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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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변협 협회장과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장을 지낸 김창국 변호사는 인권과 역사의 해결사다. 권위주의 정권시절 부장검사를 하다 나왔는데도 그는 관료주의 틀에 영혼이 젖어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180도 궤도를 수정해 후반기의 삶을 살아왔다. 협회장 중 일부는 김창국 변호사를 ‘노선이 다른 분’이라고 한다. 좌파라는 얘기를 조심스럽게 우회해서 하는 말이다. 김창국 변호사가 민변에 들어가 활동을 하고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그는 검사에서 운동권으로 전향을 한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이분법적으로 편 가르기를 한 단순한 평가다.

그는 자신의 사상과 노선을 솔직히 내놓고 대한변협 협회장에 당선됐다. 대한변협 협회장을 마치고 초대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장관급의 국가기관장인 것이다. 인권위원장 시절 소수자와 약자들이 겪는 사회적 차별을 없애자고 방향을 설정했다. 이어서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색출해서 그 자손들에게 물려준 땅을 환수하는 책임자가 됐다. 위원회 조사위원들을 대거 투입시켜 이완용, 송병준, 배정자 등 친일파의 후손이 조상의 땅으로 지금도 잘사는지를 확인하는 작업들을 했다. 친일파의 후손들까지 그 재산으로 잘살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장으로 일하며 일그러진 역사를 바로잡는데 큰 공헌을 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진짜 큰일을 한 것이다. 칠십이 훌쩍 넘은 지금도 희망제작소의 이사장으로 일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얼어붙었던 날씨가 조금 풀린 2012년 1월17일 양재역 부근에 있는 그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먼지 한 점 없이 정리된 깨끗한 방에는 나무 책상과 소파가 놓여있었고, 벽에는 ‘가장 중요한 건 눈에 잘 보이지 않아’라고 쓰여 있는 액자가 걸려 있었다. 탁자 아래에는 바둑판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소파에 마주앉자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요즈음은 친구들과 바둑을 두는 순간이 가장 즐거워요.” 문득 백발이 된 그의 머리를 보면서 신선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월과 바람은 인간도 숙성시키는 것 같다.

