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진부령 정상에 오르자 가랑비 내리기 시작했다. 산마루에는 혼란스러운 남북관계를 반영하듯 산안개가 자욱하다. 우리는 금새 눈발을 뿌려대는 변덕스러운 날씨의 방해를 받아가며 <동해선도로남북출입사무소>에 도착했다.

출입사무소는 한산했다. 넓은 대기실에 100여명의 관광객이 삼삼오오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아마도 겨울과 봄의 징검다리에서 비수기를 맞은 것 같다. 관광객이 적은 탓에 오후 3시부터 시작한 출국 수속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금강산을 왕래하는 전용 셔틀버스에 오르자 사람들의 표정이 상기되기 시작했다. 꿈속에서도 넘어가지 말아야 할 금단의 땅에 들어간다는 호기심과 약간의 불안감이 뒤섞인 묘한 설레임이다.

출입사무소를 출발해 비무장지대를 들어가는 금강통문까지는 15분, 그리고 군사분계선을 넘는 데는 2분을 더해 불과 17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우리는 드디어 다른 세상으로 들어왔다. 같은 시간, 지척의 공간이 이리도 낯설고 어색하게 다가올 줄이야. 마음의 벽이야말로 세상의 어떤 물리력보다 강하고 높은 것 같다.”?”
<같은 공간에서 만난 과거와 현재>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 비무장지대로 들어서자 물 반 고기 반이라는 천혜의 자연석호 감호가 나타났다. 이 긴장의 땅에도 자연은 너무도 평화롭다. 그 옆에는 동해를 내리치던 금강산의 끝자락에 아홉명의 신선이 놀던 구선봉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북측 비무장지대를 통과해 출입사무소에 도착하기까지는 20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길고 지루한 분쟁지역의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시간이 고작 시내버스 두 정거장의 거리였다니.

북측 입국 수속은 의외로 간단하게 통과했다. 빗줄기는 그칠 듯 하다가도 질기게 이어졌다. 금강산 가는 길은 적막하기만 하다. 주위의 산은 모두가 민둥산이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다. 가이드는 척박한 토양 탓에 나무가 자라지 않는다고 했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모두 땔감으로 베어낸 것 같았다.

금강산이 가까워지자 마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을 입구에 높다란 주체화가 우뚝 서 있는 봉화리. 주위를 둘러싼 노송들의 고풍스러운 운치와 달리 어두운 회색 톤의 집들이 움츠리듯 모여 있는 금천리. 그리고 금강산에 인접한 가장 큰 마을 온정리가 경계의 눈초리로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남측출입사무소를 출발해 50여분 만에 김정숙초대소를 리모델링한 외금강호텔 숙소에 도착했다.
우리는 여장을 풀자마자 <평양모란봉교예단> 공연을 관람했다. 인간의 몸으로 표현하는 휴먼서커스의 절정이었다. 기둥곡예와 공중곡예는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가 상상력을 뛰어 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금강원의 저녁 식사는 진수성찬 그대로다. 향 짙은 송이버섯, 고소한 돌버섯, 신선한 새우와 은은한 녹두전, 그리고 홍합죽. 결코 강하지도 않고 본래의 맛이 입안에 감도는 일품요리 그대로였다. 식당이 위치한 금강산 호텔 2층엔 사방 벽면에 거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1급 인민예술가 아홉 명이 30일 동안 완성한 작품이란다.”?”<금강산의 눈보라와 온정리 마을>

이튿날 아침, 풀리지 않은 여독과 지난밤 뒷풀이의 후유증(?)을 이겨내며 구룡연 등산길에 올랐다. 새벽부터 흩날리던 눈발은 작아졌지만, 바람은 더욱 거칠게 변해갔다. 온정각을 출발해 금강송 숲을 지나 신계사를 거쳐 등산로 입구 주차장에 도착했다. 금강산이 우리를 거부하듯 바람은 거의 태풍 수준으로 돌변했다. 산바람은 우리를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게 거세게 밀어냈다.

등산로는 미끄럽고 위험했다. 얼음은 바위로 위장해 우리의 발길을 방해했다. 금강산은 절세비경을 쉽게 보여주지 않겠다는 듯, 세찬 눈보라가 고개는 커녕 걷는 것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우리는 경치구경은 내려올 때 하기로 하고, 일단 구룡폭포까지 오르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정도로 길은 험하고 날씨는 험악했다.

드디어 구룡폭포가 보이는 전망대. 저 거대한 폭포는 어디서 오는 걸까. 산과 계곡을 굽이치고 바위에 부서지면서도 어떻게 저토록 맑고 투명한 모습을 지켜낼 수 있을까. 구룡연의 물보라는 눈보라군단보다 더 위엄있다. 폭포소리는 세상의 모든 말들을 삼켜버리며 헛된 입놀림으로 만들어버렸다.

내려오는 길은 더 위험했다. 얼음을 피해가며 조심스레 내려오는 길에도 역시 경치구경은 뒷전이었다. 산을 내려와 목란관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야 날씨가 풀리기 시작했다. 물론 청청한 햇살도 눈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았다. 마른 하늘에 눈보라는 여전했다.
오후에는 관동팔경의 한 곳인 삼일포를 둘러봤다. 봉래대에서 바라본 삼일포는 역시 매혹적이다. 금강산의 하루는 그렇게 저물어갔다. 저녁식사와 금강산예술단의 여성밴드는 문화차이 탓인지 어색하면서도 이색적이었다. 특히 가야금 독주와 전자기타 독주의 현란한 기교에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눈물을 글썽이며 무대커튼 밑으로 손을 내밀어 아쉬움을 나타내는 예술단원들의 인사를 뒤로하고 우리는 금강산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마지막 날. 한 팀은 만물상에 오르고 한 팀은 온정리 마을회관에서 연탄 하역작업을 도왔다. 온정리는 금강산 관광특구와 인접한 마을이다. 관광객이 들어갈 수 없는 금단의 땅이지만, 원기준 목사님의 연탄 지원사업을 돕는 일정이 받아들여져 운좋게 마을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온정리는 남측의 면 소재지 정도 크기였다. 중앙로 양편에는 온갖 구호들이 즐비하고, 집들은 높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었다. 건물과 집들의 창문은 대부분 비닐이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위태롭게 서있다. 우리 버스가 지나가자 주민들은 담 뒤로 몸을 숨겼다. 마을을 구경하고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기대와 달리, 우리는 1시간여 동안 연탄만 내려놓고 곧바로 마을을 빠져나왔다.
2박 3일 동안의 금강산 관광. 탄성을 자아내는 신비로운 경치보다, 종잡을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의 혼돈, 그리고 뼈아픈 분단의 현실이 더욱 긴 여운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