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의 재난 대응, 눈물이 났다”

일본 희망제작소 안신숙 연구위원이 전하는 일본, 일본 시민사회, 일본 지역의 이야기. 대중 메체를 통해서는 접하기 힘든, 일본 사회를 움직이는 또 다른 힘에 대한 이야기를 일본 현지에서 생생하게 전해드립니다.


일본통신 ①   “일본 정부의 재난 대응, 눈물이 났다” 

동일본 대지진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아직 뚜렷한 해결 방안조차 찾지못한 채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린 이번 지진으로 지진보다는 쓰나미가, 쓰나미보다는 원전이라는 인간의 실책이 더 무섭다는 것을 여실히 경험하고 있다. 인간의 예측을 뛰어넘은 쓰나미는 그 어느 나라보다 철저하다는 일본의 재해대책시스템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점점 미궁에 빠져들고 있는 원전사고는 방사능 공포를 불러 일으키면서 일본적 사회 시스템과 가치에 회의를 안겨주고 있다.

이번 동일본 대지진으로 드러난 문제들은 분명 우리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일본통신 첫번째 기획으로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재난 대처 과정을 살펴보면서, 원전은 물론 지역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는 기회를 가지려한다. 이번 글에서는 토오노시에서 이와테현 산리크해안(三陸海岸) 지역 재해 주민 구조에 앞장서고 있는NPO법인 ‘토오노(遠野) 야마(山) ?사토(里) ? 크라시(暮らし) 네트워크’의 키쿠치 신이치 (菊池 新一)부회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다. 재해 복구 지원 과정에서의 지역 시민사회의 역할과 재해 지역의 미래에 대한 전망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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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쿠치 부회장을 만난 것은 아름다운재단이 일본 재해 주민들을 위해 모금한 기부금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토오노시(遠野市)는 그린투어리즘 사업으로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많이 알려진 곳으로 NPO법인 ‘토오노 야마(山)?사토(里)?크라시(暮らし) 네트워크’가 토오노시의 그린투어를 이끌고 있다. 아름다운재단의 모금이 시작된 후 제일 먼저 토오노시가 수혜지역으로 거론되었는데, 이곳이 이와테현 피난민 지원의 거점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지만, 몇 년전 그린투어리즘을 계기로 희망제작소와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터뷰를 하기 전 점심을 함께 하기 위해 도쿄의 식당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의자에 앉자 그는 몇년전 지식경제부 초청으로 한국에서 사회적기업 사례 발표를 한 적이 있었다며 말을 이어 갔다. 그의 말 속에서 토속성과 열정이 진하게 느껴져 왔다. 토오노 출신이냐고 묻자 “토오노에서 태어나 토오노 시청에서 30년 이상 근무했고, 정년을 3년 앞두고 퇴직해 지금의 단체에서 8년째 일하고 있다”면서 스스로를 ‘별난 공무원’이었다고 소개했다. 토오노시의 그린투어리즘에 대해 강한 호기심이 생겼지만 다음으로 미루고 사무실로 돌아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일본희망제작소 임원들과 교토 리츠메이칸 대학 교수 두 분이 함께 한 자리였다.

Q. 이와테현 연안지역 재해 대책에 있어 토오노시의 역할을 설명해달라

A. 토오노는 연안지방에서 자동차로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해 있다. 또한 모리오카시(盛岡市)등 현 내륙지방으로부터도 약 1시간 거리에 위치한 분지다. 그래서 현의 도로가 토오노를 중심으로 발달되어 있고, 예로부터 내륙과 연안 사이 교역의 중심지였으며, 정보가 집결되는 곳이었다. 
 
이런 지리적 위치 때문에 이번 지진이 일어나기 전부터 연안지방이 쓰나미 피해를 입을 경우 토오노를 후방지원기지로 한다는 것이 정부와 현 그리고 시당국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자위대와 경찰, 소방서등도 이에 대비해 몇 차례 방재 훈련을 했고, 피난민을 어디에 받아들일 것인가 등 재해 대책을 세워왔다.

