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좋은 일, 공정한 노동]
②진로라는 게 뭘까요? 노력하면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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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이면 힘들어도 할 수 있어요.”
“스튜어디스가 되고 싶었어요. 여러 나라를 여행하는 게 즐거울 것 같아서요.”
“캠핑을 갔는데 제가 해준 음식을 다들 맛있게 먹었어요. 그때부터 요리사가 되고 싶었어요.”
“운동선수가 하고 싶은데 엄마가 미쳤냐고 하세요. 돈 잘 벌기 어렵다고요.”

‘일’, ‘진로’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는 시기는 언제일까? 사회에 나가기 전, 혹은 전공을 선택해야 할 때일까? 유아 때부터 청소년기까지 어른들에게 줄기차게 듣는 질문이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는 것인데, 그때 내놓았던 답은 ‘진로’에 대한 고민과는 다른 것일까?

2015년 말 ‘진로교육법’이 제정된 이후로 최근 초중고교생뿐 아니라 대학생, 학부모에게까지 ‘진로교육’이 확대되고 있다. 그동안 중고교에만 있었던 진로전담교사가 올해부터는 초등학교에도 배치된다. 각 교육청들은 학생들을 보낼만한 ‘진로교육처’를 찾느라 분주하다고 한다.

그런데 진로라는 것이 그렇게 하면 찾아지는 것인지는 돌아볼 필요가 있다. 만일 학생들 대다수가 원하는 직업이 우리 사회 전체 직업의 1%도 안 된다면? 혹은 학생들이 원하는 직업이 실제로는 최저임금도 못 받는 불안정한 직업이라면? 그런 경우 학생들을 어디로 보내서 무엇을 탐방하게 할 수 있을까?

‘좋은 삶’ 기준으로 ‘좋은 일’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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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제작소는 2015년 말부터 ‘좋은 일, 공정한 노동’ 기획연구를 진행해 왔다. 우리 사회에 ‘좋은 일’에 대한 명확한 상(像)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고, 이 상을 찾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일과 좋은 삶에 대해 더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근거한 연구다.

좋은 일의 현장탐방과 인터뷰, 온라인 설문조사, 전문가 인터뷰 등으로 구성됐던 1차 연구에 이어서 2016년 7~12월 사이에는 ‘좋은 일 기준 찾기 릴레이 워크숍-나의 일 이야기’가 2차 연구로 진행된다.

지난 7월 30일 오후 희망제작소에서는 그 시작인 ‘청소년 워크숍’과 ‘학부모 워크숍’이 동시에 진행됐다. 워크숍은 일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나누는 그룹 대화와 새로운 일과 노동권에 대한 강의로 진행되었다. 먼저 청소년 워크숍의 그룹 대화 현장을 전한다.

청소년 워크숍에는 만 13~19세 청소년 30명이 참석했다. 희망제작소 4층 희망모울(강당)에 마련된 6개의 테이블에 비슷한 또래끼리 둘러앉았다. 희망제작소가 개발한 토론툴킷인 ‘노란테이블’을 활용하되 이 워크숍에 맞도록 새로 고안된 방법론에 의해서 그룹 대화가 진행됐다. 여섯 개의 질문이 담긴 워크시트와 이에 대답하기 쉽도록 선택지를 제시한 스티커가 배부됐다.

첫 번째 질문은 “어린 시절(10세 전후)의 장래희망은?”이었다. 동시에 그때 어떤 이유로 그 일을 희망했는지를 생각해보도록 했다. 현실적인 판단이나 타협이 작용하기 전의 꿈속에 들어 있던 ‘좋은 일’의 요건을 돌아보려 한 것이다.

참가자들이 답한 어린 시절 장래희망들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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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일이 하고 싶다”

어린 시절 장래희망으로 꼽은 일을 하고 싶었던 이유를 3개씩 꼽아보게 했을 때 가장 많이 나온 답은 ‘재미있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전체 응답 중에서 20%를 차지했다. 그 다음이 ‘보람 있는 일’(15.3%)이었다.

“경찰이 되고 싶었는데 사람들 도와줄 수 있고, 보람도 있고, 무엇보다 도둑 잡는 게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영화나 드라마 보면 소방관이 출동할 때 봉을 타고 내려오는데, 재미있어 보여서 하고 싶었어요.”

