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보도] [세상 읽기] 노사정 대타협과 어른 노릇

거의 성사될 듯하던 노사정 대타협이 결렬됐다. 김대환 노사정위원장은 사퇴 의사를 표명했다.

근본적 의문이 생겼다. 한국 기성세대는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한가? 미래세대를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자리에서도 그런가?

합의 직전까지 갔던 논의 초안에는 눈길이 가는 대목이 적지 않다. 청년 고용 확대, 청년 창업 지원, 청년의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 진출 지원 등 풍부한 청년 관련 내용이 담겼다. 노사정이 함께 미래 노동자인 청년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내용이다. 청년 열정페이, 수습사원 부당해고 방지 노력 같은 내용도 있다.

“향후 3년간 예상되는 청년 고용절벽을 돌파하기 위해 대기업, 공기업은 청년 신규 채용 규모를 확대하기 위한 제반 조치를 강구하고, 정부는 청년 고용을 확대하는 기업에 고용창출투자세액공제, 세무조사 면제 우대, 중소기업 장기근속 지원, 공공조달계약 가점 부여 등 정책적 지원을 강화한다.” 합의 직전까지 갔던 논의 초안 본문의 첫 대목이다. 문제의식과 해법이 명확하다.

‘생명 안전 분야 비정규직 사용 제한’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겠다는 내용도 눈에 띄었다. 미래세대 아이들의 목숨을 한꺼번에 앗아간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대목이다.

협상 당사자가 아닌 미래세대 이야기가 많이 담긴 것은 고무적이다. 한국 기성세대가 오랜만에 어른 노릇을 해볼 수도 있었다는 아쉬움이 크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 기업, 정부를 대표하는 어른들이 머리를 맞대고 각자 기득권을 조금씩 내려놓으며 미래세대를 위한 합의문을 냈다면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하지만 협상은 정부가 일반해고 가이드라인을 도입해 기존 정규직의 해고를 좀더 쉽게 하겠다는 입장을 강변하면서 결렬됐다. 정부가 정말로 청년을 생각하고 저임금 비정규직을 생각해 대타협을 추진했던 것이라면 고집할 이유가 없는 내용이었다.

공공부문과 일부 안정적 대기업을 빼면 한국은 해고가 어려운 나라가 아니다. 일반해고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면 중소기업에서 더 많은 해고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노사정 대타협이 원래 목표했던 노동자들 사이의 임금 및 안정성 격차 해소, 즉 이중노동시장구조 개선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노동계, 재계, 정부의 사회적 합의기구인 노사정위원회는 대화와 타협의 제도적 형태이다. 아이엠에프 구제금융 직후에는 기업 경영이 어려워지면 정리해고를 할 수 있는 조항을 법제화하면서 동시에 재벌개혁과 실업대책 등을 시행하는 대타협을 이뤘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에는 일자리 나누기를 핵심으로 한 대타협을 도출하기도 했다. 어려울 때 고통을 분담하자는 쉽지 않은 합의를 만들어내며 자리를 지켜왔다.

청년들에게는 지금은 아이엠에프 구제금융이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만큼이나 어려운 시기다. 청년실업률은 경제위기 당시만큼 치솟아 있고 공무원시험을 넘어서는 진로선택지는 사라져가고 있다. 지금은 미래세대의 고통을 현재의 기성세대가 어떻게 분담할지를 고민해야 할 시기다. 고통분담이 필요할 때마다 등장했던 노사정 대타협의 적기이기도 하다.

이 토론장에 비정규직이나 중소기업 노동자가 제대로 대표되지 않았고, 미래 노동자인 청년들이 포함되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적은 이해관계자가 모인 토론장에서도 합의가 이뤄지지 않는데, 더 넓어진 토론장에서 대화와 타협이 이뤄지리라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일단 모인 이들끼리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여준 뒤에 더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구조로 확대하는 것이 맞는 순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대화의 장이 다시 열리면 좋겠다. 정부가 자신의 입장을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한다. 어른 노릇 할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

[ 한겨레 / 2015.4.21 / 이원재 희망제작소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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