Q. 지진 발생 후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가

A. 민간인으로서 우리가 할 일은 우선 전국에 정보를 전파하는 일이었다. 3월11일 지진이 발생하자 연안의 많은 주민들이 쓰나미를 피해 피난왔으며 체육관 등에 피난소가 만들어졌다. 정신없이 상황을 수습하면서 인터넷과 그동안 확보해온 메일 리스트를 이용해 전국 시민사회 네트워크에 구호를 요청했다. 15일부터 정보를 발신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계속 신속하게 연락을 취하고 있다. 덕분에 일본NPO센터로부터 아름다운재단의 모금 이야기도 전해 듣고 일본희망제작소와 만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시당국과 지원에 나선 민간인들은 개별적으로 대처하는 데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원활동을 하는 토오노시의 모든 단체와 개인들이 공동 대처를 위해 3월28일 「토오노 마고코로(?心)네트」라는 조직을 결성했다. 여기엔 우리와 같은 민간단체, 기업, 그리고 시의 사회복지협의회도 들어와 있다. 일반적으로 시민 단체와 시의 사회복지협의회는 서로 각을 세우는 경향이 많은데, 토오노의 경우는 이전부터 별로 거리가 없었고, 긴박하게 대처해 나가야 했기 때문에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그래서 시당국과 민간단체가 서로 협력하고 보완하면서 각자의 역할을 해 올 수 있었다.

우린 재해 주민들에게 긴급하게 필요한 물자가 무엇인지 파악해 시민사회 네트워크에 구호물품을 요청했다. 당시 가장 시급했던 것은 아기들 분유였다. 어른들은 어떻게든 참을 수 있지만 아기들은 분유가 없으면 당장 생명이 위험해지니까. 그 결과, 4월10일까지 200여 개 시민 단체에서 대량의 물자를 보내왔다. 시는 시대로 필요한 물자를 모으고 있었다. 이렇게 도착한 물자를 시와 민간이 실내 체육관에 함께 모아 부족한 것은 서로 나눠주면서 각자 피난민들에게 전달해갔다.

대부분의 피난민들이 몸만 빠져 나온 상태여서 모든 생필품이 필요했지만, 운반할 수 있는 여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린 먼저 식량과 물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정부가 파견한 자위대가 도로를 정비해 길을 확보해 주었고, 이는 비교적 신속하게 이루어졌었다. 처음엔 토오노에 있는 피난소에만 구호물품을 공급했었는데, 루트가 확보돼 연안지역의 각 도시와 촌락에 설치된 피난소까지 물품을 공급해 나갔다. 그래서 다행히 피난민들이 오랜 굶주림에 시달려야 하는 심각한 사태는 피할 수 있었다.

  피난소가 아닌 민가에 피난해 있는 사람들도 문제였다. 평소에2~3명이 살고 있었던 집에 부모나 친척들이 피난와 20~30명이 모여 사는 곳도 있었다. 어느 집이나 평상시 다량의 식량을 비축해 두진 않기 때문에 민가라 해도 먹을 것이 없어 곤란하긴 마찬가지였다. 시민들로부터 정보가 들어오면 게릴라식으로 대응해 그런 민가에도 식량을 전달해 줬다.

Q. 초기 구호 물자 공급시 가장 곤란했던 점은 무엇인가

A. 행정 당국은 물자를 공평하고 일률적으로 배급한다. 그러나 실제로 각 가정이나 피난소 별로 필요로 하는 물품이 다르다. 불필요한 물품이 배달돼 그대로 쌓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없어서 발만 동동 구르는 물품도 있다. 당국은 또 집에 있는 사람들이 피난소까지 물건을 받으러 오게끔 한다. 그런데 집에 피난해 있는 사람들은 피난소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선 뜻 물건을 받으러 오지 못한다. 자신들은 형편이 낫다는 생각에 참는 거다.  남들을 생각해 참고 견디는게 동북 사람들의 특유한 정서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난소에는 물건이 쌓이는데, 집에 있는 사람들은 물자가 없어 생활에 심각하게 곤란을 겪는 경우도 많이 발생했다.
 
그래서 토오노에서는 바자회 방식을 생각해 냈다. 체육관에 각 물품별로 코너를 설치하고 필요한 물건을 가져가도록 한 것이다. 처음엔 토오노시에 피난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시작했는데, 도로 사정이 좋아지자 인근 재해 지역 주민들도 물자를 구하러 오기 시작했다. 멀리서는 미야기현에서까지 찾아 왔다. 일요일에는 하루400여명이 오기도 하며, 보통1시간 이상 줄 서서 기다리는 일도 있다. 스텝도 하루에 20~40명이 필요하다. 갈수록 더 바빠지고 있다.
             