그밖에도 카레이서, 비행기 조종사, 스튜어디스, 주얼리 디자이너 등 다양한 직업을 택한 이유들이 공통적으로 ‘재미있을 것 같아서’였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적성에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는 응답도 많았고, 선생님, 요리사가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이어서 하고 싶었다는 청소년도 있었다. 꿈이 없었다거나 너무 많아서 답하기 어렵다는 경우도, ‘텔레토비’나 ‘유희왕’처럼 어린이다운 꿈을 꿨다는 참가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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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질문은 두 번째 질문과 연결된다. “그 장래희망을 이뤘다면 어떤 일상을 살게 될까?”라는 질문이다. 35살쯤의 하루, 주말을 앞둔 저녁 8시쯤을 상상해 보자고 제안했는데, 그 이유는 보통 장래희망을 생각할 때 특정한 직업의 이미지만 떠올리지 그 일을 하면서 살게 될 자신의 삶까지 생각해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10개의 선택지 중에서 참가자들은 ‘바쁘고 성취감 있는 하루’(17.1%)도 많이 꼽았지만 ‘퇴근 후 음악‧운동 등 취미 생활’(22%), ‘가족들과 충분한 시간’(19.5%), ‘충분한 휴식’(17.1%) 등 시간적 여유와 밀접한 답을 주로 골랐다. 그러자 장래희망으로 꼽은 직업과 희망하는 삶의 불일치가 여기저기서 발견됐다.

“사업을 해서 사장이 되는 게 꿈인데, 일찍 퇴근해서 아이들하고 축구, 야구를 하고 싶어요.”
“사업을 책임져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있을까요?”
“좋은 직원을 뽑으면 되지 않을까요?

“형사가 꿈이라고 했는데, 퇴근 후 취미생활을 정기적으로 할 수 있을까요?”
“긴급 출동할 일이 많으니까 아무래도 안 되겠네요.”

“유일하게 잘하는 일이니까 할래요”

세 번째 질문부터는 현재 시점으로 돌아와서 ‘지금 희망하는 진로’를 물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앞서 어린 시절에 생각한 이유와 달라졌는지 생각하면서 골라보도록 했다. 참가자들이 말한 현재 원하는 직업들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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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도 ‘재미있는 일’(14.6%)이라는 응답이 여전히 많은 편이었지만 어린 시절에 재미를 우선으로 꼽았던 비율(20%)보다는 줄었다. ‘적성에 맞는 일’(19.1%), ‘보람 있는 일’(16.9%), ‘내가 잘할 수 있는 일’(14.6%)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장래희망이 어린 시절 ‘주얼리 디자이너’에서 현재 ‘법률가’로 바뀌었다는 참가자는 그 일을 원하는 이유에서 ‘재미있는 일’을 빼고 ‘사회적 기여와 인정’을 넣었다. ‘카레이서’가 꿈이었던 참가자는 현재 장래희망은 ‘없다’고 답했다. 왜 카레이서를 포기했느냐고 묻자 “그건 어릴 때 꿈이었으니까요”라고 답했다.

‘배드민턴 선수’라고 답한 참가자는 “내가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니까”라고 했다. 3년 정도 ‘건축가’를 꿈꿨다는 참가자는 “아버지께서 사회통념상 여자가 하기 힘든 일이라며 반대하신다”면서 “디자이너, 교사 쪽을 생각 중”이라고 했다.

“승진보다는 그만둬도 걱정 없는 전문성”

네 번째 질문은 앞으로 자신이 하게 될 일이 꼭 갖췄으면 하는 요건을 묻는 것이었다. 직업만을 생각하지 말고 ‘좋은 삶’, ‘행복한 삶’을 기준으로 생각해볼 것을 요청했다.

