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관클럽

지난해 12월 대선을 앞둔 어느 날, 70대 노신사가 텔레비전을 통해 야당 대선후보 찬조연설을 했다. 쉬운 언어로 우리 사회의 보편적 가치들을 담담히 이야기한 그의 연설은 지상파 방송은 물론이고 인터넷과 SNS를 타고 널리 퍼져 나갔으며 유투브 조회수 60만을 훌쩍 넘겼다. 그의 담백하고 명쾌한 메시지는 진보와 보수, 세대와 세대를 넘어 한국사회 전체에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그는 바로 최근 인기 팟캐스트 진행자로 화제를 모으고 있는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를 ‘보수의 브레인’, ‘범보수의 제갈량’, ‘한나라당의 전략통’으로 불렀다. 그의 삶의 궤적을 보면 그런 수사들이 이해가 간다. 그는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박정희 정권 때 정계에 입문해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청와대 공보수석과 환경부장관을 지냈고 이후에는 옛 한나라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소장을 맡는 등 보수정당의 핵심 브레인으로 활동해 왔다. 탁월한 정치 감각과 정세분석 능력을 갖춘 지략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 시절에도 그는 한나라당의 선거 기획과 관련한 주요 직책을 맡으며 진보개혁 진영과 줄곧 대척점에 섰다. 그런 그가 지난해엔 야당 대선후보 지지를 요청하는 연설을 했다. 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회자될 장면일 것이다.

지난 5일 그가 희망제작소의 <2013목민관학교> 제5기 입학식 직후 첫 특강을 맡았다. 많은 사람들의 기대 속에 진행된 이날 강연에서 그는 국가와 리더십,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려운 말과 단어로 포장하지 않고 그가 자신의 정치인생에서 배우고 느낀 그대로를 쉽게 풀어 들려주었다. 명쾌하고 담담하게. 지난해 TV 연설처럼 말이다.

”사용자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란 공공성이 제도화된 것”

그는 국가에 대해 이렇게 한마디로 정의했다. 국가는 개인이나 특정 계층을 위한 권력과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이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울림이 있었다. 그렇다면 공공성은 무엇일까? 사실 공공성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공공성’이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쓰이지만 그 개념이 정리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의 정태인 소장은 공공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한 바 있다.

“공공성이란 공동의 가치 혹은 공익이라는 목표가 있고, 공공이성이 공론의 장에서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를 종합해서 정리해보면 국가는 공동의 가치를 위해 공공이성이 공론의 장에서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제도화한 것이라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윤 전 장관은 좀 더 진화한 국가를 이야기했다. 바로 근대국가다.

“근대국가는 공공성을 지키기 위한 합법적 폭력을 독점한 국가를 의미한다.”

근대국가에 대한 이론과 연구는 많다. 어떤 이는 남의 아픔과 불행을 내 것처럼 아파하는 ‘공감’이 조직화?제도화한 것이라고 했고, 또 다른 이는 그 사회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과 가장 불행한 사람의 차이가 크지 않은 국가, 혹은 그렇게 되기 위한 시스템을 갖춘 국가를 근대국가라 했다. 윤 전 장관은 공공성을 위한 합법적 폭력을 독점한 국가라고 했다. 보수주의자의 색이 묻어난다. 하지만 보편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 거부감이 없다.

“신자유주의가 지난 십수년 동안 세계를 관통하면서 자본이 정치권력을 압도하고 이제는 국가권력까지 압도하려 하고 있다. 자본이 국가권력이 된다면 소수를 위한 국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는 이미 자본이 정치권력을 잠식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향후 자본이 국가권력을 잠식하는 상황을 우려했다. 자본이 국가권력을 가진다면 국가는 소수의 특정 계층만을 위해 존재하는 시스템이 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그는 이 점에 대해 우려했고 이러한 상황을 막기 위해서 국가 리더십, 즉 대통령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 시대 필요한 리더십은 무엇인가?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해 긴 시간을 할애해서 이야기했다. 그는 대통령을 이렇게 정의했다.

“대통령은 수직적 1인자가 아니라 수평적 1인자이다. 의사결정을 하는 최고 단위가 아니라 집단의사를 결정하는 과정을 관리하는 최고책임자다.”

그의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다수 한국 대통령들이 하나같이 제왕적 스타일로 국정을 운영해온 것을 감안한다면 이제는 새로운 모습의 대통령 리더십이 필요할 것 같다.