Q. 현재의 지원 상황은 어떠한가

A. 현재 ‘토오노마고코로네트’로 조직을 정비해, 오오쯔치쵸(大槌町)와 리크젠타카다시(陸前高 田市)주민들을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인구 2만 4천 명의 리크젠타카다시에서 약2천 명 이 사망했고 만 6천 명 정도가 피난 생활을 하고 있다. 인구 만 6천 명의 오오쯔치쵸도 약4천 명의 사망자와 약 9천 5백 명의 피난자가 발생했다. 시청사도 무너져 모든 행정기능이 마비돼 버렸다. 오오후나토시(大船渡市)와 카마이시시(釜石市)는 지금까지 함께 지원해 왔지만 피난자가 주민의 약 10% 정도이고 행정조직도 어느정도 건재해 자력으로 할 수 있다고 판단해 조금씩 지원을 줄여 왔다. 피해가 심각한 곳을 생각하면 이런 곳들은 자력으로 복구하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역시 가장 큰 일은 식량과 생필품을 조달해 원할하게 공급하는 일이다. 지금 현지에는 야채와 고기 등 신선 식품이 몹시 부족하다. 아직 많은 피난소와 주민들이 인스턴트 식품등 공산품에 의존하고 있다. 각지에서 야채 등을 확보해 각 피난소와 가정에 직접 전달해 주고 있다. 또, 오랜 피난소 생활로 지쳐있는 주민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입욕 서비스도 실시하고 있다. 쓰나미가 남기고 간 잔해물을 제거하고, 주민들을 정신적으로 케어하는 일 또한 많은 노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타 지역에서 오는 자원활동가들을 맞이해 적재적소에 연결하는 것도 중요한 일 중 하나다. 이번 연휴에는 하루 600명 ~ 800명 정도가 왔다. 식사는 스스로 해결하도록 하고 있지만, 숙박시설은 시에서 제공하면서 리크젠타카다와 오오쯔치 등 재해지역으로 배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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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앞으로의 지원 계획이 궁금하다

A. 우선 물자 공급과 배송 사업을 계속해나갈 예정이다. 이미 오오쯔치와 카마이시를 묶어서 2팀, 오오후나토와 리크젠타카다를 묶어서 2팀의 전담팀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엔 우리가 직접 배송했으나, 앞으론 지진으로 생업을 잃어버린 지역 주민들을 고용해 나가려고 한다. 쓰나미는 가족과 집뿐만 아니라 일터도 모두 뺏아갔다. 일자리를 잃은 주민에게 일을 주자는 취지로 오오쯔치에서 두부집을 하던 사람을 고용했더니, 주민들이 “ 당신 아직 살아 있었네” 라며 말을 꺼내기 시작하더니 우리에게는 말하기 힘들었던 애로사항을 편하게 호소했다.  주민들의 수요를 파악하는 데 훨씬 효과적이었다. 그래서 총8 명중 4명으로 주민 고용자 수를 더 늘렸다.

두 번째로 피난자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서비스도 계속해 나갈 생각이다. 민가의 피난자들은 정신적으로 비교적 안정돼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비전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피난소에 있는 주민들은 오랜 피난소 생활로 의욕을 잃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쳐 있다.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그래서 잠시나마 그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시의 휴양시설에 가서 온천으로 몸을 녹이고 피난소에서는 좀처럼 먹기 힘든 따뜻한 음식을 먹고 2시간 정도 쉬고 올 수 있게 하고 있다. 공공시설을 이용할 수 없는 휴일에는 그동안 그린투어를 실시하면서 조직된 520여 농가에 부탁해 한 집에 4명씩 민박을 시킨다. 공공시설보다는 농가나 가정에서의 민박이 훨씬 인기가 좋다. 혼자 입욕도 할 수 있고 생선구이 등의 가정식을 오랫만에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사업의 하나로 지금 원전사고로 판로를 잃어버린 후쿠시마 야채를 구입해 재해지역 주민에게 공급하는 프로잭트를 시작했다. 이 사업은 그동안 그린투어리즘을 통해 연계해 왔던 아이즈반게쬬(?津坂下町)와 함께 할 생각이다. 물론 방사선 안전 검사를 철저히 실시한 다음 가정에서 사용하기 쉽게 소량으로 포장해 이동 판매하거나 ‘토오노 시장’을 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가설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하면 커뮤니티비즈니스를 조직하는 일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른다. 재난을 당한 주민들은 집과 함께 일자리도 잃고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며. 결국 재기의 의욕도 잃어버리게 된다. 과거 한신대지진 이후 고베의 가설 주택에서 250명 이나 고독사하지 않았나? 이를 막기 위해선 커뮤니티비지니스로 주민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동시에 커뮤니케이션의 장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지금 생각하고 있는 사업은 전문 디자이너의 지원을 받아 생업을 잃어 버린 피난자들로 하여금 ‘마께나이죠(결코 지지 않는다는 의미)’ 티셔츠와 각종 니트 제품을 만들게 해 유통업체에 위탁 판매하는 사업이다.

