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으로 잇는 독립운동가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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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4클럽은 우리 사회를 바꾸는 소셜디자이너 1004명이 참여하는 희망제작소의 1천만 원 기부자 커뮤니티입니다. 자신만의 맞춤설계로 모금 스토리를 만들어 가는 천사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시인은 ‘나를 키운 것은 팔 할이 바람이었다’고 했다. 김선현 대표는 자신을 만든 대부분은 할머니의 가르침이었다고 말한다. 할머니는 유독 예뻐했던 어린 손녀를 무릎에 앉히고 틈만 나면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이들이 흔히 듣고 자라는 호랑이나 나무꾼이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시원한 대청마루에 앉아서 할머니가 자분자분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역사’니, ‘독립’이니, ‘민족’이니 하는 단어들이 흘러 다녔다. 살랑하게 부는 바람에 설핏 잠이 들면서도 아이는 할머니의 옷자락을 조막손으로 움켜쥐며 귀를 기울였다. 무심하게 흩어질 것만 같았던 할머니의 이야기들은 어린 손녀의 가슴 속에 어느 새 차곡차곡 쌓였고, 성장하는 내내 단단한 삶의 지표가 되었다.

“제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은 우리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거예요. 특히 할머니는 제가 가장 존경하고 언제나 그리워하는 분이예요. 서른 살이 넘을 때까지 한 방에서 같이 잘 정도로 할머니를 좋아했어요. 지금도 힘든 일이 닥쳤을 때,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하는 순간이 되면 전 언제나 할머니를 생각합니다. 이럴 때 할머니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구요. 할머니라면 늘 옳은 결정을 내렸을 테니까 마음으로 물어보곤 하죠. 그러면 답이 나와요. 할머니는 지금도 제 마음 속에 살아계십니다.”

희망제작소 호프메이커스 클럽(HMC)과 1004 클럽에 동시 후원을 하고 있는 (주)오토 김선현 대표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후손이다. 증조할아버지인 동농 김가진 선생부터 할아버지 성엄 김의한, 할머니 수당 정정화 선생까지 항일 독립운동 투사였다. 그리고 아버지 김자동 씨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이다. 특히 할머니 정정화 선생은 독립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여섯 차례나 국내에 잠입하면서 ‘임정의 맏며느리’ ‘임정의 잔다르크’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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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표는 독립운동가 집안의 후손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 나눔과 기부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저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십일조를 한다는 생각으로 소득의 10%를 기부하고 있습니다. 후원은 한 번 하면 중단하기 힘들어요. 계속 하다 보니까, 어떨 때는 어디에 얼마나 했는지 제가 모를 정도예요, 그래서 연말에 기부금영수증 금액을 보면 꽤 많아요, 이제는 십일조보다 휠씬 더 하고 있는 셈이죠. 후원을 하는 곳이 언제까지나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희망제작소는 처음에는 연구원들의 진심어린 요청을 받고  가벼운 마음으로 후원하기 시작했다. 후원을 시작하고서 희망제작소가 우리 사회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고, 후원회원 모임에 참석하면서 소박하고 맑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서 더 열심히 후원하게 되었다.

후원회원이 되고서 기억에 남는 일은 언젠가 HMC 모임에서 ‘해비타트 희망의 집짓기’에 참가했을 때였다. 집의 중심부가 되는 트러스에 열심히 못질을 하고 ‘하늘빛 이 곳에 머물러 늘 행복하시길’이라고 곱게 새겨 넣었다. 지금쯤 누군가 그 집에서 안온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훈훈해진다. 

“평소에 시민단체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고 대안을 만들어서 현실을 바꾸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희망제작소가 바로 그런 일을 하고 있어서 참 반갑고 신선했습니다. 희망제작소는 회원들이 어느 카페에 모여서 사는 이야기를 나누듯 부담 없이 마음껏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이에요. 지속가능한 재생산의 문화를 창조하는 곳이 희망제작소여서 참 좋았고 그 부분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참여했습니다. 앞으로도 희망제작소가 계속 희망을 만들어 내고 초심을 잃지 않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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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오토는 자동차 부품을 만드는 회사인데, 이 분야에서 김 대표 같은 여성 CEO는 찾아보기 힘들다. IMF 때 창업해서 한때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지금은 경주, 예산, 베트남 3곳에 공장을 가진 탄탄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렇게 자리 잡기까지 김 대표는 그야말로 하루를 분초 단위로 쪼개서 일할 정도로 치열하게 살았다.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김 대표는 기업이 혼자 잘 살기보다는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대표 한사람이 아니라 직원 들도 함께  나누어서 기부를 생활화 하는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지난 2001년부터 매년 직원들과 봄, 가을에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는데, 회사에서는 완주하는 거리에 따라 1km당 1만 원씩 상금을 지급합니다. 만약 20km를 뛰면 20만 원의 상금을 주지요. 그 상금의 1/2과 회사에서 그 금액만큼 더해서 매칭기부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이 기부금으로 경주에서는 동네 결식어린이를 돕고, 예산에서는 어린이들에게 동화책과 어린이신문을 전달하고 군청을 통해서 장학금도 후원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은 1년에 1천만 원씩 이공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습니다.”

인터뷰를 하던 날, 김 대표는 검은 재킷에 화사한 색상의 스카프를 걸치고 있었다. 스카프가 썩 잘 어울린다고 하자, 베트남 출장 때 공정무역 가게에서 구입한 것이라며 환하게 웃는다. 그는 얼마 전에 베트남 출장을 가는 길에 부모님과 동행해서 미얀마까지 효도여행을 하고 왔다고 한다. 애초에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는 여행이었지만, 미얀마 사람들의 순박한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더 행복했다고 한다.

[##_1C|1080657219.jpg|width=”500″ height=”375″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화사한 스카프보다 밝은 미소를 가진 김선현 대표_##]

“저는 우리 사회가 좀 더 따뜻해졌으면 해요. 요즘 세상은 너무 경쟁만 강요하면서 각박해졌잖아요. 베트남이나 미얀마는 우리의 정겨운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좋았어요. 우리도 그런 따뜻함이 흘러넘치는 사회를 만들었으면 합니다.”
훈장도 명예도 없이, 오직 조국을 위해 거친 들판을 누비며 독립운동을 했던 어른들의 뜨거운 마음이 아마 오늘 김선현 대표를 나눔의 삶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인터뷰_ 윤석인 (희망제작소 소장)
정리_ 최문성 (회원재정센터 선임연구원 moonstar@makehop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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