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학력 시대, 무능력한 우리의 자화상

두 명의 필자가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흥미로운 일들을 소개합니다. 일상에 지친 우리에게 새로운 자극제가 되길 바랍니다.


혁신·교육思考
(19) 고학력 시대, 무능력한 우리의 자화상

고학력, 고스펙의 시대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라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왜 이렇게 무능력하고 무기력한 걸까? <나부터 교육혁명>의 저자 강수돌 교수는 ‘숙련된 무능력(skilled incompetence)’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 현상을 설명한다. 즉, 가방끈이 길수록 주체적인 삶의 능력이 도리어 도태된다는 것이다.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다양한 ‘삶의 기술’들을 체득하지 못한 채 헛똑똑이 같은 삶을 영위하는 전문 기능인을 부르는 이름이란다.

오랜 시간 학교에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삶을 통찰할 능력도, 능동적으로 삶을 구성할 자신도 없는 사람들. 이들에 대한 다양한 진단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요즘 학생들은 어떤 대상의 맥락을 짚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다. 대개 즉흥적이고 파편적인 단어와 구절을 나열하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 (중략) 시각의 폭주에 휘둘리다 보면 아주 짧은 단위로 명멸하는 스펙터클에만 길들여져 버린다. 장면들을 연결하는 내러티브의 능력은 점차 저하된다. (중략) 지식 검색과 프리젠테이션이 횡행하는 시대에는 정보와 정보 사이를 연결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부족해진다. (중략) 전체적 맥락을 짚기보다는 일면에 대한 과도한 집착, 감정의 적나라한 노출이 일반적인 패턴이다.


–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이 땅의 청소년들이야말로 가장 억압적이면서 소외된 계급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입시를 위한 전쟁터에 내몰리고 거짓된 표상의 덫에 걸려 청춘을 다 바쳐야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파울로 프레이리는 <페다고지>에서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이 처한 세계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비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힘을 계발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무엇을 교육하고 있는가. 남이 얼마나 앞서 갈까 불안해하며 스스로를 옥죄고, 결국 구성원 모두가 안달함을 미필적 고의로 전이하는 사회, 그래서 모두가 스스로 ‘사육’되길 바라는 나라에 우리가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 이계삼 외, <교육: 미래를 위한 확실한 대안>

그저 학교에 십수년간 붙잡아 놓고 공부로써 경쟁시켜 놓으면 십수년 뒤에는 그들의 기대대로 ‘낮은 사고력과 쓸데없는 애국심’으로 치장한, 절대로 지배자에 맞서 단결하지 않는 이기적인 존재가 만들어져 나오는 것이다.

– 조너선 코졸, <교사로 산다는 것>

우리 시대의 대학은 놀라울 정도로 균질적이다. 모든 학문이 동일한 욕망과 비슷한 능력의 주체들을 생산해 낸다.

–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

내부에서 나오는 생명에의 호소가 아니라 사회적, 관습적 척도를 자신의 욕구로 내면화해서 그대로 투사하는 인정욕구의 길을 간다.

– 고미숙,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한편, 다행히 목표가 있어 이를 위해 열심히 달리는 사람들도 잦은 스트레스와 왠지 모를 공허감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욕망의 주체가 자신이 아니기에 목표에 도달한다 해도 절대 만족감을 느낄 수가 없다. 끝없는 갈증 아니면 참을 수 없는 공허감만 기다리고 있을 뿐. (중략) 따지고 보면 우리는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소모하는가? 단지 남과 같이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얼마나 불필요한 짐들을 안고 살아가는지. 그리고 그것을 위해 청춘을, 아니 인생 전부를 온전히 탕진하고 있지 않은가? (중략) 삶의 행복이 경제적 안정만으로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경제적 자립은 삶에 대한 가치를 고양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 고미숙,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직장에 취직해 경제적으로 안락함 삶을 누리기 위해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많은 시간을 공부에 투자하는 한국 학생들. 하지만 시험 준비를 위한 획일적, 경쟁적 교육의 결과는 내 욕망이 무엇인지 제대로 성찰해 보지도 못한 채 자본의 욕구를 나의 욕구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할까? “단지 지적 능력의 보완이나 정보 습득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시대를 지배하고 있는 시각의 군림, 감각의 폭주를 거스를 수 있는 공부, 내 몸과 운명을 바꿔줄 수 있는 공부”를 해야 한다. “나보다 훨씬 폭넓게 강렬하게 살았던 분들을 만날 수 있는 공부, 생명의 역동성이 살아 숨쉴 수 있는 공부, 생사를 가로지르는 원대한 비전을 탐색할 수 있는 공부, 새로운 시대를 예감할 수 있는 공부, 한 시대의 통념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할 수 있는 공부, 마주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공부.”

