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아파트에서 불어오는 공공의 바람

지난 수십년 동안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한국 도시의 주요 주거형태는 저층 주책에서 고층 아파트로 빠르게 바뀌었다. 아파트는 중산층이 주로 사는 집으로 인식되면서, 편리하면서도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갖게 됐다. 게다가 재산증식 수단으로까지 인식된다. 주택에서 아파트로의 빠른 이동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규제인가, 이웃과 소통인가

아파트가 정주하는 ‘집’이 아닌 끊임없이 흘러다니는 재테크 수단으로 인식되면서 공동체 형성은 어려워졌다. 아파트는 개별가구가 완결적이고 폐쇄적이며, 각 가구가 맡아야 할 공동?공공서비스를 관리사무소가 전담한다. 이런 특징 탓에 단독주택에서는 자연스럽고 빈번하던 주민 간 접촉과 교류는 줄 수밖에 없다. ‘아파트 공동체’는 공동체에 대한 대단한 의지와 사명감을 가진 열성적인 주민이 없다면 만들어지기 어렵다.

아파트가 갖고 있는 이러한 반공동체적 경향성은 최근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층간소음이나 관리비 운영 등에 주민 갈등 심화를 연관 지어 생각해보게 만든다. 다시 말해 주민 갈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최근 시도된 법 제정과 같은 규제적 접근보다는 공동체 문화를 복원하여 그 속에서 스스로 자정능력을 갖는 공동체적 접근이 더 유효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2012년 ‘층간소음이웃사이’ 통계자료를 보면 만남과 대화가 이루어졌을 때 이웃 간 분쟁이 65% 해소되었다는 분석이 있다. 최근 한 신문사의 층간소음 갈등대책 주민조사에서 주민의 53.5%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건축규제나 처벌이 아닌 ‘이웃과 소통’을 들었다는 데에서도 공동체적 접근의 유효성을 알 수 있다.

아파트 공동체의 좋은 모델을 만드는 행아공 사업

희망제작소의 행복한아파트공동체사업(이하 ‘행아공 사업’)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였다. 행아공 사업은 주민이 주체로 참여해 아파트 문화를 바꾸고, 단지 내 공동?공공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아파트 공동체의 좋은 모델을 만들어 삭막한 아파트에 따뜻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자 2013년부터 SH공사, 한겨레신문사와 함께 진행해오고 있다.

공동체, 특히 도시형 공동체에 있어서 핵심은 관계망이다. 서로 알고 지내는 주민이 많고 기쁨과 어려움을 쉬이 나누며 돕는 이웃들이 많으면 그것이 마을인 것이다. 이웃에 대한 교감과 신뢰가 생기면 소소한 불편함에 관대할 수 있고, 이웃을 배려해 알아서 좀 더 조심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행아공 사업의 핵심은 아파트 단지 내에 주민이 만날 수 있는 커뮤니티 공간을 확보하고 그 공간을 거점삼아 다양한 주민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날 수 있는 계기와 판을 깔아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주민 간 교류와 관계망이 확대되고, 그 과정에서 공동체를 이끌 주민 리더들이 등장하고 성장한다. 궁극에는 공동체 문제를 주민 스스로 해결하는 자치와 참여의 문화가 아파트에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취지와 목적으로 지난 2년간 4개의 아파트단지를 대상으로 교육 및 시범프로젝트를 실행하여 봉제작업장, 마을도서관, 탁구장과 같은 주민 커뮤니티 공간이 확보되고 활성화되었다. 커뮤니티 공간에서 소모임, 동아리, 축제, 벼룩시장 등 다양한 주민참여 프로그램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주민 간 교류와 관계망이 만들어지고 확대되었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를 이끌어갈 주민리더들이 등장하고 연결되는 성과를 얻었다.


동네 사랑방 작은도서관에서 피어오르는 마을의 공공성

올해로 3년 차인 행아공 사업의 새로운 고민과 시도는 이렇게 등장한 주민 주체와 공동체 활동들이 지속가능하고 좀 더 공공적일 수 있기 위해 필요한 조건과 환경을 모색하는 것이다. 행아공 사업을 통해 등장하고 연결된 주민 주체들의 활동이 지속성을 갖고 계속 이어질 뿐만 아니라 개인적 관심사와 욕구를 넘어서 공동체 차원의 공공적 의제로 확장되는 모델을 만들고자 한다.

올해는 사업 대상지를 기존 4개 단지로 한정하지 않고 공공성과 지속가능성의 관점에서 잠재력을 갖고 있는 서울 지역의 크고 작은 다양한 아파트 공동체 현장들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아파트단지 내 작은도서관 활동을 주목하게 되었다.

1980년대 본격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작은도서관 운동은 2000년대에 들어 조직적으로 발전하고 민간과 관이 협력하면서 활성화를 맞았다. 2006년 도서관법 개정 및 정부나 지자체, 기업 등의 협력이 늘어나면서 전국에 많은 작은도서관들이 만들어졌다. 아파트 또한 이러한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다. 현재 ‘주택건설기준에 관한 규정’에 의해 300세대 이상의 아파트단지에 작은도서관을 설치하고 있고 아파트의 작은도서관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것이다.