 “어떻게 사십니까?” 나도 나이가 먹었는지 선배들의 인생 마지막 라운드가 궁금하다. 그는 이제 숨 가빴던 일선에서 한발 물러난 것 같았다. “아이들을 다 출가시키고, 우리 부부만 사는데 집사람이 끼니 때마다 뭘 해 먹지? 하고 고민을 하더라고. 그래서 요리학원에 나가볼까 마음먹고 있어요.” 요리학원은 그의 노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재료가 될 것 같다. “오래 전부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보겠다는 꿈을 키워왔는데 이제는 체력이 감당하지 못해 그 꿈을 접었습니다. 남미의 낯선 도시를 다니고 싶어 스페인어 책을 사다가 독학도 했습니다만 역시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고 싶다고 생각될 때 바로 저지르는 용기가 필요한 거죠.” 그는 영원할 것 같은 젊음과 건강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리니 노는 것도 미룰 게 아니라 순간순간 즐겨야 한다고 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색출하고 그들의 재산을 국가에 환수하는 책임자 노릇을 한 그의 역사관이 궁금해졌다. “우리사회 갈등의 요인 두 가지를 든다면 남북분단의 현실과 친일청산을 하지 못한 점이라고 봅니다. 일제강점기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그 시대의 경제사를 전공한 학자들과 정치사를 전공한 사람들의 관점이 틀립니다. 경제사를 전공한 학자들은 일제강점기가 한국의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면서 오래된 과거를 들추어냄으로써 새로운 분란을 일으키는 친일청산작업이 불필요한 일이라고 하죠. 반면에 일제강점기의 정치사 쪽에 관점을 가진 학자들은 그건 말도 안 된다면서 그 시대를 암흑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위원장을 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저보고 당신이 그 시대에 태어났으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반문을 하기도 했죠. 인생을 포기하고 만주에 가서 독립항쟁을 했겠느냐는 거죠.” 친일반민족행위자 재산조사위원장이면서도 균형 잡힌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법률가 출신답게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의 논리에도 일단 귀를 기울일 줄 알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일에 대해서는 역사를 청산하는 중심에 있는 위원장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을 물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지 않았다. “일본군 장교였더라도 구체적 행위와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오래 전부터 만주군관학교에서 연령 초과로 입학이 불허되자 일제에 충성하겠다는 취지의 혈서를 써 보내 일본군장교가 됐다는 얘기가 떠돌았는데 자료가 없었죠. 위원회는 증거가 없어 박정희 대통령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을 하지 못했죠.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일제시대 우리 민족을 괴롭힌 사람들은 경찰이나 헌병의 앞잡이들인데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증거 부족으로 빠져나가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추적을 했더니 이완용 같은 친일파는 역시 약았더라고요. 가지고 있던 그 많은 땅을 일찌감치 현찰이나 금으로 바꾸어 환수할 수 없게 해놓았어요. 송병준도 배정자도 노덕술도 조사했었습니다. 세월이 너무 오래 돼서 힘들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는 2년 전 민족문제연구소가 일본에서 혈서 관련 기사가 실린 1939년 3월 31일자 만주신문을 찾아 공개하고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했습니다. 그 증거가 발견되자 가족들도 제기했던 소송을 취하해 버렸습니다. ‘혈서 군관지원, 반도의 젊은 훈도로부터’라는 제목의 기사가 소개한 혈서를 보면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써 일사봉공(一死奉公), 조국을 위해 멸사봉공(滅死奉公) 견마(犬馬)의 충성을 다할 결심 등의 내용이 들어있었죠. 일단 친일 문제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갔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는 역사의 중심에 서 있었다. 역사관도 좌파와 우파의 시각이 크게 갈리는 부분이었다. 일각에서는 김창국 변호사를 좌파로 보는 시각도 있다. “우리 사회에서 좌파, 우파로 사람들을 가르는 악습은 정치권이 작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 놨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 업계에서 민변과 보수를 나눈 것도 그런 영향이죠. 그렇지만 저는 제 자신을 누구보다도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다른 검사 출신과 달리 민변 소속으로 변호사 활동을 한, 그 동기가 알고 싶어졌다. “돌아가신 황인철 변호사의 권유로 민변 총무로 활동하게 됐습니다. 어느 날 민변 소속 젊은 회원이 정색을 하면서 ‘어떻게 부장검사까지 한 분이 민변에 들어왔습니까?’라고 이상해 하면서 물은 적이 있어요. 정말 그 당시 검사 출신은 민변에 한명도 없더라고요. 저도 처음에는 민변 소속 변호사들은 생각이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사고방식에 차이가 있는 거죠. 그런데 그 사람들의 얘기를 자세히 듣다 보니까 그게 옳다는 확신으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신도 한걸음 더 나아가 시민운동단체인 참여연대에 관여하게 됐고 지금은 서울시장이 된 박원순 변호사가 설립한 희망제작소의 이사장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사회의 발전 뒤에는 시민운동을 한 분들의 역할이 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뛰는 그분들을 보면서 존경한다고 말 한 적도 있습니다. 다만 시민운동이 지적을 받는 점은 주장만 하고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제가 이사장을 맡고 있는 희망제작소는 대안까지 만들어 내는 곳이죠. 이 나라를 발전시킬 정책들을 개발하는 민간 싱크탱크입니다.”

