실업자에게도 따뜻한 도움의 손길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성실하게 세금을 내는 당신, 불공정함을 참지 못하는 당신, 올바른 일을 돕는 당신, 연봉 6천만원의 분노한 당신을 지지합니다. 당신이 움직이면 세상이 바뀝니다.

[ 한겨레 / 2015.5.26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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