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행복해지려고 일하는 건데 일하려고 일하는 것 같다.”(30대 남성·관리직) “가장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일해야 행복하다.”(40대 여성·프리랜서) “정규직이라는 이유로 개인 생활을 송두리째 회사에 맡기는 삶은 행복할 수 없다는 걸 이제 알았다.”(20대 여성·서비스직)
희망제작소가 창립 10주년 기획연구 ‘좋은 일, 공정한 노동’의 일환으로 2015년 11월17일부터 2016년 1월31일까지 진행한 ‘좋은 일 기준 찾기 설문조사’에 참여자들이 남긴 추가 글 중 일부다.

이 연구는 우리 사회에 ‘좋은 일’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해 이뤄졌다. 정규직 여부, 임금 수준만으로는 일하는 사람이 만족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하는지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희망제작소는 먼저 우리 사회의 여러 직장인, 특히 청년층을 집중 인터뷰했다. 그중에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여성의 사례가 있다.

한 명은 통역대학원을 졸업하고 정부 기관에서 외신 홍보 업무를 하는 30대 후반 여성이다. 연봉은 4천만원대. 전공과 전문성을 살린 직장임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만족하느냐?”고 묻자 “그렇지 않다”고 잘라 말했다. 매일 ‘계약직 직원’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었다. 지난 6년간 2년마다 계약을 갱신해왔다. 승진할 자리도 없다. 한 공간에서 일하는 일반직 공무원들과의 신분 차이도 미묘하게 느낀다. 근무 강도나 환경이 만족스럽다는 점으로는 이런 불만을 상쇄하기 어렵다고 했다.

시민단체 주 4일 근무제 정착

다른 한 여성은 30대 초반으로 프랜차이즈 커피숍에서 일한다. 대학 전공은 전혀 다른 분야였다. 졸업 후 첫 취직은 전공과 연관성이 컸다. 해외 출장 기회도 많았다. 그렇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장님이 회사를 두 개로 나눴다. 주 5일 근무제 적용을 피하려고 한 것이다. 제일 싫은 것은 사장이 일방적으로 정한, ‘5분 지각하면 월급 1만원 까기’와 같은 불합리한 규칙이었다.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 지금 직장에 입사했다. ‘전 직원 본사 직접 채용’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학력·성별 차별이 없다고 했다. 입사해보니 정말 그랬다. 눈치도 빠르고, 체력도 좋고, 의욕적이어야 하는 등 능력이 요구되기는 했지만 다른 차별은 없었다. 이 여성은 자신의 일에 “만족스럽다”고 했다.

노동조건이 남다른 직장도 탐방해봤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는 ‘주 4일 근무제’를 실시하고 있다. 시민 회비로 운영되는 단체라 직원들에게 높은 임금이나 복지 혜택을 주기는 어렵지만 “자율성은 더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2014년부터 ‘노동시간 줄이기’ 실험을 시작했다. 직원들은 스스로 논의한 끝에 ‘금요일 오후 2시 퇴근’ ‘금요일 격주 출근’을 단계적으로 시도하다 2015년 3월 ‘주 4일 근무제’를 정착시켰다. 이후 1년간의 경험에 대해 정진임 사무국장은 “결론은 주 4일제 해도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했다. 개인이 업무를 조율하도록 자율권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삶의 질도 자연히 높아졌다. 직원들은 “요즘 청년들이 ‘삼포 세대’라는데 우리 중에는 결혼 안 한 사람이 없다”면서 “포기를 모르는 자들이라고 불린다”고 했다.

이 밖에도 ‘일과 삶의 균형’을 최우선 목표로 하는 기업 뉴스킨코리아, 지하철 청소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승진과 교육 기회를 부여한 ㈜서울메트로환경, 재미와 개인의 발전을 중요시하는 기업 ㈜우아한형제들(배달의민족) 등을 탐방했다. 이 사례들을 제시한 이유는 ‘좋은 일’의 요건을 하나씩 생각해 보고, 추구해야 할 ‘좋은 일’의 상(像)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이 연재 시리즈를 희망제작소 해피로그(네이버 블로그)에 올리면서 ‘좋은 일 기준 찾기’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글을 읽고 설문조사에 참여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다.