이야기의 흐름을 본론으로 돌리기로 했다. 수많은 후배 변호사들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들에게 선배 법조인으로서 조언을 부탁했다. “제가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 때 직접 들은 얘긴데, 지방에서 10여 년 판사를 하다가 서울에서 개업하신 분이 사무소를 개설하고도 25일 동안 단 한 건의 사건도 수임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아직 대접받는 판사 출신도 그런데, 연수원이나 로스쿨에서 막 쏟아져 나오는 사람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그러나 결코 좌절할 건 아닙니다. 마음만 고쳐먹으면 이만큼 좋은 직업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도 투자한 데 비해 경제성이 좋고 모두들 일찍 직장에서 쫓겨나는 시대에 정년이 없잖아요? 제 생각에 새로 탄생하는 변호사들은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전문화를 해야 해요. 그러면 살아갈 길이 생길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가 잠시 말을 끊고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다가 계속 말했다. “협회장 재직 때 일본에 가서 변호사 사무실을 구경한 적이 있어요. 변호사가 직접 운전하고 서류도 직접 법원에 가지고 가서 접수하고 합니다. 여직원 한 명만 둔 사무실이 많아요. 의뢰인이 와도 우리같이 사무장에게 미루지 않고 변호사가 직접 상담을 합니다. 합동법률사무소를 보면 상담할 변호사를 당직같이 지정해 두기도 하고요. 경비를 최소한으로 하면서 합리적인 운영을 하는 거죠.” 맞는 것 같다. 그가 계속 설명했다.
“어느 날 잘 아는 일본 변호사 한 분이 하는 말이 ‘일본 변호사가 한국 변호사보다 돈은 못 벌지 몰라도 국민한테 존경은 더 받을 겁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깜짝 놀랐죠. 우리 현실을 보니까 변호사들이 돈의 유혹 때문에 안 될 사건을 무리하게 맡았다가 욕을 먹는 걸 봤습니다. 상당수의 변호사들이 규정을 위반하는 게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서로서로 묵인하고 처벌도 경고수준으로 끝내는 경우가 많았죠.”

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민과의 소통창구를 만들었다. “우수한 능력과 머리를 가진 집단인 변호사들이 시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 주된 이유가 엘리트 의식에 빠져 일반 시민을 배려하지 않는, 요즈음 표현으로 시민과의 소통 부족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미지를 바꿔 시민들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제가 서울회 회장에 취임한 직후 ‘시민과 변호사’라는 월간지를 만들었고 ‘시민의 소리’라는 고정란을 두어 시민들이 보는 변호사, 의뢰인의 불만 등에 관한 글을 받아 실었지요. 그랬더니 일부 회원들은 왜 우리 돈으로 만든 잡지에 욕하는 걸 싣느냐고 항의하더라고요. 미국의 변호사윤리규정을 번역해서 전국의 변호사 사무실에 제공했습니다. 변호사계의 자정의지를 보여주자는 뜻에서 징계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변호사규정을 어긴 사람들을 조사위원회에 넘겨 처벌했죠. 한편으로 지킬 수 없는 규정은 개정해서 없애버렸습니다.”

변호사들의 공익 의무 입법 청원도 그가 한 일 중 하나이다. “주위를 둘러보니까 변호사들 중 상당수가 주말이면 골프를 치고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해외여행을 가더군요. 그 정도면 뭘 더 바랍니까? 오히려 그런 혜택을 준 사회에 기여하고 봉사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입법 청원을 해서 변호사가 일 년에 일정시간은 공익을 위해 일하도록 법조문을 만들었습니다. 변호사라면 헛된 돈에 대한 유혹을 떨쳐내고 사회를 위한 주관이 확실히 서 있어야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 앞으로 변호사단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제시했다. “전국의 변호사단체가 대한변협을 중심으로 단결해야 합니다. 저도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을 했지만 인력과 돈이 지방변호사회 중에 제일 많다고 해서 대한변협과는 다른 독자적인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국적으로 조직을 단단히 하기 위해서는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을 대한변협의 당연직 수석 부협회장을 맡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지탄받는 검찰 쪽으로 방향을 돌리기로 했다. 정치검찰, 부패한 검사가 신문 사회면을 채우고 있었다. 검사생활을 오랫동안 한 그는 과연 검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젊은 시절 검사와 언론이 바로하면 나라가 제대로 된다고 확신했었죠. 이탈리아 밀라노의 평검사 피에트로의 마니풀리테 운동이 한창일 때 이탈리아를 방문해서 그 실상을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비리를 저지른 국회의원, 장관들이 겁에 질리고 자살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런 검사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검찰이 그렇게 되려면 전제가 성립되어 있어야 하더라고요. 이탈리아가 부패를 척결할 수 있었던 것은 인사가 독립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공정한 수사로 사회정화가 가능했던 거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검찰 인사를 사실상 청와대에서 하기 때문에 검사들이 정치권에 선을 대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정치검찰이란 소리를 듣는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치검사뿐 아니라 지방에 있는 평검사조차도 다들 서울로 올라오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장관이나 유력한 정치인에게 선을 대야 합니다. 그러니 수사가 정치권의 눈치를 보는 거죠. KBS 정연주 사장의 공소장을 본 적이 있어요. 공소장 그 자체로 딱 무죄인 게 느껴지더라고요.”