그 응답으로 제시된 12개의 선택지 중에서 가장 많이 꼽힌 것도 ‘일 자체의 재미’(23.6%)였다. 그 다음으로 ‘힘들 때 같이 해줄 사람들’(13.5%), ‘칼퇴근, 충분한 휴가’(10.1%), ‘그만둬도 걱정 없는 전문성’(10.1%), ‘스트레스 주지 않는 문화’(9%) 등 순서로 응답이 나왔다. ‘CEO‧임원 승진 가능성’이라는 선택지를 고른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점도 눈에 띈다. 한 조직 안에서 성장하는 것보다는 조직을 벗어나서도 경쟁력을 가지는 ‘전문성’을 더 중시하는 경향은 직장 근속연수가 짧아지고 있는 최근 사회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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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치지 않고 참가자들에게 ‘두 번째 직업, 세 번째 직업’을 생각해 보도록 했다. 이 질문의 의도는, 보통의 진로교육이 사회에 나가서 처음 갖게 되는 하나의 직업을 지향점으로 하는 것에서 벗어나 보자는 것이었다. 은퇴 연령이 빨라지고 수명은 길어지는 추세 속에서 한 사람이 두 개 이상, 많게는 너댓 개의 직업을 가지는 것이 이미 한국 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혹은 의사, 변호사 등 전문적인 직업이라 할지라도 사회 초년 때는 종합병원, 로펌 등에서 바쁘게 일하다가 중년 이후에는 지역의 작은 진료소나 법률상담소 등에서 시간적 여유를 두고 일하고, 노년에는 소외지역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식으로 일하는 패턴이 변해갈 수 있다.

이런 예를 들면서 질문한 영향인지 “젊어서는 산업디자이너로 일하다가 나이가 들면 사회적기업을 운영하겠다”, “프로그래머, 게임 크리에이터로 일하다가 노년에는 농사를 짓겠다”, “헤어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자원봉사를 하고 싶다” 등의 응답이 많았다. 공통적으로 중년 이후에는 시간적 여유가 많아지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질문의 또 다른 의도는, 참가자들로 하여금 지망하는 진로에 해당하는 한두 개의 직업 외에 더 많은 직업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로 두고 생각해볼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한줌도 안 되는 ‘유망 진로’를 향해 다수의 청소년‧청년들이 몰려가기만 한다면 그 일에 진입한 사람은 ‘승자’, 진입하지 못 한 사람은 ‘패자’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패자는 노력을 덜 했으니 일자리의 질이 낮아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사회 저변에 깔리면 고용의 양극화, 이중화를 개선하기 점점 더 어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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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이 존중받는 사회 됐으면”

그룹 대화의 마지막 질문은 “좋은 일이 많아지는 길은? 한국 사회가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라는 것이었다.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해본 경우는 많지 않겠지만 참가자들은 예상보다 훨씬 진지하게 답을 고르는 모습이었다.

10개의 선택지 중에서 가장 많은 참가자가 고른 답은 ‘모든 일이 존중받는 사회’(19.6%)였다. 우리 사회에 그어져 있는 ‘승자의 일’, ‘패자의 일’이라는 구분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데 의견이 모인 것이다. 또한 ‘재도전 기회가 많은 사회’(17.4%), ‘돈 적어도 인간답게 사는 사회’(16.%), ‘다르게 살아도 되는 사회’(12%)라는 응답도 많이 나왔다.

“자장면 배달을 해봤는데 어른들한테 욕을 많이 먹었어요. 모든 일이 존중받았으면 좋겠어요. 다 힘들게 일하는 건데…”
“재도전 기회가 주어지는 사회였으면 좋겠어요. 한 번 실패하면 포기하고 노숙자가 되지 않게요.”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 다 좋은 직업이어야 하잖아요? 다른 사람을 ‘부려먹는’ 사람들이 많은 게 문제예요.”
“노동 측면에서 글로벌 기준에 맞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한국은 영 못 따라가는 것 같아요.”
“돈이 적어도 인간답게 사는 사회라는 건 사실 당연한 거죠. 최저임금 인상도 당연하고요.”
“일하는 시간이 짧은 사회가 좋은 사회인 것 같아요. 그래야 스트레스와 피로가 덜해지겠죠. 사실 그러면 기업도 유지비용이 덜 들 것이고, 전기가 덜 드니까 원자력발전도 줄일 수 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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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대화가 진행된 100분은 어떤 테이블에는 많이 부족했고, 다른 테이블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일에 대한 진지한 생각의 한 가닥 정도는 누구에게서나 발견됐다. 누구나 ‘일’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날 청소년 워크숍에는 그룹 대화 외에도 두 개의 강의가 진행되었다. 김진선 십년후연구소 연구원의 ‘새로운 일의 실험-적당히 벌고 잘 살기’, 박성우 노동인권을 위한 노무사 모임 회장(공인노무사)의 ‘어떤 일이건 좋은 일이 되기 위한 노동권의 토대’ 강의 내용은 다음 연재 글을 통해 전하려 한다.

글 : 황세원 | 사회의제팀 선임연구원 · joonchigirl@makehope.org
사진 : 이우기 |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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