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사진제공:416 기억저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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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 김진혁 (전 EBS ‘지식채널e’ PD)

‘사랑하는 가족이 어느 날 갑자기 배와 함께 바다로 사라졌다면… 살이나 뼈가 아니라 머리카락 한 올만이라도 건지고 싶지 않을까? 그 한 올이라도 움켜줘야 일단 펑펑 울 수 있는, 헤어짐을 인정하고 슬퍼할 수 있는 자격이 된 것 같은 기분이지 않을까?

어차피 죽었는데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은 그 모든 슬픔을 지나고 추억을 되새기며 명복을 빌고 간혹 묘를 찾아갈 수 있는 필수적 단계들이 보장되는 일반적인 경우에나 내뱉어 볼 수 있는 푸념이다.

실종은 그냥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지금 당신 바로 옆에 있는 그 사람이. 그럴 경우 이별의 감정적 단계를 단 하나도 정상적으로 밟아 갈 수 없다. 계속 공황상태로 살게 된다.’

위 글은 최근 페이스북에 올린 짧은 글이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되어가지만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의 표정은 정확히 1년 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그분들이 1년 전 그 시점에서 전혀 이별의 단계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 나를 키워주셨던 할머니는 오랫동안 치매를 앓다 돌아가셨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오랜 기간이 있었기에 할머니와 조금씩 이별할 수 있기도 했다. 할머니가 건강하실 때 갑자기 할머니가 내 곁에서 사라지면 어떨까 혼자 상상하고 펑펑 울었던 기억이 무색하게, 막상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볼 땐 차분하게 할머니의 손을 잡아드릴 수 있었다.

세월호 유가족들, 특히 실종자 가족들의 경우 아마 여전히 공황상태일 것이다. 너무나 사랑하는 가족, 자식이 분명 곁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정할 수 있는 그래서 이별을 시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우리 사회가 마련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를 잊기 위해선, 그래서 이별을 시작하기 위해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은 불가항력이라고 판단될 때 우리는 비로소 ‘포기’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별법을 포함하여 인양 문제에 이르기까지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에겐 세월호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최선’이나 ‘불가항력’이라고 인정할만한 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그에 대한 배려를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혀 마련해 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책임자를 명확히 밝히고 그에 상응하는 처벌을 하는 것, 세월호를 인양해서 마지막 한 명까지 실종자를 차가운 바닷속에 두지 않으려는 노력은, 그분들이 스스로 최선을 다했다고 인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그제서야 그분들은 이별을 시작할 수가 있다.

그래서 정말 세월호 이야기가 지겹게 느껴진다면 그건 그분들 탓이 아니다. 그분들을 세월호에 붙잡아 두는 건 이별의 조건도 마련해 주지 않고 무조건 잊으라고만 하는 이들 탓이다. 그분들이야말로 그 누구보다 이별을 시작하고 싶고, 일상으로 돌아오고 싶지 않을까?

김진혁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는 EBS 지식채널e를 탄생시킨 PD입니다. ‘지식은 암기하는 정보’가 아니라 ‘생각하는 힘’이며, ‘마음을 움직이는 메시지’라는 신념으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습니다. 김 교수는 세월호 참사 후 대안을 찾는 캠페인 ‘노란테이블’에 참여해 다음과 같이 약속했습니다. “나는 합리적 의심을 멈추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권력으로부터 언론 독립을 요구합니다.”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큐 제작과 저서 집필, 강연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