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정책 브레인을 해부한다(11-1)] 베텔스만 재단(Bertelsmann Stiftung)

박명준
희망제작소 객원연구원 / 독일 체류 중

[##_1C|1220727131.jpg|width=”670″ height=”374″ alt=”?”|베텔스만재단 정문 윗단에 붙어 있는 재단로고_##]독일의 기업재단

정당재단형 싱크탱크에 이어 네번째로 소개할 싱크탱크 유형은 기업재단형 싱크탱크이다. 독일은 오래전부터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사회적 책임을 도맡아 온 나라이다. 통일 이전 서독은 사회적 시장경제(Sozialmarktwirtchaft), 사회국가(Sozialstaat) 등으로 명명되는 수정자본주의체제를 운영하면서, 기업에게 상당한 사회적 책임을 부가하였다. 오늘날에도 독일의 고용주들은 자신의 회사에 고용된 근로자들을 위해 절반의 사회적 분담금을 납부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명목으로 상당한 정도의 사회적인 기여를 해야 하는 시스템 안에 놓여 있다.

몇몇 대기업들과 그들의 선진적인 창업주들은 독자적으로 ‘재단(Stiftung)’이라는 형태의 조직체를 기업과 별도로 설립하여 물질적인 사회적 책임를 넘어 싱크탱크적 방식으로 보다 세련되고 질 높은 사회참여를 추구해 왔다. 이는 기업의 운영을 통해 획득한 부를 매우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사회에 환원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필자는 이들을 ‘기업재단형 싱크탱크’로 분류하고자 한다.

유명 자동차 회사인 폴크스바겐(Volkswagen)사의 폴크스바겐 재단(VW Stiftung), 철강회사 튀센-크룹(Tyssen-Krupp)의 튀센재단(Tyssen Stiftung)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유럽 최대의 종합 미디어 대기업 베텔스만(Bertelsmann)사의 베텔스만재단(Bertelsmann Stiftung)과 자동차 부품과 기계산업의 유력한 글로벌 플레이어인 보쉬(Bosch)사의 로베르트 보쉬재단(Robert Bosch Stiftung)등도 여기에 속한다.

재단연합체 BDS의 조사에 따르면, 21세기에 들어 독일사회에는 재단설립의 붐이 일어 2000년대 초반 약 5년간 2,000개 이상의 재단들이 설립되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기업재단들이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는 유명한 독일 대기업들이 즐비한 가운데 그들 중 웬만한 재단 하나 갖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모기업의 이윤의 일부를 기반으로 활동을 하면서, 모기업으로부터 창출된 이윤을 효과적이고 체계적으로 사회를 위하여 지출하는데 전문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이들의 사회공헌과 정책기여 방식은 여러가지인데, 대개 학문과 예술의 발전이나 사회정책상의 특정 프로그램들을 강화하는 방안이 보편적이다.

모든 기업재단들이 적극적으로 싱크탱크적 성격을 지니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중 일부는 그러한 성격을 특히 강하게 지니고 있는 곳들이 있다. 정당재단이 고전적인 형태의 독일형 씽크탱크의 전형성을 지니는 조직체라면, 기업재단들은 상대적으로 ‘간접적’인 방식으로 씽크탱크의 역할을 수행한다.

베텔스만 재단

이 글에서는 그 중에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으며 싱크탱크적 속성이 특히 강하다고 할 수 있는 베텔스만 재단을 소개한다. 베텔스만 재단은 독일의 유명한 종합 미디어 그룹인 베텔스만(Bertelsmann)사가 설립한 공익지향형 재단이다. 가장 대표적인 독일의 기업재단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곳으로, 현재 약 3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곳은 그간 독일 사회가 개혁을 향하여 나아가도록 사회적 현안과 관련한 정책연구와 공론장에서 선도적으로 논의를 이끌어 왔다. 재단의 연구결과를 포함한 일거수 일투족은 늘 독일의 주요 언론들이 주목을 하며, 인용, 보도하고 있다. 근래에 들어 미국과 스페인을 넘어 중국으로까지 진출을 모색하면서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베텔스만 재단의 창립은 베텔스만 기업의 창립인이자 최고경영자인 라인하르트 몬(Reinhardt Mohn)에 의하여 1977년 초에 이루어졌다. 그는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의 포로가 되어 한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는데, 옥살이를 하면서 ‘목표를 잘못 설정하고 그것을 잘 못 이끈 지도자에 의해 한 민족의 운명이 패망의 길로 갔다’는 것을 뼈저리게 반성하면서 베텔스만 재단의 초석이 되는 사고를 깊이 진행했다고 한다.