이미 타카시마야 백화점하고는 이야기가 되고 있다. 지역에서 꾸준히 커뮤니티비즈니스를 추진해왔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이렇게 만든 제품들을 도쿄 등의 도시로 공급하면서 ‘재해를 잊고 싶어 하지않는 도시민’과 ‘잠시라도 재해를 잊고 싶은 재해 지역 주민’간의 의미있는 교류의 계기를 만들어 가고 싶다.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시민펀드’를 구성하려 하며, 아름다운재단을 통해 모금한 한국 시민들의 기부금도 이 펀드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길 바란다.

Q. 재난 발생 이후 토오노시가 후방 기지로서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는 어떤 점을 꼽을 수 있을까

A. 나는 토오노의 농가에서 자라 고교 졸업 후 1971년 시청에 입사했다. 입사 면접시 ‘토오노시가 좋아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사람’ 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그 의미를 깊이 이해하고 한 얘기는 아니었는데, 비루한 실력에도 합격한 것을 보면 이 말이 매우 인상적이었던가 보다. 입사 후 10년간 사회교육 업무에 종사해 왔다. 당시 토오노시는 사회 교육에 힘을 쏟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보건부서와 사회교육부서를 주민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시민센터와 지구센터에 두었고, 흔히 한직으로 인식되는 시민센터와 지구센터에 최고의 엘리트 직원을 파견했다.

당시는 이미 고도성장으로 농촌과 지역 커뮤니티가 붕괴되고 있던 때였는데, 토오노시의 교육 중시 정책이 곧 ‘사람 만들기’로 이어졌고, 지역의 각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 사이에 횡적인 연계가 일상적으로 형성되는 계기가 됐다. ‘토오노 마고코로네트’에 있는 사회복지협의회, NPO 관계자, 기업인 등도 모두 당시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러한 끈끈한 연계가 이번 지진 대응 과정에서도 강한 힘을 발휘한 것이다. 이 점이 토오노시가 다른 지역과 다른 점이다.
   

Q. 지원하고 있는 지역들과는 이전부터 연계가 있었는가

A. 시당국간에 특별한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 단체는 드라이빙 스쿨을 운영하면서 리크젠타카다시의 드라이빙 스쿨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또 아내가 토오노 어머니 배구클럽에서 활동하는데, 이 단체는 각 시의 배구클럽과 연계되어 있다. 이번에 큰 힘을 발휘한 것은 바로 이런 시민간의 연계였다. 메일로 정보를 보내면 각 지역 주민들에게 즉각적으로 전해졌다.

Q. 재해복구 과정에서 정부나 현의 대응을 평가한다면

A. 정부의 대응에 관해서는 쉽게 얘기할 수 없다. 현 당국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이번 대책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장벽으로 작용했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였다. 일례로 오오쯔치의 경우 청사를 포함해 공공시설이 모두 쓰나미에 쓸려갔고, 청장을 비롯해 청사 공무원들도 반 이상 사망 또는 행방불명돼 행정기능이 마비되었다. 높은 지대에 위치한 구민센터가 유일하게 남아 피난소가 설치됐는데, 지금 그곳 피난민들은 몇개월간 주먹밥 밖에 못 먹고 있다.

현 당국이 공공장소에서 불을 사용하는 건 위법이라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매일 1000개의 주먹밥을 만들어 가져다주는 사람들은 토오노의 자원활동가들이다. 그런데 현 당국은 계속 ‘이건 안된다, 이것도 안된다’는 평상시 규제 일변도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주민들이 폭발 일보 직전이다. 사실인지 모르겠지만, 사태가 발생하고 주변의 각 시청 직원들은 철야로 동분서주하는데, 현 직원들은 모두 평상시처럼 퇴근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난 원래 현이라는 행정 기능은 필요없으며 중앙정부와 시 ? 정 ? 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이번 일로 다시 한번 확신하게 됐다.