작은도서관은 공공도서관의 역할과 기능이 축소된 것이 아니라 주민 기금과 자원봉사를 통해 주민이 스스로 꾸려가는 동네 사랑방과 같은 곳이다. 주민에 대한 독서 서비스뿐만 아니라 어린이들을 위한 방과 후 프로그램 운영, 주민을 위한 문화프로그램 등을 통해 공공도서관 서비스의 공백을 메우고 있다.

지금은 작은도서관을 지역의 공동체문화를 만들어 가는 자생적인 시민운동으로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작은도서관은 주민의 도서관 서비스 욕구를 주민 스스로 충족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넘어 주민의 협동과정을 통해 풀뿌리 공동체 문화와 민주적인 자치문화가 형성되는 곳이며, 공동체 현안에 대한 대화와 토론의 장으로 지역커뮤니티를 활성화하는 공간으로 중요한 사회적 의미와 의의를 가진다.

작은도서관 운동의 바람은 아파트에도 불고 있다. 단지 내에 오랫동안 방치된 마을문고를 주민이 나서서 청소하고 정리하여 작은도서관으로 운영한 곳도 있고 마을문고조차 없는 단지에선 공동관리비로 관리사무소 한편을 리모델링하여 마을도서관으로 운영하는 사례들도 있다. 최근에는 300세대 이상 단지에 작은도서관 설치 규정과 지자체들의 아파트 공동체 활성화 지원사업들이 추진되면서 아파트 내 작은도서관이 전성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작은도서관의 공동체적, 사회적 의미와 중요성 그리고 주민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아파트에서, 그것도 온전히 주민의 힘으로 작은도서관을 지속적으로 운영해 나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작은도서관의 대표적 성공사례들을 보더라도 대부분 단독주택지에 있는 작은도서관들이지 황량한 대단지 콘크리트 숲에 자리한 작은도서관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지만 아파트의 공동체 형성과 공공성 확장에 있어서 작은도서관은 여전히 다른 어떤 것보다 ‘핫’한 공간이자 내용물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작은도서관의 양적 확대만이 아닌 운영의 활성화와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과 모색일 것이다. 2015년 행아공 사업의 방향과 목표를 여기에 둔 주요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작은도서관이 모여서 할 수 있는 일들

2015년 행아공 사업은 준비단계에서 아파트 내 작은도서관 현장을 찾아가 운영 현황 및 주민활동가들의 고민과 요구를 들었다. 이러한 조사내용에 기반을 두고 주민활동가와 작은도서관의 성장을 지원하는 지구단위별 ‘(가칭)아파트작은도서관네트워크학교’ 파일럿 사업을 기획하였다. 오는 7월부터 은평구 구파발지구와 구로구 천왕지구에서 운영할 계획이다.

지구단위로 학교를 운영하는 이유는 아파트의 작은도서관 주민활동가 대부분이 어린 자녀들을 둔 젊은 주부들로 이들이 움직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매우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구단위를 넘어서면 의지나 열정과 무관하게 참여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망 한계선도 지구단위다.

이 사업은 주민활동가들이 작은도서관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전문성뿐만 아니라 공동체 활동의 비전을 열어주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작은도서관이라는 공간의 성장과 더불어 그것을 이끌어가는 주민활동가 개인의 성장을 동시에 지원하고자 한다. 이 둘은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있다.

‘(가칭)아파트작은도서관네트워크학교’를 수료한 주민활동가들이 새로 생긴 다른 작은도서관 운영을 컨설팅하기도 하고 전업적인 마을활동가로 나아가는 등 주민과 도서관의 성장이 맞물리면서 작은도서관이 활성화되고 지속가능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주민활동가들이 교류하고 네트워크가 구축되면 서로의 정보와 경험을 공유하고, 개별 현장에서는 여력이 없어 시도할 수 없었던 것들을 네트워크의 힘으로 협력하여 추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활동의 어려움을 서로 공감하고 지지해주는 동지적 관계망이 형성되어서 주민활동가들의 비빌 언덕이자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는 데 이 사업의 또 다른 목적이 있다.

2015년 행아공 사업은 관에 의해서든 민에 의해서든 또는 주민에 의해서든 지난 몇 년간 아파트공동체에 등장한 주민 주체와 공동체 활동이 지속가능하려면, 또한 그 활동들이 공동체의 공적 주제로 확장되려면 어떤 조건과 환경이 필요한지를 모색하고 실험하려고 한다. 공공성과 지속성, 커뮤니티성의 잠재력을 지닌 아파트 작은도서관을 중심으로 이를 확인하고 확대하고자 한다.

글_ 이은주 연구조정실 선임연구원 / artenju@makehop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