몬은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에 강한 영향을 받은 인물이었으며, 인생에서 경주해야 할 목표를 단순히 개인의 성공에만 두는 것을 넘어‘성공을 통해 얻은 자원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성공한 사업가인 그가 베텔스만 재단과 같은 기관을 설립한 것은 그가 지녔던 이러한 원초적인 가치지향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_1L|1043018622.jpg|width=”500″ height=”338″ alt=”?”|귀터슬로의 호수변에 위치한 베텔스만 재단_##]방문

베텔스만 재단 방문은 지난 2007년 6월에 이루어졌다. 이번 연구의 첫 방문지였다. 신속한 방문이 가능했던 것은 담당자가 가장 신속하게 답신을 주고 방문을 조직해 주었기 때문인데, 그런 모습만으로도 대기업 재단이 갖추고 있는 내부 커뮤니케이션의 신속성, 효율성을 자원을 느낄 수 있었다. 외부에 대해서 친절하고 민감하게 반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과 그에 맞는 인력의 내부배치 등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은 금새 ‘뭔가 일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구나’라는 인상을 주었다.
베텔스만 재단은 독일 북서부의 소도시 귀터슬로(Gütersloh)에 위치해 있다. 귀터슬로는 대외적으로는 물론이고 독일 내에서조차 그다지 주목을 받는 도시는 아니다. 세탁기나 진공청소기 등의 가전제품을 대를 물려 쓸 정도로 튼튼하게 생산하기로 정평이 있는 ‘밀레(Mille)사’와 베텔스만재단의 모기업 ‘베텔스만(Bertelmann)사’가 위치해 있는 것 정도가 유일한 상징자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텔스만사의 사옥은 어느 조용하고 그림같은 인공호수가에 지어져 있었고, 재단은 그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해 있었다. 호수가에는 백조들이 한가로이 호수위를 떠다니고 있었는데, 건물 안에서 투명한 유리벽을 통해 건물밖 호수가의 아름다운 전경을 바라보노라면 풍요가 만들어낸 최적의 업무환경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필자를 맞이해 준 인물은 재단의 홍보담당관인 울리히 륀스트로트(Ulrich Lünstroth)씨였다. 그는 충실하게 방문을 수락해 주었고, 앞서 서면으로 보낸 방문 취지에 부합토록 신경을 꽤 써서 내부의 전문가들과의 면담도 함께 조직해 주었다.

[##_1R|1393880694.jpg|width=”450″ height=”325″ alt=”?”|베텔스만 재단의 커뮤니케이션 담당관 륀스트로트씨_##]

그의 주선으로 당일 두 사람의 직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 사람은 재단내 국제담당 상임이사직을 맡고 있는 요제프 야닉(Josef Jannig) 박사였고, 다른 사람은 젊은 변호사인 프랑크 셔만(Frank Schermann)씨였다. 야닉씨는 베텔스만재단의 역사와 운영 전반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 주었고, 셔만씨는 재단 내 인적자원의 현황과 관리방식에 대해서 브리핑을 해 주었다. 두 사람과의 면담에 더하여, 마지막에 륀스트로트씨와 다시 만나 베텔스만 재단의 대외소통에 대해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_1R|1352608115.jpg|width=”450″ height=”301″ alt=”?”|베텔스만 재단의 인적자원 관리부 연구원인 젊은 변호사 셔만씨_##]특히 야닉씨는 베텔스만 재단 활동의 핵심을 잘 설명해 주었다. 그 스스로 베텔스만 재단에 일찍부터 간여를 했고, 지금은 재단의 핵심 브레인으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국제담당 이사로 미국과 유럽을 위시하여 세계적으로 베텔스만 재단을 매개로 한 국제활동에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약 1시간 동안 사전에 전달한 폭넓은 내용을 담은 질문지를 하나씩 짚으면서 막힘없이 답변을 주었다. 매우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의사를 100% 전달하며 다루는 주제마다 체계적인 배경설명과 아카데미즘적인 설명논리까지 곁들여 주었다. 한 조직에 대한 평면적인 소개를 넘어, 마치 한편의 지적인 강의를 듣는 듯한 재미를 솔솔 느낄 수 있었다.

[##_1R|1392755212.jpg|width=”450″ height=”403″ alt=”?”|베텔스만재단의 국제담당 이사 야닉씨 _##]정체성

창립자 몬의 사고가 탁월한 것은 그가 일반적 자선과 기부의 정신을 넘어서 사회적 기여의 방법론으로 ‘혁신과 아이디어 개발’을 삼은 점이다. 야닉씨는 그가 생각한 혁신은 기술혁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혁신(social innovation)’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에 따르면, 몬은 자신이 자선단체를 설립할 경우, 그것이 사회의 문제를 발견하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을 다루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몬의 생각에 바탕으로 하여 베텔스만 재단은 다른 기업재단들과 마찬가지로 후원과 기부활동을 수행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결코 돈 자체를 증여하는 방식으로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대신 독일사회의 미래와 관련된 프로젝트들을 추진하면서 전문인력들을 발굴하여 재단과 함께 수행하는 방식으로 돈을 운용한다. 정책생산의 후원자임과 동시에 주체로서 베텔스만재단은 직간접적인 씽크탱크로서의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다.

