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시니어사회공헌센터는 사회 각 분야에서 전문적인 역량을 쌓은 은퇴자들이 인생의 후반부를 비영리기구(NPO) 또는 비정부기구(NGO) 활동에 참여해 사회공헌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행복설계포럼’은 시니어사회공헌센터가 운영하는 ‘행복설계아카데미’ 과정을 수료한 교육생들이  매월 자체적으로 기획해 성공적인 인생 후반전을 위한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자리입니다. 아래의 글은 지난 8월 26일 열린 제16차 행복설계포럼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2010년 8월 26일 오후 4시.

희망제작소 4층 희망모울에서는 해피시니어 1기부터 12기까지의 동문들이 다른 포럼 때보다 유독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인사들을 나눈다. 여름 휴가를 위해 7월 한 달을 못 보아 서로 그리웠던 탓이리라.

오늘 행복설계포럼의 제목이 심상치 않다. “목숨 걸고 한국으로 도망쳤습니다”란 제목에서 죽음을 건 비장함이 엿보인다. ‘누가,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하필 한국으로 도망쳐 왔다는 것인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다문화의 가면  

조심스럽고 겸손한 억양을 가진 난민인권센터(NANCEN)  김성인 사무국장의 설명을 듣고서야, 난민이란 한 국가가 자기 나라 국민을 보호하기는 커녕 심지어 탄압해, 그것을 피해 보호 받을 수 있는 다른 나라로 떠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성인 사무국장은 난민 설명에 앞서 ‘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다고 했다. 캐나다 난민센터에서 인턴 생활을 하면서 난민보호와 인연을 맺은 김성인 사무국장은 미국과 세계 곳곳의 난민이 있는 현장으로 달려가 활동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머니의 병환 소식에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고, 어머니 곁을 떠나지 못했다. 결국, 2009년 국내에서 난민인권센터를 설립한다.

”사용자많은 어려움과 고전분투하고 있는 김성인 사무국장.
난민들의 인간적인 권리 찾기에 대한 고민이 담긴 꿈.
자유를 찾아 한국을 선택해 사람답게 살아 보고 싶은 난민들의 꿈.
그리고 품격 있는 사회를 원하는 우리들의 꿈.
난민의 문제는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문제라고 말한다.

정치적인 또는 종교적, 인종적인 박해를 피해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조국을 떠나온 사람들. 이들을 난민이라고 부른다. 국가가 국민을 박해하는 이유가 분명해야 난민이라는 지위를 인정을 받는다. 우리가 존경하는 아인슈타인, 달라이 라마, 김대중 전 대통령도 국가의 박해를 피해 고국을 떠났던 분 들이다.

우리나라는 이주민에 대해서는 독일과 함께 가장 강력한 배제정책을 쓰고 있는 나라이다. 프랑스는 동화주의 정책을, 미국과 캐나다는 다문화주의 모델 정책을 쓰고 있다. 여기저기 ‘다문화센터’나 ‘다문화’라는 어휘들 때문에 우리나라 이주민 정책도 다문화주의 정책이라고 잠시 착각했으나, 이번 기회를 통해 우리나라가 얼마나 강력한 배제정책을 쓰고 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난민들은 왜 하필 우리나라를 선택했을까?

아시아권 난민들에게 있어 대한민국은

첫째, 80-90년대 학생과 국민의 힘으로 민주화를 이룬 나라
둘째,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벨 평화상을 받을 만큼 평화로운 나라
셋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만큼 국제 사회에 우호적인 나라

로 인식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가는 경제대국이라는 인식 역시 그들의 선택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국, 민주주의 표상이라 여겼는데…”

우리나라는 1992년에 국제 난민협약에 가입했다. 난민 협약 후 2,564명의 난민 신청자가 있었으나 158명 만이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6%가 조금 넘는 수준이다. 인색한 법무부의 심사 기준과 이주민에 대한 배제 정책 때문이다.
 
자신들의 나라에선 학생, 교사, 변호사, 엔지니어 등 다양한 직종에 일했던 난민들은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생산 노동자로 전락한다. 인종적, 언어적 장벽이 너무 높기 때문이다. 난민으로 인정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불법 이주민으로 잡혀 투옥되기도 하고, 강제추방 되어 보복을 당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난민으로 인정받아도 국내법상 다문화가정으로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다문화가정을 위한 혜택에서도 배제된 난민들의 심각한 현실 문제를 들을 수 있었다.

이날 포럼에는 버마 난민 마웅저씨가 김성인 사무국장과 함께 참석해 직접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마웅저씨는 강단에 오르자마자 “내 나라를 ‘미얀마’로 부르지 말고 ‘버마’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군사 쿠데타에 성공한 집권군부가 분위기 쇄신을 위해 국가 이름을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1988년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마웅저씨는 돈을 많이 벌어서 어머니와 행복하게 살고 싶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군사 쿠데타 성공으로 정권을 잡은 정부의 독재를 지켜보고 있을 수 없어 ‘국민이 원하는 평화로운 나라를 위해 딱 2년만 항쟁 하자’고 결심한 고등학생 마웅저.

”사용자1990년 국민 82%의 지지를 받은 아웅산수지 여사의 당선이 무효가 된 나라, 20년 동안 헌법이 지켜지지 않아 헌법이 사실상 없는 나라, 반정부시위대 대다수가 대학생이라는 이유로 전국의 대학교를 5년이나 폐쇄조치한 나라. 그런 고국 때문에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아보겠다는 고등학생의 꿈은 빼앗겨 버렸고, 항쟁의 세월은 2년이 아닌 20년이 되어버렸다.

“고국에서는 더 이상 생명의 위협 때문에 살 수가 없어 난민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왜 우리나라를 선택 했느냐는 질문에 “민주주의의 표상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럴 줄 모르고 왔다”며 솔직하지만 어렵게 말하는 그에게 참 미안했다. 그는 8년의 기다림 끝에 이제 난민으로 인정받아 비교적 자유로운 몸이 되었지만,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제외하곤 현실의 여건은 달라진 것이 없어보였다. 하지만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했던 분들을 만났던 것을 감사하게 생각한다는 마웅저씨.

그는 마지막으로 난민으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마웅저를 잊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친정 부모의 마음으로 들어달라”

난민센터에서는 난민들에게 당장 필요한 법률적 지원과 제도 개선에 앞장서고 있다. 취약한 난민들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의료, 교육, 긴급구호 사업을 하고 있으며, 시민들이 난민 문제에 관심을 갖도록 교육 및 캠페인 활동을 하고 있다.

난민인권센터는 현재 위치인 용산구 갈월동에서 이주민 관련 시설이 전혀 없는 이태원으로 이사 예정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는 난민들이 쉽게 찾아 올 수 있는 곳에 위치했다면, 이제는 이주민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직접 들어가 활동하겠다는 굳건한 결의를 엿볼 수 있었다.

”사용자아직도 250명의 난민 대기자가 있으며, 의료보호나 기초생활보장조차 지원 되지 않는 상태로 8~9년을 기다려야 하는 심각한 현실 속에서 김성인 사무국장은 포럼 참석자들에게 친정아버지 같은, 친정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난민들의 고민을 들어보아 달라는, 작지만 큰 의미가 담긴 부탁을 했다.

김 사무국장에 따르면 난민 인권 운동은 이들에게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찾아주며,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창조적인 인간성 회복 운동이다. 바로 우리 곁에서 고통받고 있지만, 한국인들의 무관심과 냉대에 더 큰 상처를 입었을 그들. 이번 포럼은 난민에 대한 인류애를 싹 틔울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글_강정미 해피리포터
사진_ 김돈회 연구원 시니어사회공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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