그의 지적은 거침이 없었다. 정치검찰뿐 아니라 검사 자체의 부패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그랜저 검사도 있고 벤츠 여검사도 있다. “이권이 있는 곳에는 부패가 손을 내밀게 되어 있지요. 제도적으로 돈의 흐름을 더 투명하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부정한 돈을 받을 때 꼭 들통이 나도록 해야 하죠. 걸릴 가능성이 있으면 뇌물 먹는 것도 주저하게 됩니다. 그래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 나아졌습니다. 금융실명제가 그렇고 돈이 카드화됐고 현찰 2000만 원 이상 인출이 되면 국세청에 통보되는 것도 부정부패를 막는 시스템입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 사회가 이루어야 할 것은 죄를 지으면 꼭 처벌을 받는다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입니다. 그게 검찰과 법원의 몫이죠. ‘힘 있는 사람이나 재벌은 꼭 빠져나오더라’ 하는 인식은 이 사회를 위해 꼭 불식되어야 하죠. 검찰은 행정권의 일부라서 그들이 빠져나가는 걸 막기에 역부족인 점이 있어요. 그런데 법원에서도 그런 허점이 보이고 있습니다. 담당 판사들이 퇴임 후를 생각해 봐주는 것이라는 얘기도 들립니다. 그걸 막으려면 우리도 일본처럼 판사를 평생하게 해야 합니다. 일본을 보면 봉급체계가 처음은 우리와 비슷한데 상승비율이 높아 세월이 갈수록 보수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판사들처럼 아이들 과외비가 없어 변호사가 된다는 소리가 없는 거죠.” 그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사실 판사들이 아이들 학원비 때문에 옷을 벗는다는 소리도 창피한 얘기입니다. 서민들의 입장에서 보세요. 그들이 보면 판사들의 대우와 봉급이 엄청난데 쪼들린다고 하면 얼마나 박탈감을 느끼겠습니까? 그런 말들을 듣고 변호사는 떼돈이라도 버는 걸로 또 오해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생각은 엘리트주의에 젖은 다른 검사 출신 변호사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았다. “검사를 할 때 사람들이 깍듯이 대접을 하길래 그래도 저를 존경하는 구석이 있다고 착각했었죠. 그런데 막상 변호사가 되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는 걸 확인했어요. 충격이었죠. 사람들이 검사라는 직책을 보고 머리를 숙였던 거죠.” 담백하고 솔직한 대답이다.

“이제 나머지 세월 뭘 하고 싶으십니까?”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변하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그동안 서운하게 했던 사람들에게 전화해서 차라도 한잔 마시려고 합니다. 이미 세상사에 바빠 수십 년 단절됐던 옛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서 만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많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는 흔하지 않다. 김창국 변호사는 변호사 사회뿐 아니라 성공한 국가의 탁월한 리더가 틀림없는 것 같았다.

글_ 대한변호사협의회 엄상익 공보이사

*본 글을 주간 대한변협신문 386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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