그는 대통령에게 창업(創業)과 수성(守城)의 두 가지 자질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각각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이겨내는 자질과 대통령이 되고난 이후 국정을 바르게 이끌고 가는 자질을 말한다. 그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대통령이 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고 했다. 국가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의 자리와 권한은 오로지 정책 구현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대통령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은 시대를 직시하고 올바른 시대 과제를 제시하는 능력이라고 했다. 시대정신을 읽어내고 시대를 바라보는 통찰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5년간의 국정철학이 나오고 정책이 나온다. 그는 또 정책을 만드는 능력과 실행하는 능력은 전혀 별개라고 했다. 진보개혁진영에서 국민의정부, 참여정부 10년 동안 국정을 운영했지만 성공한 정부라고 평가받지 못한 지점이 여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시대 과제를 제대로 짚어내고 선한 의지로 좋은 정책을 만들었으나 이를 실행하는 능력은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갑작스레 <헌법> 1조 1항과 2항에 대해 물었다.

“헌법 1조 1항이 무엇인지 아세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헌법 1조 1항이고 2항입니다.”

대통령은 국가의 정체성을 잘 알고 있어야 하는데 국가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것이 바로 헌법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민주공화국’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민주공화국은 주권이 국민 전체에 있는 국가를 말한다. 주권이 귀족에 있는 귀족공화국, 주권이 한 계급에 있는 계급공화국 등과 다르다. 즉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국민이 선출한 대표자가 국민의 권리와 이익을 위하여 국정을 운영하며, 국가의 원수가 그 명칭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의 직접 또는 간접선거에 의하여 선출되며 일정한 임기를 마치면 교체하는 국가를 말한다. 우리의 역대 대통령들과 정치인들이 이 개념을 몰랐다는 끔찍한 상상을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그들과 함께한 시간을 반추해보면 과연 그들의 앎이 실제 정치에 반영되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사용자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과거 어느 대통령이 공무원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 사업은 내가 긴 시간동안 고민하고 선택했기 때문에 더 이상 논의의 대상이 아니라고. 이는 대단히 무서운 발상이다.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상황이 발생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 어떤 것도 논쟁할 수 있다. 오히려 논쟁은 잘못된 선택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이 민주주의다.”

그의 민주주의에 대한 내용은 명확하고 단순했다. 그는 우리나라에 민주화 지도자는 있었어도 민주적 지도자는 없었다고 했다. 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날카로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은 권력의 중심이다. 권력의 보편적 속성은 집중과 연장이다. 이를 통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민주주의 시스템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지키지 않으면 권력은 비대해지고 어느 순간 불멸을 꿈꾸게 된다.”

국가권력은 통제되지 않으면 괴물이 될 수 있다. 이는 역사의 교훈이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이 괴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시스템이 된다. 그는 이것을 설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다음의 말로 민주주의를 정의했다.

“민주주의는 효율성과 생산성을 최대 가치로 삼는 시스템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과정이다. 민주주의가 때로는 과정의 낭비처럼 비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거쳐야 결과가 제대로 나온다. 이것은 역사가 가르쳐준 진리다.”

유럽의 경우 짧게는 300년 길게는 400년의 민주주의를 위한 긴 역사적 과정이 있었다.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는 그에 비하면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다. 한국전쟁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경제를 비롯해 문화, 정치 등 사회 전반에서 ‘압축성장’을 해온 우리나라를 유럽과 미국의 민주주의 성숙도와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의 시간으로 최소한의 사회적 비용을 들여 민주주의를 성숙하게 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희망인 점은 분명하다. 하나 더 그는 경제는 압축성장이 가능하지만 정치는 압축성장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비용을 치르면서 점진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어릴 적 기억에 어른들이 종종 이런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있다.

“민주주의가 밥을 주냐? 콩을 주냐?”

아마도 TV에서 대학생 집회 소식을 접했던 동네 어른들께서 하신 말씀이었던 것 같다. 나에게는 그 말이 이상하게도 오랫동안 머리속에 남았다. 학교에서 역사와 사회학을 배우고도 동네 어르신들의 푸념 섞인 질문에 쉽게 답변할 수 있는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윤 전 장관은 이 모든 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해주었다.

“민주주의는 밥을 지어 주지 않는다. 하지만 밥그릇의 크기를 결정한다.”

그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목민관학교> 첫 특강을 마무리했다. 그의 강연이 끝나자 큰 박수가 나왔다. 풍부한 국정경험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분석 능력과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으면서 핵심을 파고드는 합리성은 그의 강연 내내 빛을 발했다.

그는 강연 도중 여러 차례 공공성에 대해 강조했다. 대통령이든 기초 혹은 광역자치단체장이든 공공성에 대해 명확한 이해와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수강생들은 첫날부터 가슴이 묵직했을 것이다. 국가, 국가리더십,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가 무척이나 커 보이는 반면, 자신은 아주 작아 보였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자신이 과연 이를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이 되는지 반문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목민관학교> 첫 날 수업은 대성공이다. 국가의 역할, 리더의 자질, 민주주의의 의미를 되새겨보고 자신을 스스로 성찰하는 것. 이것보다 의미 있는 시작이 있을까?

<목민관학교>, 이제 시작이다.

글_ 정승철 (기획홍보실 연구원 sc7279@makehop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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