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경제, 규모를 이루다

어릴 적 동네 동무들과 골목에서 하던 놀이들 중에는 편을 갈라서 경쟁하는 형식의 것들이 꽤 많았습니다. 축구나 야구 같은 운동경기가 그랬고, ‘오징어’나 ‘고구려백제신라’처럼 땅바닥에 금을 긋고 뜀뛰기하는 놀이들이 그랬습니다. 그런 놀이를 위해 편을 나누다 보면 ‘개발’이나 나이 어린 동생들이 한편에 몰려버리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걸 우리는 ‘쓰린 편’이라고 불렀습니다. ‘쓰린 편’이 생기면 다른 편에서 사람을 더 붙여주는 방식으로 균형을 잡아주었지요. 왜 아이들은 약자에 대해 ‘쓰리다’(쑤시는 것처럼 아프다)라고 표현했을까요.

흔히 사회적 경제를 두고 ‘공감의 경제’라고 설명합니다. 이윤의 무한추구가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고, 사회적 약자들을 보듬어 안는 경제를 꿈꾸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한때 공감의 경제를 일구기에 척박하기만 했던 우리 사회의 토양이 변화하고 있다는 게 실감납니다. 아이쿱생협의 ‘친환경 유기식품 클러스터(산업단지)’인 구례자연드림파크가 개장 1년째를 맞은 것도 ‘공감의 경제 발전사(史)’에서 기념할 만한 장면일 것입니다.

지난 4월 17일, 18일 이틀에 걸쳐 남도에 다녀왔습니다. 아이쿱생협의 구례 자연드림파크를 견학하는 길이었습니다. 약 14만9336㎡의 대지 위에 조성된 자연드림파크에는 조합원들을 위한 식품을 생산하는 각종 제조 공방들(막거리공방, 오리공방, 김치공방, 우리밀 공방 등)과 지원센터(레스토랑, 영화관, 카페, 게스트하우스 등)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구례자연드림파크의 지난해 전체 생산액(매출액)은 366억 원, 고용인원은 360명에 이릅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운영 중인 견학·체험 프로그램에는 매달 조합원과 도시 소비자, 학생들 3000~4000명이 참여한다고 합니다.


구례 자연드림파크 공방들의 건물구조는 특이합니다. 라면공방 등은 생산라인을 길게 일자로 배치해, 유리벽을 통해 방문객들이 공정 전체를 지켜볼 수 있게 했더군요. 부모와 아이들이 ‘소시지 만들기’ 등을 함께 할 수 있는 체험공방도 널찍하고 깔끔했습니다. 농업(1차)과 제조업(2차) 그리고 관광 등 서비스산업(3차)을 결합한 6차산업(1과 2와 3을 모두 더해도 6이고, 곱해도 6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의 현장 중에서 국가대표급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았습니다. 미미한 규모의 사회적 경제가 과연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가진 한국사회에서 대안이 될 수 있겠냐고 냉소하는 사람들에게 한번 둘러보게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사회적 경제도 이제 이만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자랑을 내세울 법도 합니다만, 개장 1주년을 기념하는 학술행사에서 자주 언급된 단어는 이타심과 공감이었습니다. 구례에서의 첫날, 아이쿱협동조합연구소와 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가 공동주최한 ‘칼 폴라니와 21세기 경제’ 포럼이 열렸습니다. 포럼의 한 꼭지인 대담에 참여한 홍기빈 박사는 수년 전 과학잡지에 실렸던 동물실험 이야기를 들려주더군요.

시카고대학의 연구진은 한 우리 속에 쥐 2마리를 넣고 2주 동안 함께 지내게 했습니다. 그 뒤 새 우리로 옮겨, 한 마리는 답답한 철창 속에 가두고 나머지 한 마리는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했지요. 이때 밖에서만 열 수 있는 철창 속에 갇힌 쥐는 당연히 괴로워하는 반응을 보였고요. 그 뒤 연구진은 쥐가 좋아하는 초콜릿 무더기를 우리 속에 넣어주고는 자유롭게 다니는 쥐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살폈습니다. 놀랍게도 쥐는 초콜릿을 독식하지 않고 고통스러워하는 다른 쥐를 먼저 풀어주는 이타적 행동을 보였습니다. 이타심은 진화의 산물이고, 생명은 무릇 타자(他者)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지요. 이런 실험은 경제활동 역시 타인의 눈물을 닦아주려 하는 인간(생명)의 본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게 홍기빈 박사의 설명이었습니다.

정부가 정한 2015년 최저임금 시급 5580원과 무관하게, 구례 자연드림파크에서는 올해 최저 임금 시급을 7000원으로 정했습니다. 직원들 가운데 30여명은 다문화가정 출신인데, 이들에게도 국적에 대한 차별이 없게끔 동일한 근로조건을 적용한다고 합니다. 산부인과가 없는 지역사정을 타개하기 위해 의료진 인건비, 장비구입비 등을 지원한 결과 구례보건의료원 내에 산부인과가 개설되었고, 문화생활이 힘든 농촌지역 주민들을 위한 자연드림파크 내에 영화관도 마련했습니다. 구례에서의 둘째 날, 전국의 조합원 가족들이 방문한 개장 1주년 행사장 한곳에 인근주민들이 자신들이 채취한 산나물 등을 파는 부스를 마련해준 것도 공감의 흔적이라 할 만합니다. 물론 앞으로도 남은 과제들이 많습니다. 외부에서는 아이쿱생협에 대해 생산자들, 그리고 다른 사회적 경제 조직들과의 공감을 더욱 높여야 한다는 주문을 하는데, 이는 생협 운동의 밑바탕에 자리한 근본정신을 계속 이어가고 강화해달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지난 한해, 어쩌면 한국사회는 공감능력을 상실해버린 게 아닐까. 절망한 적이 많았습니다. 수학여행 보낸 아이들을 영영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그래서 곡기를 끊은 채 차가운 도로 위에서 밤낮을 보내는 부모들의 앞에서 피자 따위를 우적거리는 ‘폭식투쟁’을 벌인 사람들이 있었고, 지나친 애도 분위기 때문에 경제가 살아나지 않는다고 유족들을 비난한 정치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례 화엄사 경내에는 다시 피어나고 만 봄꽃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고, 자연드림파크 곳곳에서는 엄마, 아빠와 협동조합 나들이를 온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뛰어놀았습니다. 남도에 새로 뿌리내린 사회적 경제의 현장은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의 봄소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글_ 임주환 연구조정실 연구위원 / eyelid@makehop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