–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공부

이러한 공부는 나 혼자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배움을 통한 성장이란 타자를 대면해야만 가능하다. 나와는 다른 사람과 마주쳐야만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타자와 만나야만 공존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은 사회적 관계를 통해 나의 존재를 자각하는 주체적 행위이다. 공동체 공간에서 이뤄지는 타자와의 만남은 수많은 ‘너’의 존재를 통해 ‘나’라는 개별적 존재가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사유하고 실천해야 할지에 대해 인식하는 도구로 작동한다.


– 이계삼 외, <교육:미래를 위한 확실한 대안>

타자(他者) 및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내 의도를 좌절시킬 수 있는 존재, 혹은 나와는 다르게 생각하거나 행동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타자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표현을 빌려 정의하자면 타자는 “나와는 이질적인 삶의 규칙을 따를 수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타자의 정의에 고개가 아직도 갸웃거려진다면 일본의 사상가이자 문예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타자에게 말해진 언어가 사회적이고 대화의 형태를 띠며 다성적 특성을 가지려면 그 타자가 어떤 공통된 일련의 규칙들을 공유하는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한 ‘공동체’에서의 대화는 단지 독백일 뿐이다.”


– 강신주 / 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 읽기: 6.공공성과 타자의 존재 / 동아일보 / 2010.12.22

타자와의 관계는 공동체와의 전원적이고 조화로운 관계가 아니며, 우리가 타자의 입장에서 봄으로써 우리 자신이 그와 유사하다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공감도 전혀 아니다. 타자와의 관계는 우리에 대해 외재적인 것이다.

–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하지만, 타자와의 관계 또는 소통에 있어 우리는 ‘대화’가 아닌 ‘독백’을 하는 경우가 많다.

레비나스는 나와 타자를 ‘동일자(the same)’와 ‘타자(the other)’로 나누어 설명한다. ‘동일자’는 자기는 물론 자기 근처의 남들도 자기와 같아야 한다는 ‘동일성’을 지향한다. 이 ‘동일성’은 사실 여러 다채로운 군상들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에서 가장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다. 똑같은 것을 대한다는 것은 예전의 방식을 현재의 사고와 행위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규범까지 ‘동일화’ 시켜 그 안에서 살아간다. 자연과학적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간과 사회에 적용시킨다. 질서정연한 사회다. 세상의 법칙을 안다는 것은 세상을 구성하는 ‘동일성의 배열’을 잘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으로 대상을 분절시키고 배열해서 규정하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통하는가?


근대인들은 대체로 ‘동일성을 강요’하는 것 속에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속에서 그 규칙을 따르면 자유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틀에 맞지 않으면 제외시키고 소멸시킨다. 유럽이 문명과 비문명을 나누어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대하던 식민지정책의 태도가 바로 동일자가 지향하는 동일화의 길이다. 서구의 근대적 사고에서 ‘인격적 개인’이라는 것은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서 ‘이성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개인이다. 이들이 합의를 도출하여 균형을 맞추면 서로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서양의 정치철학이다. 그러나 이 틀에 맞지 않는 존재는 다 내쳐진다. 이런 문제의 대상은 광기, 정신병자, 소수자 등이며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언급은 서구 문명에 대한 자기비판이었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찾다 보니 주요하게 부각되는 개념이 ‘타자’이다. ‘타자’는 ‘동일자’의 틀에 잘 안 들어오는,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대상이다. 이 ‘타자’는 서구의 근대적 입장에서 자유를 확보하는데 지장이 있는 타자로써 매우 불편한 존재이다. ‘타자’의 영역은 내가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면 보인다. 그래서 ‘동일화’의 세계는 ‘유한의 세계’이다. 테두리를 벗어나면 ‘타자’의 영역이고 ‘무한으로서의 타자’의 세계이다. 무한은 끝이 없다. ‘타자’의 특성은 ‘무한’이다.