네이버 해피빈재단의 도움으로 진행된 설문조사는 일의 6가지 측면(고용안정, 직무·직업 특성, 개인의 발전, 임금, 근로조건, 관계)에서 ‘좋은 일’의 기준을 생각해보도록 구성됐다. 두 달 반 동안 총 1만5399명이 참여했다. 특이한 것은 20대(40%)와 30대(42%) 참여도가 높았다는 것이다. 직종별로는 사무직(64%)이 서비스직(13%), 생산직(5%) 등보다 높았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좋은 일’의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임금·고용안정보다 ‘근로조건’(48%)을 선택한 사람이 훨씬 많았다. 여기서 ‘근로조건’은 근로시간, 개인 삶 존중, 스트레스 강도 등에 대한 측면이다. 고용안정(16%), 직무·직업 특성(13%), 임금(12%), 개인의 발전(7%), 관계(4%)의 항목이 뒤를 이었다.

임금·고용안정보다 근로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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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0대와 30대는 ‘근로조건’을 택한 비율이 각각 51.0%, 48.4%로 눈에 띄게 높았다. 20~30대가 일과 삶의 균형, 삶의 질 등을 이전 세대보다 더 많이 고민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근로시간’ 측면의 세부 항목 중에서는 ‘노동시간’(36%)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꼽혔다. 이어서 ‘삶의 질 증진을 위한 부가적 근로조건 제공’(33%),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 없는 환경’(17%), ‘강제 회식 등 프라이버시 침해 없는 근로조건’(14%) 순서로 응답이 높게 나왔다.

‘직무·직업 특성’을 택한 응답이 ‘임금’보다 많았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그 세부 항목 중 ‘적성에 맞거나 재미있는 일’(52%)에 대한 응답이 높았다.

이 조사를 통해 도출한 ‘좋은 일’의 상은 다음과 같다. ‘정년이 보장되며, 주 40시간 이하 노동시간을 지키고, 나의 적성에 맞거나 재미있으며, 일하는 사람 간에 화합할 수 있는 환경과 문화가 갖춰져 있고, 일하는 과정에서 나의 전문성과 숙련도가 증진되며, 그에 따라 임금도 상승하는 일’이다.

‘좋은 일’ 확산을 위해 필요한 제도·방향을 묻는 질문(복수 선택, 총 응답 수 4만14건)에는 ‘좋은 일의 기준 정립 및 확산’(19%), ‘좋은 일 기준에 맞는 고용 촉진’(15%) 등이 높은 응답을 받았다. ‘근로기준법, 차별금지 법령 위반 기업 감독 및 처벌 강화’(17%)에 대한 응답도 상당히 높았다.

심층 분석을 위해 연령·성별·직종별로 선별한 응답자 11명과 지난 2월20일 ‘좋은 일 찾기 복면 좌담회’를 가졌을 때는 더 구체적인 의견이 제시됐다. “채용 공고 때 정확한 임금과 근로조건 공개를 법제화해야 한다” “근로계약서 내용 전체를 외부에 공개해야 한다” “노동법 교육도 청소년기부터 의무화해야 한다” 등이었다.

노동 관련 전문가들과 함께 2월24일 진행한 ‘좋은 일을 위한 단순 명료한 정책요구 토론회’에서는 더 구체적인 방법이 나왔다. 강성태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노동자가 고용계약을 맺기 전 지역 고용관청을 방문해 최저 근로기준을 담은 ‘근로기준 명세서’를 교부받도록 의무화하자”는 방안을 내놨다. “노동자들이 고용계약 내용을 분명히 알고 체결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강진구 경향신문 논설위원(공인노무사)은 ‘공정노동 인증제’를 만들어서 좋은 일자리를 만들고 유지하는 기업에 인증을 부여하는 방안을 내놨다.

희망제작소의 ‘좋은 일, 공정한 노동’ 연구 프로젝트는 계속된다. ‘좋은 일 기준’을 더 상세히 만들어 가기 위한 청소년·취업준비생 대상 워크숍과 강의 등이 올 한 해 계속된다. 무엇이 ‘좋은 일’인지 더 생각하고 나눠보자는 취지다. 각자가 지금 자신의 일을 돌아볼 수 있고, 어떻게 개선할지 의견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래야 향후 1~2년, 온갖 정책이 쏟아질 국면에서 고용률만 높이는 게 아니라 진짜 ‘좋은 일’을 만드는 고용정책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겨레21 / 2016.05.21 / 황세원 희망제작소 사회의제팀 선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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