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젊디젊은 두 여성이다.
이들이 남의 동네에 들어와 커다란 마을회관을 점령했다. 비어있는 콘크리트 건물을 문화적으로 재생시키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화려하고 거창한 작업은 아니다. 마을 사람들의 기억을 오래된 서랍에서 끄집어내 책으로 만들고, 마을회관에 전시한 것이 시작이요, 끝이다.

동네 어른들은 이 정체불명의 여성들, 그리고 이들에 의해 변화하는 마을회관을 무척 궁금해 했다. 아직도 어르신들은 선뜻 마을회관의 문을 열고 들어서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낯선 이방인에 대한 경계와 무관심을 넘어 두 여성이 거두려 한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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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사진기로 담아낸 동네 풍경. 가운데 인물은 디렉터 김은희씨. ⓒ희망제작소

1월 25일 찾은 시흥시 매화동 마을회관은 젊은 감각으로 산뜻하게 단장을 하고 있었다. 우리를 맞아준 두 여성은 문화 운동에 힘써 온 강은정 시흥 문화공동체 이공 대표와 건축을 전공한 김은희 디렉터다. 이들의 환한 웃음이 마을회관의 디자인처럼 젊고 싱싱하다.


활동의 근거지를 찾아 마을회관으로


강은정 대표는 마을회관에 들어오기 전부터 시흥 지역에서 문화 운동과 미디어 교육을 해왔다. 사회단체 실무자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영상 교육을 하고, 독립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김은희 디렉터를 비롯한 현재의 동료를 만난 것도 교육 현장에서였다.

“백수끼리 친하게 지내다 경기문화재단에서 공모한 <매화동 마을회관 재생프로젝트>에 함께 응모했습니다. 이전까지 우리 활동은 근거지가 없었어요. 언제나 시간강사 등의 비정규직 인력으로 떠돌아다녔습니다. 프로젝트 응모도 이런 현실에서 비롯됐죠. 우리가 만났던 공간이 학교는 학교대로, 사무실은 사무실대로 삭막했고, 문화 교육을 하기에는 적절치 않았어요.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았습니다.”

공모에 선정돼 일을 시작했지만, 넘어야 할 산은 많았다. 마을 주민들은 정체불명의 이방인들에게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했다.

“지역에서는 우리 운동에 관심이 없어요. 주민 중에는 ‘너희가 무얼 하는지 의심스럽다’고 표현하는 분도 있고, ‘실체가 드러나기를 기다렸다’는 분도 있었어요. 주민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모두 거절했습니다. 관심도 없고, 품이 많이 들어갈까 걱정을 한 거죠. 하지만 프로젝트가 시작된 후 마을회관을 찾아온 주민들은 변화를 보며 신기해했습니다. 이제는 또 다른 프로그램이 진행되면 동참하겠다는 분도 생겼죠.”


자신의 삶으로 책을 만든 사람들


문제는 ‘어떻게’였다. 단순히 공간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아니었다. 이들은 “유치원처럼 보이던, 작은 가게처럼 보이던 문턱이 높지 않고 이질적이지 않은 공간을 만들자”고 마음먹었다.

“마을 주민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나 동네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직접 글을 쓴 사람도 있고, 인터뷰를 통해 구술한 사람도 있죠. 주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책을 만들도록 하는 일은 힘들었습니다. 교육을 통해 사진을 찍도록 하고 이야기도 구체화하도록 도왔죠. 주민들이 오래된 사진을 들고 오면 사진 속에 감춰진 사연으로 이야기 틀을 짜 책을 만들도록 했습니다. 아이들은 동네를 돌아다니며 마을의 이야기를 찍고, 기록했죠.”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이 책으로 엮어졌다. 어느 아주머니의 가족사, 동네 할아버지의 생애가 담긴 책을 나무 상자에 담아 마을회관에 전시했다. <기억의 서랍을 열다> 전은 이렇게 조각조각 이야기를 끌어모아 조각보를 만들듯 정성스럽게 꾸려졌다. 자신의 이야기가 흐른다는 사실은 사람들을 마을회관으로 불러들이는 충분한 동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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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정 대표 뒷편으로 주민들이 쓴 책들이 전시 되어 있다 ⓒ희망제작소

주민들의 삶을 프로젝트의 소재로 택한 이유는 무얼까. 이들은 “삶의 주체성 회복이 모든 지역운동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각자가 소통의 주체가 되면 아이가 동네 할아버지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던 사람들이 서로 관심을 갖고 소통하게 되는 거죠. 공동체 인식의 기반이 되는 겁니다. 우리의 활동은 이를 지원해주는 일이죠. 나를 중심으로 사회적 관계를 파악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내 삶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의 문제를 외면할 수 없다, 내가 좀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지역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죠.”



