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희망에 관한 몇 가지 성찰

희망제작소에서 ‘희망지수’에 관한 탐구를 개인과 사회라는 두 차원으로 나누어 수행한 연구결과를 매우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 연구는 한국사회가 이제 ‘희망’이라는 테마를 가지고 소통하는, 저 자신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문제공간’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습니다. 문제공간은, 그 안에서 다양한 목소리가 ‘무엇이 우리에게 지금 중요한 문제인가, 그리고 가능한 해결책인가’를 논하면서 각축하는 공통의 소통공간입니다. 소통의 핵심에는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고통)가 있습니다.

희망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시대란 어떤 시대인가, 그것은 미래라는 것의 의미가 묘연해진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미래의 자명성과 확실성, 그리고 현재 존재가 미래에도 당연히 그렇게 이어지리라는 암묵적 믿음에 균열이 생긴 시대가 아닐까 합니다. 바로 그런 시대에 우리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발산하는 묘한 힘과 슬픔, 그리고 용기 같은 것을 집합적으로 느끼는 것이 아닐까요? 민주화 이후에 우리가 열망을 말하고 또 욕망을 말해 왔다면, 그처럼 저돌적으로 목적과 대상을 향해 가는 ‘바람’이 아니라, 어떤 좌절과 실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마음의 힘으로서의 ‘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낙관에 가득 차 있던 확고한 미래의 시대가 지나가고, 이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 두려워진 재난과 재해의 시대에 우리는 희망의 가능성을 애타게 찾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다음의 세 가지의 명제로 그간 탐구해 온 바를 정돈해 보겠습니다.

첫째 명제는 ‘미래는 오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것이다’입니다. 우리는 흔히 미래를 현재 이후에 다가오는 미지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누구에게나, 언제나, 어떤 나라에서도, 어떤 존재들에게도 미래는 공평하게, 자동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다가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문화를 전공하는 사회학자로서 제가 파악하는 ‘미래’는, 모두에게 무차별적으로 다가오는 예정된 시간이 결코 아닙니다.

인간은 미래를, 미래가 오기 전에 이미 구축, 구성, 정립합니다. 그것은 국가, 조직, 사회, 가족, 개인과 같은 모든 사회단위의 매우 중요한 실천내용을 이룹니다. 미래를 구축하는 대표적인 방식이 바로 꿈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꿈꿉니다. 꿈속에서 미래는 형태를 갖추어 나타납니다. 미래를 불안하게 꿈꾸면서 미래에 대비하기도 하고(디스토피아), 미래를 장밋빛으로 그려내기도 합니다(유토피아).

꿈꾸는 존재야말로 인간 주체성의 가장 중요한 차원입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조사를 하다 보면, 인간이 얼마나 집요하고 처절하게 자신들의 미래를 상상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도무지 그럴 만한 이유도, 상황도, 자원도 없는 사람들마저 꿈에 몰두합니다. 때로 그것은 현실성 없는 환상에 불과합니다(복권당첨이나 일확천금).

그러나 꿈의 환상적 성격은 언제나 그것의 비전(vision)적 성격과 결합하여 있습니다. 개인만 꿈을 꾸는 것이 아닙니다. 그룹이나 조직, 그리고 국가도 꿈을 꿉니다. 그런 점에서 생산된 미래는 무형적 공공재입니다. 공공재이기 때문에 평등의 원리에 의해 분배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미래라는 공공적 자원의 혜택과 사용은, 미래와 의미연관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꿈의 능력)의 차등적 구성만큼 차별화되어 있습니다. 사회적 경계(계급, 젠더, 서울과 지방, 인종, 세대 등)의 맥락에서 미래에의 접근 가능성과 활용성은 큰 차이를 갖고 있습니다.

가령, 1970년대 한국 사회에서 미래란, 많은 사람이 도전적으로 달려들어서 원하는 만큼 가져갈 수 있는 무한한 금광 같은 것이었습니다. 집값은 오르고, 경제는 발전하고, 삶은 나아지고 있었습니다. 미래는 대량생산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사회에서 미래는 그처럼 풍요롭게 생산되지 못합니다. TV를 켜면 나오는 두 가지의 대표적 광고들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암보험과 대출광고입니다. 우리 시대의 한국인들에게 미래는 이제 광맥이 아니라 ‘빚’ 아니면 ‘암’입니다. 미래의 생산 능력은 이처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는 계급적 차이, 젠더적 차이, 그리고 세대적 차이와 지역적 차이를 갖습니다.

아무나 미래를 생산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많이, 누군가는 적게 생산합니다. 누군가는 질적으로 고양된 미래를, 누군가는 질적으로 참담한 미래를 생산합니다. 미래라는 공통 자원의 생산, 분배, 관리, 이것이 정치의 차원 높은 기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정치는 미래와 현재가 맺는 집단적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불평등과 부정의를 교정해야 합니다. 희망의 쏠림과 박탈을 조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미래는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명제는 ‘이처럼 미래를 생산하는 능력, 즉 꿈꿀 수 있는 능력은 일종의 자본(資本)이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최근에 여러 동료와 함께 수행하고 있는 연구는, 한국과 중국의 창의적 영역(문학, 예술, 웹툰, 방송, 인터넷 등)에 종사하고 있는 청년들이 자신들의 미래를 구성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측정해보려는 시도입니다. 꿈이라는 것이 심오한 현상이기 때문에 짧은 시간 동안에 몇 가지 설문에 대해 응답한 내용만으로 그것을 측정하려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간직한 채로, 그런데도 이런 시도가 사회과학 영역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이 아니기에 나름의 새로운 영역을 탐구한다는 의미에서, 저는 꿈의 능력을 다음과 같이 분석적으로 나누어 묻고 있습니다.