미국의 듀크(Duke)대학 공공정책학과의 플라이쉬맨(Fleischman) 교수는 몬의 지향과 베텔스만재단의 창립을 미국의 전설적인 사업가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의 그것 및 그가 설립한 카네기 재단(Carnegie Foundation)과 비교하면서, “두 사람 모두 비전을 가진 특별한 기업가들이었고 어떻게 사회를 활용할 지에 관하여 유사한 삶의 관점을 지녔던 인물들이었는데, 활동적인 재단(operative Stiftung)을 실현한 점에서 몬이 카네기를 능가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펴면서 그는 특히 몬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였다. “오늘날 ‘정치의 영역에 보다 많은 기업인들을 참여시키자’는 생각이 자주 대두되고 있긴 하나, 나는 그 가능성에 대해 다분히 회의적이다. 다만 하나의 공익지향적 재단을 통해 기업이 지닌 자원을 사회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유용하도록 쓰는데에는 아주 높은 가능성을 본다.” 플라이쉬맨에 따르면, 공익재단에 관한 몬의 생각은 카네기가 생각한 재단의 형태에 비해 더욱 더 높은 정당성을 갖는 것이었다.

씽크탱크로서 베텔스만 재단의 성격과 관련해서, 야닉씨는 자신들을 ‘사회에 관한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는 인큐베이터’라고 간주하였다. 이곳은 “매우 응용지향적, 정책기여적” 성격과 지향을 지니고 있는 곳이며, “창의적이고 지적”인 면모를 최대한 지향하지만, 그렇다고 고전적인 의미의 순수 학술기관적 성격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학술기관(academic institute)은 아닙니다. 우리 내부에 실험실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실험실은 사회입니다. 우리가 다루고 개발하는 모델작업이나 테스트 작업들은 모두 이 건물의 밖에서 이루어집니다.” 야닉씨의 말이다.

인력

지난 30년간 재단의 인력은 꾸준히 확충되어 왔다. 최근에는 스스로 무분별하게 대규모화하여 관료, 행정적인 파트가 커지는 것을 우려하면서 인력을 적극적으로 늘리지 않고 있는 중이다. 2007년 현재 전체 직원은 약 330여명 규모이다. 그 가운데 3분의 1인 120여명이 ‘프로젝트 메니저’들이고, 파트타임 인력은 78명이다.

전체 직원에서 남여 성비율은 1:2라고 할 수 있으나 파트타임 인력 안에서는 절대인력인 70명이 여성이다. 즉 여성인력이 많은 것은 상대적으로 파트타임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이다. 반면 22인의 경영진(executives) 가운데에서는 남여 비율은 2대1로 남성이 우세하다. 연령대별 구성을 살펴보면, 직원들의 평균 연령은 38세이며, 약 절반 가량인 166명이 30대들이다.
몬은 특히 조직과 조직의 효율성에 대해 지대한 강조점을 두었다고 한다. 베텔스만이 기업으로부터 기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내부조직 운영상에 있어서 세심하게 효율성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점에서 특히 강하게 드러났다. 이들은 프로젝트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상명하달(top-down distribution)’에 대한 의존성을 가급적 지양하고, 아래부터의 창안과정을 경쟁의 원리와 함께 도입하고 있다. 또 프로젝트를 디자인하고 포커스를 맞추고 함에 있어서 내적인 경쟁체제를 두고 있다.

[##_1C|1072165294.jpg|width=”600″ height=”450″ alt=”?”|베텔스만 재단 건물의 내부. 당일 직원들 가운데 결혼식을 한 사람이 있어 동료들이 입구 홀에 모여 축하를 하고 있다_##]소통 – ‘전략적 프로세스’

베텔스만은 내부 의사소통 방식의 독특한 사례로 소위 ‘전략적 프로세스(strategic process)’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2주일에 한 차례씩 동일한 주제를 놓고 상이한 앵글에서 조명하는 내부 토론회이다. 예를 들어, 정의(justice)와 참여(participation)의 문제, 교육(education)의 문제, 세계화(globalization) 등 사회적 화두가 되는 다양한 이슈들을 선정하고, 약 1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서 “실제로 어떤 문제점들이 있고, 그러한 이슈에서 오늘날 가장 핵심(essence)은 무엇인가”에 관하여 자유롭고 창의적인 난상토론을 진행하는 것이다.

