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재는 결핍의 기록이다

서울살이 근 10년간 제가 알게 된 생활의 지혜 하나는 자취생은 짐이 적을수록 좋다는 것입니다. 잦은 이사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짐이 필수이니까요. 글을 시작하는 지금, 책을 소개하는 인턴치고는 소장하고 있는 책이 많지 않아서 조금 창피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또 취업을 위해 읽었던 자기계발서와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보았던 문제집까지 제외하니 얼마 없는 책장이 더 휑한 느낌이 듭니다. 과유불급이라는 사자성어가 주는 응원의 메시지를 마음속에 담고 소박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한 저의 서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앞서 밝힌 것과 같은 이유로 책을 사서 책장에 꽂기보다는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것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빌려서 보다가도 이 책은 꼭 사서 오래 두고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 책의 어느 구절이 마음속에 깊게 내려앉았을 때, 책을 덮고서도 잔상이 짙게 남을 때가 바로 그런 때인 것 같습니다.

서재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방 한구석에 있는 책장을 찬찬히 살펴보노라니 그간의 결핍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무엇인가 채워지지 않는 감성적, 이성적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저는 책을 읽고 때로는 샀습니다. 생각의 깊이가 얕음이 스스로 느껴져 부끄러울 때 주로 철학이나 인문학 관련 책을 사서 읽었고,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답답한 상황일 때는 스토리라인이나 상황묘사가 화려한 소설책을 읽으며 머리에 휴식을 주었습니다. 세상살이가 팍팍한 것인지 감성이 메마른 것인지 혼동되며 슬퍼질 때는 시집이나 여행 수기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가끔 모든 것들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 때는 어린 시절 읽었던 고전명작 소설들을 다시 읽어보곤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하다보니 책장에 켜켜이 남아 있는 손때만큼이나 제 마음 속 결핍의 더께들이 책에 묻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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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일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행위만으로도 마음에 평온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혼란함을 가중시키기도 합니다. 매일매일 베스트셀러가 생겨나고 있으며, 그 보다 많은 신작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 고민하고 또 많은 작가들은 어떤 책을 써야 하는가 고민하지요. 저명한 평론가가 추천해 주는 도서 목록이나 책을 많이 읽는 또래 친구가 추천해 주는 책까지. 우리는 수많은 지식의 세상에서 길을 잃은 여행자처럼 어디로 가야하는지 혼란스럽고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저도 수많은 길 잃은 여행자 중 한 명으로서 어디로 가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매일 고민하고 있습니다. 누군가에 길을 묻는다는 것은 때로는 빠른 답을 주지만 때로는 내가 생각한 것과 다른 목적지에 다다르게 합니다. 그러므로 힘들지만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본인이 진짜 원하는 곳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고 여행을 준비하는 태도가 정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행계획을 세우듯, 먼저 많은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생각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책을 읽어야 어떤 책이 나에게 좋은 책인지 지금의 나의 문제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인지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책은 그에게는 좋은 책일 수 있지만 정작 나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므로 자신의 성향을 잘 파악하고 비슷한 성향을 가진 믿을만한 사람의 추천도서를 읽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따뜻한 감성으로 차가운 도시를 물들이고 싶은 저의 성향과 비슷한 분들에게 오늘 제가 추천해 드리는 책들이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따도작이 추천하는 몇 권의 책들

앞서 소개되었던 이동호 인턴의 내가 ‘와우’라 불리는 이유에 나와 있듯 저희 32기 인턴은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면서 친근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제가 인턴 친구들에게 불리는 별명은 따도작, 따뜻한 도시 감성을 가진 작가의 준말입니다. 차갑고 냉정하고 때로는 섬뜩하기까지 한 도시살이 속에서 그래도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어 스스로 지은 별명입니다. 그래서 저 스스로도 따뜻한 감성을 잃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도 노력하고 있는데요, 이런 저를 도와주는 몇 권의 책을 소개할까 합니다. 지금 소개하는 책들은 적어도 몇 해 동안 두고두고 읽으면서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 책을 나름 엄선하여 고른 것입니다.

■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개인적으로 ‘청춘’ 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선호하지 않는 편인데 유일하게 이 책은 제목에 청춘이 들어갔음에도 침대 곁에 두고 여러 번 읽을 만큼 아끼고 좋아하는 책입니다. 작가 김연수가 자신의 젊은 날을 사로잡았던 책, 한 구절을 소개하는 책인데 어찌 보면 단순한 구성의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혼란스러웠던 그의 젊은 날에 대한 담담한 이야기에 무엇인가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되고 아파야 하며 때로는 잘 쉬어야 하고 혹은 달려야 하는 온갖 청춘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다 내려놓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너무 이성적이라 차갑기까지 한 작가의 말이 오히려 그 누구의 위로보다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이 책을 읽게 된 후 김연수 작가가 출판한 모든 책을 읽었는데 지금까지도 이 ‘청춘의 문장들’ 이라는 책을 가장 사랑하고 있습니다.

