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비비고 정 부비고 사는 별난 마을 이야기

서울에 자리 잡은 지 9년, 전입신고까지 마친 완벽한 ‘서울 사람’이지만 저의 고향은 전라도의 작은 소도시입니다. 명절 때가 되어 오랜만에 찾아가도 변한 것이 거의 없는 시골이기 때문에, 어릴 때는 그런 단조로움이 싫어 서울에서 살고 싶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2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고 있는 요즘, 생각이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볼 것도 많고 사람도 많고 그래서 치일 것도 많은 도시보다는 사람들끼리 어울려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정답게 지낼 수 있는 시골 마을, 그런 곳에서 지내고 싶다는 상상을 하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저의 마음을 더욱 흔들어 놓은 책이 있었으니, 바로 <어머니의 손맛이 지은 비비정 마을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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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을 닮은 싱그러운 연두색 바탕에 ‘비비정’이라는 단어가 소담하게 담겨 있는 책 표지가 마음에 들어 며칠간 가방에 넣고 다니면서 버스며 지하철에서 틈틈이 읽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을 때마다 가는 행선지는 그때그때 달랐지만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가까워질수록 제 마음은 삼례의 비비정 마을 입구에 다다르는 것 같았습니다.

비비정 마을의 간단한 소개부터 어떻게 마을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지, 또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 쭉 읽고 나면 가장 중요한,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지고 마을의 미래에 대한 솔직한 청사진을 끝으로 책은 마무리됩니다. 이 책은 마을공동체, 커뮤니티비지니스에 관심이 있는 사람부터 정말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를 찾고 있는 독자, 그리고 저처럼 시골 마을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가 가득합니다.

책에도 나와 있듯, 많은 사람들이 다녀가고 TV를 비롯한 수많은 매스컴에서도 비비정 마을을 주목하는 것을 보면서 “시골 마을에 한식 레스토랑과 카페가 생긴 것이 어떻게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비비정 레스토랑’과 ‘카페 비비낙안’은 멋진 현대식 건물 두 채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을을 살리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도우려고 하는 뜻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함께 만들어간 비비정 마을은 마을에 대한 사랑과 그곳을 일구는 사람들의 정이 가득 담겨 있어 굳이 내보이려 하지 않아도 많은 이들을 매료시킬 수 있는 곳이 되었던 것입니다.

생각이 다른 마을 사람들과 의견을 조율하고 더 좋은 메뉴와 서비스를 개발하기 위해 밤잠과 낮잠을 모두 반납하신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며 비비정 마을의 성공이 결코 쉽게 이뤄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레스토랑과 카페뿐만이 아니라 작은 양조장, 가을 자두로 만든 추희 쨈, 화백밴드와 건달 시스터즈, 써니 캠프와 업싸이클 캠프까지. 이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이벤트들이 마을을 더 활기차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비정 마을은 주민 대부분이 전쟁 피난민이거나 수몰 지역 이주민이었고 이들이 하나둘 들어오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되어 다른 마을에 비해 배타심이 적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방문객을 맞이하는 마을 주민들의 마음이 참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한 권의 책에 담을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더욱 진한 정을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찡해지기도 했습니다. 비비정 마을에 푹 빠져버린 책 막바지에 이르러 문득, 이곳 사람들은 어떤 꿈을 꾸며 현재를 살고 있는지 궁금해졌습니다. 그토록 바랐던 마을 살리기도 어느 정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뤄낸 지금, 무엇을 꿈꾸는지 말입니다. 궁금증은 책의 에필로그 마지막에 나와 있었습니다. 못살았기 때문에 잘 살게 되는 것보다 이웃을 함께 서로 잘 알고 나누고 편안하게 사는 것, 이웃이 가족이 되어 서로 털어놓고 사는 어울림이 있는 마을이 되는 것이 지금 비비정 마을 주민의 소망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 책은 서둘러 발전하기 보다는 조금 더디게 가더라도 함께 가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마을을 만드는 것이 비비정 마을 사람들의 희망이라고 말하며 끝이 납니다.


물리적인 성공을 뛰어넘어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며 느끼는 행복을 추구하고자 하는 그들의 희망 이야기에 도시살이에 지친 제 마음이 따뜻해졌습니다. 그리고 6월이 가기 전에 꼭 이 비비정 마을에 다녀오겠다는 다짐을 일기장에 굵은 펜으로 크게 적어 놓았습니다. 건달 할머니들이 만들어주시는 맛있는 점심을 먹고 카페 비비낙안에서 마을의 내일을 책임지고 있는 2세대 젊은이들이 내어 주는 커피를 마시며 이 책을 다시 읽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단순한 이야기가 담긴 것이 아니라, 비비정 마을에 다다르게 하는 안내서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박하고 차가운 세상 속에서 갈 곳을 잃은 마음들에게 따듯한 쉼터를 내어 줄 수 있는 곳, 비비정 마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글_ 이슬비 (32기 사회혁신센터 인턴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