전략적 프로세스는 수직적인 소통구조에 있어서 탑다운top-down과 바텀업bottom-up간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으려는 작업이기도 하며,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신이 지니고 있는 최고의 아이디어를 조직의 활동을 위하여 불러내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참여지향적 주제선정의 과정이다. 이 자리에서는 논의의 진행과정에서 자신의 업무나 조직의 업무상에서 문제라고 지적될 수 있는 지점도 허심탄회하게 나서서 잘 못 되고 있다는 지적을 과감히 내 놓을 수도 있다. 야닉씨는 전략적 프로세스를 통해 조직이 많은 것을 얻고 있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과정은 무엇보다도 미래에 프로젝트 테마를 선정함에 있어 매우 의미있는 기여를 하고 있다. 베텔스만 재단의 프로젝트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매우 신자유주의적(neo-liberal)인 면이 있고, 다른 것들은 국가개입주의적(state-interventionalist)인 내용을 지니기도 한다. 그러한 주제의 선정은 편견없이 핵심문제를 논구하고 짚으려는 내부의 소통의 결과이지, 어떤 정해놓은 이념적인 원칙을 따르고 구현하려는 가운데 마련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야닉씨의 설명이다.

조직

아주 복잡하지는 않지만, 내부적으로 여러층위의 직급이 세분되어 있다. 각 부서장(head of department) 밑에는 연구직인 ‘프로그램 메니저들(program managers)’이 있고, 그 아래에 ‘프로젝트 메니저들(project managers)’이 활동을 한다. 프로그램 메니저들은 해당 부서에서 실행하는 여러 프로젝트들을 이끄는 인물들로, 재단의 경영진(management committee)에 속한다. 현재 이들의 수는 약 13명 가량에 이른다.

한편, 재단은 근래에 들어 적극적인 세계화 전략을 펴며, 해외네트워킹 확장작업을 확대해 왔다. 현재 스페인에 ‘스페인 베텔스만 재단’을 두고 있고, 조만간 미국의 워싱턴에 지부를 열 계획이다. 이에 더해서 향후 베이징과 모스크바, 그리고 아랍국가들 가운데 한 곳에 역시 지부를 개설할 계획을 구체적으로 지니고 있다.

특히 지난 3년전부터 중국에 지부를 설립하는 작업을 본격화하면서 동아시아와의 유대와 협력관계에 특별한 신경을 쓰고 있는 중이다. 동아시아와의 관계에 있어서 내용상으로 베텔스만이 중점을 두고 있는 부분은 동서양간의 ‘문화적 대화(cultural dialogue)’에 관한 것이며, 이를 매개로 아시아 시민사회에 대한 연구와 협력증진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상황이다. 당일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 주제를 전담해서 고민하는 연구원이 재단내에 존재한다고 들었고 그간 이와 관련해서 추진한 프로젝트들의 결과물도 문서로 전달받을 수 있었다.

야닉씨는 해외 지부를 통해 활동을 확장시키는 일은 더불어 조직체의 인력들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데에 있어서도 매우 유용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역량있는 씽크탱크가 자신을 세계화하려는 지향을 지니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지금까지 저희들은 대부분 독일내의 국내정치와 관련해서 매우 활발한 정책적인 기여를 해 왔고, 그에 더해서 유럽정치 차원에서의 기여도도 높여 왔습니다. 대체로 독일과 유럽에 촛점을 두고 정책 성립과정에서 탁월한 조언과 자문을 해 왔다고 자부합니다. 이제 창립 30년을 맞이하여 저희는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면, 그곳으로 진출해서 세계화하는 것이 효율적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2부에 계속)

[연재순서]

1. 연재를 시작하며
2. 쾰른의 막스플랑크 사회연구소 MPIfG
3. 뮌헨의 ‘경제를 위한 연구소 IfO’
4. 포츠담의 ‘기후영향연구소PIK’
5. 프랑크푸르트의 ‘헤센 평화와 갈등 연구 재단(HSFK)’
6. 뉘른베르그의 ‘노동시장과 직업연구를 위한 연구소IAB’
7. 도르트문트의 ‘도시와 공간정책 연구소ILS-NRW’
8-1. 본의 ‘프리드리히 에버트재단 FES’
8-2. 본의 ‘프리드리히 에버트재단 FES’
9. 베를린의 ‘콘라트 아데나워재단 KAS’
10. 베를린의 ‘하인리히 뵐 재단(Heinrich Böll Stiftung)’
11-1. 귀터스로의 ‘베텔스만 재단(Bertelsmann Stiftung)’
11-2. 귀터스로의 ‘베텔스만 재단(Bertelsmann Stiftung)’
12. 슈트트가르트의 ‘로베르트 보쉬 재단(Robert Bosch Stiftung)’
13. 뒤셀도르프의 ‘경제사회연구소(WSI)’
14.‘쾰른 경제연구소 (IW Köln)’
15. 베를린의 ‘베를린폴리스(Berlinpolis)
16. 베를린의 ‘위드(WEED)’

[기획연재] 독일의 정책브레인을 해부하다 는 매 주 수요일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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