Q. 지역과 커뮤니티 재건을 어떻게 전망하고 있나

A. 지금 가설 주택이 조금씩 세워져 입주가 시작되고 있다. 우린 지역 커뮤니티, 즉 마을 단위로 추첨해 입주자를 선정할 것을 기대했지만, 리크젠타카다시는 결국 개별 가족 단위로 추첨했다. 한신 대지진 때 개별 단위로 추첨해 입주시킨 결과 커뮤니티가 붕괴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고독사했다. 결국 3년, 5년 뒤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고, 가장 손쉬운 개별 추첨을 선택한 것이다. 자원활동가들이 이사를 도와주려 했지만 지금 당첨된 주민들은 피난소에서 같이 생활하던 사람들을 의식해 열쇠를 받으러 오는 것도, 이사하는 것도 꺼리고 있다. 또 떨어진 사람들은 혹시라도 이후 추첨 기회를 놓칠까 싶어 피난소에서 자리를 비우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이런 현장 사정을 잘 안다면, 입주 시기는 다를지라도 희망자는 전원 가설 주택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보장을 피난자들에게 해줘야 한다. 그리고 50~100명의 마을 단위로 추첨해 입주하게 해야한다. 커뮤니티 구성원들이 같은 가설 주택에서 생활해야 앞으로 마을로 돌아갔을 때의 대책을 서로 공유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재건의 힘이 될 것이다.

리크젠타카다시에 비해 상대적으로 피해가 적은 미야코시(宮古市)는 커뮤니티 단위로 입주를 시작하고 있다. 그런데 미야코와 비숫한 정도의 피해를 입은 카마이시는 복구와 재건에 임하는 자세가 또 다르다. 카마이시는 평소 재해대책을 진지하게 고민해 왔던 자치단체였음에 비해 오랜 기간 신일본철강이라는 대기업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제철소 폐쇄와 함께 쇠락해 온 카마이시는 주민들이 기업 연금 혜택 등으로 다른 곳 보다 유복한 반면 커뮤니티의 결속력이 약하고 복구에 대한 의욕이 없다. 이는 재건에 큰 걸림돌로 작용할 것 같다. 이처럼 자치단체별로 처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우선 정부가 믿음을 줘야 사람들이 커뮤니티 단위 입주를 안심하고 기다릴 수 있으며, 이는 향후 지역 재건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Q. 재해 지역에 어떤 미래를 설계할 수 있을까

A. 리크젠타카다시를 예를 들어 보자. 만 6천 명이 재해 피해를 입었으며 쓰나미가 거의 모든 것을 쓸어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는 역설적으로 말해 새로운 기회가 될 수 있다. 주민들은 가설 주택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앞으로 어떤 마을을 만들어야 할 것인가, 사람은 원래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함께 고민하며 꿈을 나눌 수 있다. 그들은 각자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이상적인 마을 만들기를 제안해 갈 것이며, 50년, 100년 후 세계는 일본 동북지방을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러려면 기존 커뮤니티 단위로 가설 주택에 입주할 수 있어야 하고, 그 안에 주민들이 수시로 모여 이야기할 수 있는 공동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미래에 이루고 싶은 참공동체의 맹아가 가설 주택에서부터 실험될 수 있지 않겠는가. 어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은 굴 양식을 보다 협력해서 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 낼 것이며, 상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은 보다 이웃과 협력하는 방식으로 가설주택 내에 상점을 시작할 것이다. 또한 공무원, 학자, 전문가들이 이 곳에 와서 함께 이야기하며 꿈을 설계해 나갈 것이다.

Q. 지역 주민들의 고령화가 재건에 문제가 되지는 않을까

A. 흔히 농촌과 지역의 고령화 현상을 문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고령화 사회란 모두가 장수하는 사회를 말하는 것 아닌가. 이는 진정 우리가 추구하는 사회가 아닌가. 그것이 왜 문제라는 건가. 영국의 한 시인은 ‘ 농촌은 위대한 신이 만들었고, 도시는 어리석은 인간의 지혜가 만들었다’고 했다. 도시에서는 60세가 되면 퇴직하고, 65세가 되면 연금생활자, 70세가 되면 후기 고령자가 되지만, 농촌에서는 평생 현역으로 생활한다. 우리 아버지도 101세에 돌아가셨는데, 100세까지 일을 하셨다.

농촌에서 고령자는 복지 대상이 아니라 산업과 문화를 지키는 자원이다. 좌시키와라시도 그들이 가장 잘 알며 농악도 그들이 가장 훌륭하게 연주한다. 고령자를 그저 복지의 대상으로만 생각해선 안된다. 그들이 일하고 생활하기에 좋은 사회가 바로 우리가 꿈꾸는 사회인 것이다. 즉 ‘복지마을 만들기’ 가 아닌 ‘복지로 마을만들기’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점에 중점을 두고 지혜를 낸다면 고령화 사회는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나의 평소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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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안신숙 일본희망제작소 연구위원 (westwood@makehop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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