“너무 궁금했지만 차마 문을 열지 못했다”



주민들과 함께 호흡하고 뒹굴었던 기간은 3개월이다. 완고했던 주민들은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이들은 “큰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지속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진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어느 날 마을 회관 문을 여니 문 앞에 서 있던 어르신 한 분이 도망을 가시더군요. 이분 말씀이 ‘무슨 일을 하는지 너무 궁금했는데 젊은 처자와 아이들만 있어서 감히 들어올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주민들이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배제한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겨울철 농한기가 되니까 무료한 노인 분들이 주변을 계속 왔다 갔다 하세요. 아직은 이분들을 위해 준비된 프로그램이 없지만 앞으로 만들어갈 겁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남과 나누는 경험은 주민들의 삶에 울림을 남겼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중요한 변화다.

“마을 여성들은 남편에게 무시당했던 경험 등을 수다스럽게 털어놓으며 자존감을 회복합니다. 가족이나 친구관계에 대한 인식을 다시 하고, 동네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는 분도 계세요. 새로운 문화생산자의 발굴입니다. 이제는 주민들이 내년 사업을 궁금해 합니다.”

아이들의 반응은 조금 더 빨랐다. 어른들의 무관심 혹은 규제에 시달리던 아이들은 자율적인 작업을 즐거워했다. 스스로 만든 결과물은 자신감을 선물했다. “내가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다”고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언제든 떠나야 하는 ‘문화 노마드’


이들은 공간재생사업을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다. 어린이, 청소년, 아줌마 등 다양한 주체와 함께 삶의 환경을 바꿔 나가는 작업이다. 주민들은 단순한 문화 소비자가 아닌 생산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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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졌던 빈 마을회관에는 이제 주민의 삶이 흐른다 ⓒ희망제작소

“공간재생을 하던, 책을 만들던 교육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을 통해 문자, 사진, 영상 등 다양한 매체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죠. 표현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은 모두 중요합니다. 꼭 해보고 싶은 것은 몸 표현입니다. 마음이 닫혀있는 이에게 유익한 표현수단이죠. 말 그대로 참여해서 해 보는 겁니다. 교육을 통해 생산자의 위치로 가는 거죠. 느릿느릿 가게 될 것 같아요.”

물론 아직도 넘어야할 산은 많다. 지원금을 받아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문화운동가에게 녹록한 것은 없다. 경쟁과 콘텐츠를 강조하는 현 정부의 문화정책 역시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공청회에 참석했다가 거부감을 많이 느꼈습니다. ‘너희도 경쟁하라, 너무 콘텐츠가 없다, 경기도민도 공공문화를 향유할 권리가 있다’ 등의 요구가 있더군요. 그동안 피폐해진 문화예술 생산자의 삶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요구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정책이 입안자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이들로부터 지원금을 받기 때문에 행정적인 요구를 맞추지 않을 수 없죠. 소비자의 입장을 바탕으로 생산자의 자문을 얻어 정책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들은 어쩔 수 없는 ‘문화 노마드’ 신세다. <매화동 마을회관 재생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도 통장과 ‘마을회관 부지가 팔리면 언제든지 나간다’ 는 계약을 맺었다.

“고정된 근거지는 없어도 괜찮습니다. 일상적인 관계만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떠나고 싶지는 않지만, 마을회관이 팔리면 어쩔 수 없죠. 마을회관이 도시인의 삶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봅니다. 버려진 공간에 들어왔지만, 사유재산의 성격 때문에 주인의 의지에 따라 언제든지 떠나야 하는 거죠.”

문화 노마드가 보금자리를 마련할 날은 언제일까. 그때까지 이들은 나비처럼 날아다니며 지역의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낼 것이다. 힘없이 사라져가는 지역과 사람의 기억, 그리고 땅이 간직한 수많은 지혜를 살려낼 누군가가 필요하다. 아직 우리에게는 그들의 날갯짓이 필요하다.

정리_이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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