■ 리버보이 (팀 보울러)

해리포터를 제치고 영국에서 카네기메달을 받은 청소년 문학이라는 문구가 처음 눈길을 끌었던 리버보이. 지금도 이 책은 서점의 청소년 문학, 성장문학 코너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저는 오히려 청소년들보다 성인들이 더 많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 책은 죽음을 앞둔 할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사랑하는 15살 손녀가 아주 특별한 이별여행에서 만나게 되는 신비로운 소년과의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소재에 있어서 감성에 호소하지 않고 오히려 담백하게 말하면서도 책의 전반에는 삶의 희망에 대한 강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정말 따뜻한 책을 읽었을 때의 감동과 여운이 오랫동안 남아 책을 읽었던 한 주가 행복했던 기억 때문에 꼭 추천하고 싶습니다.

■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J.M. 바스콘셀로스)

언젠가 좋아하는 작가가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을 책장에만 꽂아두지 말고 시간을 내서 다시 읽어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그러면 어린 시절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죠. 그 이야기를 듣고 다시 읽었던 책이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 뽀르뚜가 아저씨의 죽음에 눈물을 쏟았다면, 15년 후 성인이 된 나는 제제 때문에 마음이 아려와 눈물이 났습니다. 작은 악마라고 불리며 가족의 질타를 받는 사고뭉치 아이가 아니라, 사랑받고 싶어서 몸부림치는 작은 소년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몇 번이나 읽어도 먹먹함 이상의 감동을 주는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몇 년 후 지금보다 더 성숙해진 뒤에 읽을 때는 또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지 기대가 됩니다.

■ 님의 침묵 (한용운)

고등학교 때 입시를 준비하기 위해 참 많은 시와 소설에 밑줄을 그으며 공부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저항시인으로 항상 언급되던 한용운. 기계처럼 그의 시에서 님은 잃어버린 조국이며 꿈꾸는 독립이라고 외우고 문제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흘러, 첫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우연히 들린 중고서점에서 평상시에는 자주 가지 않았던 ‘시집’코너에 있는 이 시집을 발견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하루 종일 시집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스스로 만들어 놓은 결말이 없는 방황 속에 있던 그 시절의 나에게 이 시는 ‘괜찮다’ 는 위로의 목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너 혼자 상실감에 쓰러져 있는 것은 아니라고, 나 역시 님을 잃은 슬픔에 이처럼 허덕이고 있다고. 하지만 그 상실감으로 비롯되는 허무함은 언젠가 끝날 것이라고, 희망이 있다고.’ 그렇게 단호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주는 것만 같았던 그의 많은 시 중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으로 시작하는 ‘나룻배와 행인’을 가장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을 기다리며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라는 구절이 소리 내 읽을수록 어감이 참 좋아서 자주 암송하게 됩니다.

■ 길을 묻는 철학자 (엄정식)

세상은 급변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기도 버거울 만큼 혼란스럽고 다양성의 가치를 운운하며 서로 각기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어느 때보다도 깊고 넓게, 그리고 멀리 사유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깊게 생각한다는 것은 어떠한 현상 뒤에 무엇이 있는지 그 실체를 파악한다는 것이고, 넓게 생각한다는 것은 어떤 현상이 다른 무수한 사건들과 유기적으로 관련 맺고 있음은 인식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멀리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나타난 현상이 미래에 필연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것인지 미리 가늠한다는 것이죠. 이 책은 깊고 넓게 그리고 멀리 생각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좋은 철학 기본서입니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으면서 핵심을 찾도록 도와주는 철학책으로 오래 두고 읽으면 머리가 상기되는 기분을 받을 수 있어 아끼고 자주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엄정식 교수의 말처럼 철학은 세계를 쉽게 바꾸지는 못하지만 세계를 인식하는 자기 자신을 개조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세계를 개선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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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도 질풍노도의 시절 무질서 속에서 혼란스럽던 나를 몇 번이나 일으켜 세운 ‘호밀밭의 파수꾼’(제롬 데이비드 샐린저), 글 쓰는 방법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지루하지 않게 안내해 준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설흔, 박현찬), 고전문학 읽기의 즐거움을 알게 해 준 ‘책 읽는 소리’(정민) 철학이 주는 사고의 즐거움을 일깨워 주는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왜 나는 너를 사랑 하는가’(알랭 드 보통) 읽는 내내 가슴이 아파 외면하고 싶기까지 했었지만 결코 눈을 돌릴 수 없는 진실 앞에 무너져 버렸던 ‘자기 앞의 생’(로맹가리), 러시아 문학이라고는 톨스토이밖에 몰랐던 어린 시절의 나에게 또 다른 세계를 열어준 ‘독백’(막심 고리끼)까지 추천하고 싶은 책이 많이 있습니다. 언젠가 다시 기회가 된다면 다른 책들도 꼭 소개하고 싶습니다. 조금 부끄러운 저의 결핍의 기록을 엿본 오늘 이 시간이 여러분께 소모적인 시간이 아닌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글_ 이슬비 (32기 사회혁신센터 인턴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