– 진보성 / 타자의 얼굴과 환대의 윤리 / 2013.06.18

대화란, 혹은 논쟁이란 무엇일까? 난 어느 시점에서 내가 해오던 논쟁이 나를 정말로 피폐하게 고갈시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무엇보다 그건 내가 계속해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고, 그래서 하나도 성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 논쟁을 하면 할수록 반짝거리는 “승리감”과, 내가 “진리” 속에 있다는, 또 그 진리를 공유하는 “공동체” 속에 있다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이내 그 안도감은 권태와 피로로 바뀌어갔던 것이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새로운 “논쟁의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변화되기 위해” 논쟁을 한다는 것. 즉, 그곳에선 상대방을 논파하고 내가 가진 교조(혹은 진리, 혹은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논쟁을 통해 즉 상대방 주장과의 “마주침”을 통해 이전의 나와는 다른 나를 생산해내는 것이야말로 “논쟁의 이유”였던 것이다. (중략) 이전과 끊임없이 다른 나를 창조해가며 살아가는 것! 그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중략) 자신의 동일성을 지키려고만 하는 사람이나 공동체는 결코 성장할 수 없다.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노화한다는 것이고, 결국은 죽음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자신의 공동체 바깥에 있는 사람과의 대화, 혹은 논쟁은 바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논쟁을 하는 이유는 상대방을 이겨서 나를 지키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방도 변화하고, 나도 변화하기 위해서이다.

– 진보넷 / 유일환 / 구 좌파와의 논쟁, 그리고 기독교… / 2008.08.07

타자와의 마주침 없이는 자신의 한계를 만나 본인을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없고 또한 그 한계를 넘어서 본인의 사유의 지평을 확장할 수도 없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저자 사사키 아타루는 타자와의 만남을 “읽을 수 없는 것을 읽는다”라고 표현했으며, “어차피 읽히는, 읽히는 것밖에 읽지 않는, 읽지 않아도 이미 안다며 얕보고 읽지 않는 안일함이 죽음을, 한없는 죽음을 낳는다.”라고도 했다.

이러한, 동일자와의 관계 맺기가 아닌, 타자와의 관계 맺기는 “수동적 위치에 있던 이들이 ‘기쁜 능동 촉발’을 가능케 하는 신체로 변이하는 것이다.

-고미숙,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평소 내가 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과만 어울리는 것은 함께 삶이 아니다. 우리는 익숙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편안함이나 만족을 느끼지만, 그러한 방식의 관계 맺기는 우리가 안락함을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관계에서는 타자로부터 자기의 한계를 볼 수 없다. 따라서 타자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친근하고 익숙한 관계가 아닌 고독자(the singular)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고독solitude은 고립isolation과 다르다. 고립은 아픔을 당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기 둘레에 벽을 쌓고 괴로움에서 이탈을 도모하는 것이다. 반면, 고독은 어떤 자극, 지식, 체험에도 의존하지 않는 것이며, 모든 의존, 예속, 순응을 내던지는 것이다. 고독은 모든 것을 회의하고 질문하는 것이며, 강렬하고 능동적인 활기로 가득 차 있는 상태다.

– 유일환 / 공동체에 관한 세 가지 물음

이렇듯 “타자를 통해 세계와 우주라는 매트릭스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곧 배움이다. 따라서 우정과 배움은 분리될 수 없다.”

–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배움 말고 대체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타자와의 접속을 통해 배움의 관계를 조직하여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즐기며 삶의 경이와 비전을 발견해 가는 삶을 사는 것.

인생의 모든 순간들을 학습하고, 지식 기술 경험을 서로 나누어 가지고, 서로 도와주는 순간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일 수 있는 교육망(educational webs) 형성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과제이다.


–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진정한 공부는 그 자체로 이미 축복이다. 천하를 품을 수 있는 데 대체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글_ 정선영 (전 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

■ 참고자료

고미숙,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북드라망
이계삼 외, 『교육: 미래를 위한 확실한 대안』,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조너선 코졸, 『교사로 산다는 것』, 양철북
고미숙,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휴머니스트
강신주, 「강신주의 철학으로 세상 읽기: 6.공공성과 타자의 존재」, 동아일보 기사
에마뉘엘 레비나스, 『시간과 타자』, 문예출판사
진보성, 「타자의 얼굴과 환대의 윤리」, 프레시안 기사
유일환, 「구 좌파와의 논쟁, 그리고 기독교…」
유일환, 「공동체에 관한 세 가지 물음」
일리히, 『학교 없는 사회』, 생각의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