즉, 꿈의 능력은 심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희망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힘, 그렇게 꿈꾸어진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의미 있는 타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사회적 능력, 그리고 꿈으로 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여러 난관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회복탄력성(resilience)과 같은 요소들로 구성됩니다. 이들의 총합이 바로 꿈의 능력입니다. 아직 구체적 비교연구를 완수하지는 못했지만, 꿈의 능력이 한국과 중국의 청년들 사이에, 그리고 창의 영역에 종사하는 청년들과 그렇지 않은 청년들 사이에서, 젠더 사이에서, 서울과 지방 사이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 탐구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능력을, 현대사회과학이 ‘자본’으로 유형화하는 무언가의 하나로 개념화합니다. 즉, 꿈의 능력은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말하는 화폐(경제자본), 관계(사회자본), 교양(문화자본), 혹은 게리 베커(Gary Becker)가 말하는 인적자본과 유사한 그런 의미의 자본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을 꿈-자본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에 의하면, 사람들은 꿈-자본을 가지고 자신들의 존재역량을 증강해 나가고, 사회적 공간에서 활동하고, 경쟁하고, 목표를 추구합니다.

꿈-자본은 한 인간이 가장 내밀한 수준에서 품고 있는 미래상의 강도와 확신과 욕망의 총체입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양육 속에서, 종교적 체험 속에서, 자신의 운명에 대한 지식이나 근거 없는 믿음을 통해서, 선생님이나 선배, 또는 매스미디어의 스타들로부터, 아니면 조직이나 국가·사회가 만들어내는 이데올로기, 프로파간다, 캠페인 등으로부터 만들어지고 전파됩니다. 꿈-자본은 다른 자본의 축적을 위한 행위와 실천을 하게 만드는, 속담을 활용해서 말하자면, 말이 먹는 물이 아니라 말이 그 물을 먹고 싶다는 생각입니다. 꿈꾸는 힘은 깊은 심적 작용을 매개로 형성되기 때문에 손쉽게 상속되지도 않습니다.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합니다. 다만, 그것은 다른 형태의 자본들 이전에 존재하는 원형적인 자본이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꿈-자본이 존재하며,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한 사회가 평등한 사회를 지향한다면 부의 평등이나 기회의 평등 못지않은 꿈-자본의 평등도 사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사회가 양극화로 고통받는다면, 그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꿈의 양극화라는 것입니다. 한 사회가 풀어야 하는 문제 중에서 가장 심각한 것 중의 하나는 꿈-자본의 편중과 빈곤입니다.

셋째 명제는 ‘희망은 낙관이 아니라는 것’, 희망은 오히려 비관과 결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희망과 낙관주의를 구분한 사람은 크리스토프 래시라는 사회학자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진실하고 유일한 천국(The True and Only Heaven)>에서 서구의 진보 이념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미래의 진보에 대한 낙관주의와 신학적 희망을 구분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낙관주의 없는 희망’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절망적인 상태에 자신을 던질 수많은 이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품게 되는 희망이며, 비관적 전망 속에서 솟아나는 희망의 감정을 가리킵니다.

하벨 또한 희망과 낙관주의를 다음과 같이 구분합니다. ‘희망은 낙관주의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들이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희망은 무엇일까요? 하벨은 이렇게 씁니다. ‘나는 언제나 희망의 일차적 기원은, 간단히 말하자면, 형이상학적인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해왔다 (…) 초월적인 것(transcendental)의 경험 없이는 희망이나 인간적 책임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여기에는 기독교적인 색채, 종교적인 색채가 배어 있습니다. 객관적 조건이 아무리 어려워도, 어떤 일들이 발생해도,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희망입니다.

희망은 그리하여 낙관주의보다는 오히려 비관주의와 더 깊이 연관돼 있습니다. 희망이 일어나는 곳은 미래가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인 곳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절망이나 좌절이나 실망이 지배적인 곳입니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희망은 실망 가능해야(disappointable) 합니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 용어로 돌려 말하자면, 희망은 비관주의를 전제로 하며 그것을 뚫고 솟아나는 감정입니다. 이때의 비관은 인지적인 것이기도 하고, 구조나 세상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지적 비관을 뚫고 나오는 감정적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이란 이런 비관을 통과해서 나오는 감정입니다. 이런 점에 저는 희망의 신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존재가 미래를 생산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그가 꿈꾼다는 사실만큼이나, 그가 희망을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에서도 확증됩니다. 희망의 에너지로 꿈을 향해서 가는 존재가 인간 행위자입니다.

글 :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 이 글은 2016년 11월 21일 서울혁신파크 내 서울크리에이티브랩에서 개최된 ‘2016 시민희망지수’ 발표간담회 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 ☞ 자료집 다운받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