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희망제작소 공공문화센터는 4월 14일 영국 도시재생의 경험을 나누는 세미나를 개최했습니다. 신혜란 런던대 도시계획과 조교수는 영국 도시재생의 경험을 파트너십 중심으로 설명하며 도시재생이 종합적인 성격을 갖는데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파트너십의 진화라고 지적했습니다. 한국사회의 도시정책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강연내용을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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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개발, 뉴타운, 장소마케팅, 문화도시, 창조도시, 디자인 수도. 도시를 살기 좋게 만들기 위한 노력들을 일컫는 말들이다. 하지만 사람이 살만한 도시를 위해 사람이 죽어 나간다. 지독한 역설이다. 과연 도시의 진화는 누구의 손에 달려 있는가?

신혜란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해 희망모울을 가득 메운 청중들은 바로 이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김상길 소장(희망제작소 부설 도시공간연구소)의 인삿말로 시작한 세미나에서 신교수는 “영국의 도시재생은 실패하는 지역경제를 살리고 물리적 환경을 발전시키고 빈곤을 타파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행되어 거의 ‘도시정책’과 동의어로 볼 수 있으며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 변화의 결과들과 도시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한 지속 가능한 해법의 필요성과 도시문제의 해결로 이끄는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비전과 행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특히 “도시재생이 종합적인 성격을 갖는데 가장 핵심적 역할을 한 것이 바로 파트너십의 진화”라고 했다.

런던대에서 도시정치를 연구하는 신교수의 강의는 내내 약간은 시니컬하고 신랄했다. 이는 영국 도시재생의 특징이 기존 산업의 몰락으로 인해 지역 도시의 쇠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도시 자체의 문제로 인한 재생이 아니라 자본의 세계적인 이동이라는 논리가 작용한 결과”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한국의 경우엔 이러한 도시의 극단적인 쇠퇴를 경험한 적이 없음에도 도시재생이 일종의 유행처럼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도시재생의 모델로 한국에서 많이 거론되는 도크랜드의 경우 실제로 사업 이후에 혹독한 비판에 시달려야했다고 한다. 많은 건물들의 사무실이 공실로 남아있었고 원래 거주하던 주민들은 자신들의 지역에서 쫓겨났어야 했던 부작용 때문이다.

하지만 런던의 금융의 중심이 도크랜드로 이동하면서 공간이나 디자인 등의 도시와 연관된 논리 이외의 외부적인 작용으로 도크랜드가 각광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교수는 오히려 그리니치의 도시재생의 모델이 더 바람직한 평가를 받을 만하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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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의 비전의 변화

신교수는 도시재생에 대한 접근의 방식의 변화를 1980년대와 2000년대를 대비시켜 설명한다. ① 기업유치와 투자유치를 위한 캠페인, ② 노동력, 부동산, 위치를 제공하여 새로운 기업의 유치하기 ③ 발전장벽을 제거하여 민간참여를 증가시키고 ④ 신 주력상품 (flagship) 프로젝트를 통해 지역의 특성을 바꾸는 목적으로 지역의 자연적인 특성에 기반하여 건설하는 것이 80년대의 비전이었다면(Tyne and Wear Development Corporation Vision for the Future, 1988)

2000년대에는 ① 그 누구도 자신이 사는 장소 때문에 심각한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10-20년 사이에 변화시키기, ② 낙후된 동네의 일반적으로 쇠퇴하는 것을 막고 재발을 막는 것, ③ 저임금 인구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못한 서비스를 받고 낙후된 조건에 시달리는 것을 더 이상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고, ④ 이 나라의 모든 사람들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사람들이 가족들을 위한 미래를 이 곳에서 볼 수 있어야 하며, ⑤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로 두고 있는 동네는 없도록 하는 것 등을 원칙으로 한다는 점이다. (SEU, A New Commitment to Neighbourhood Renewal: National Strategy Action Plan, 2001) 이러한 비전의 근본적인 변화는 실패의 경험에서 왔다고 한다. 도시재생의 실패에 대한 반성적 논의가 이러한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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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중심이 되어 이끄는가가 장기적으로 큰 차이를 낳는다

“협력적 갈등관계” 도시재생을 위한 파트너십에 대해 신교수는 모든 이해관계자가 등 뒤에 몽둥이를 하나씩 감추고 악수하는 것에 비유한다. 결국 합의는 서로의 뭉둥이의 크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합리적 논의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 언어가 안 통한다.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얘기가 안 통하는 상황에서 서로 얘기를 해야하니 괴롭다. 도시재생은 불행지수를 높인 것이다. 파트너십과 협동이 바람직하다고 보면 화병난다.” 극단적인 발언 같지만 신교수는 파트너십이 긍정적이기만 하거나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 원칙으로 간주하는 환상을 깨고 싶어한다. 이는 ‘애매모호함을 견디기’가 파트너십을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데에 까지 이어진다.

“파트너십은 돈 관계, 이익관계, 권력관계가 섞여있다. 주민참여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주민들이 다 이끌어갈 수 없다. 어쩔 수 없고, 더 어렵다.” 그렇다면 파트너십은 포기하거나 내던져야 할 방법론인가? 신교수의 주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가지고 파트너십을 형성해야하고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도시 재생에서 주목할 만한 변화는 이전의 주택복지의 합리적 공급에서 지속가능성, 경제낙후, 사회적 격리 없애기로 주제가 이동하고 인구와 토지이용 재분배에서 사회적 경제적 환경적으로 지속 가능한 지역사회 만들기로 사업의 목적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 전문가에 의한 사업 진행에서 ‘이해관계자들’ 의 참여로 사업의 방식이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책수립의 프로세스가 ‘전통적’ 방식에서 ‘난잡(messy)’ 모형으로의 이동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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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을 위한 현명한 전략, 실패에서 배워라

도시재생을 통해 도시는 나아지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 신교수는 평가기준의 문제를 제기한다. 경제적 발전인가? 지역주민의 삶의 질의 향상인가? 이때 삶의 질의 향상의 기준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도시재생의 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도클랜드처럼 도시디자인이 아니라, 도시경제가 성공을 좌우했다는 것이다, 도시재생을 잘하면 그 자체로 성공하고 잘되리라고 본다면 그것은 너무 큰 환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미 서울은 파헤쳐지고 있고 지역의 많은 도시의 부도심은 붕괴해가고 있는데, 신교수는 과거 정책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 즉 앞선 선진국의 실패의 경험에서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대단히 시니컬하게 파트너십에 대해 비관적으로 말했지만 역시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하게 진화해 온 선진국의 파트너십의 양상이 그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방식이며 도시를 형성해가는 양태라는 것이다. 누구도 온전히 파트너십을 이끌고 갈 수는 없지만 이런 난잡한 과정이 도시의 복잡성을 반영하는 것인 셈이다.

“우리나라는 뉴타운에 대해 지나치게 선악의 개념으로 접근하려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한 젊은 공무원의 질문에 신교수가 답한다. “많이 억울할 거라는 점을 이해해요. 하지만 도시의 재개발과 연관된 제 기억은 전쟁 그 자체입니다.” 도시재생의 파트너십이란 결국 그 사회의 민주적 의사결정의 수준과 닿아있다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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