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004클럽·HMC 모임 / 후기] 희랍인 조르바를 만나다

2014년 1월24일.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이른 시간. 1004클럽과 HMC 회원 60여 명은 조찬 인문학 강연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시 종로구 센터마크호텔을 찾았습니다. 외과의사임에도 10여 년 동안 의학과는 전혀 관계없는 강의만 매년 500회 정도 해온 박경철 원장과 갑오년 새해를 연다는 설렘을 안고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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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눌 수 있어 행복한 사람

강연에 앞서 그동안 희망제작소에 큰 후원을 해주신 유영아 (주)KSEC 대표께 최고 기부자상과 따뜻한 내복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수상 사실을 예상하지 못했던 유 대표는 눈물을 훔치면서 “기부는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 자신에게 더 행복한 것”이라면서 “앞으로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소감을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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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1004클럽 회원 권희석 하나투어 부회장이 하나투어가 세계적인 문화관광그룹으로 성장하기 위한 비전을 발표했습니다. 하나투어는 국내에서는 여행업계 1위 기업으로, 지난 2006년 코스닥 기업 최초로 영국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해 브랜드 가치를 끌어 올렸습니다. 앞으로 체인호텔사업뿐만 아니라 공연?영화 등 문화콘텐츠 사업과 면세점, 외식 프랜차이즈 등 관광인프라 사업으로도 진출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하나투어의 밝은 미래가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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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와의 강렬한 만남

시골의사 박경철 원장은 노벨문학상을 6번이나 받을 뻔했다는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대학시절 마지막 학기 시험기간. 시험기간에는 하고 싶은 일이 많아지고 시험이 끝나면 곧바로 계획했던 일을 위해 달려 나갑니다. 친구들은 디스코텍, 당구장 등 각자의 갈망이 있었는데 정작 저는 하고 싶은 갈망이 없어서 혼자 남았습니다. 그래서 혼자 집에 가다 들른 서점에서 <그리스도,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라는 강렬한 제목에 꽂혀 책을 꺼내려는데, 옆에 붙어 있던 책까지 딸려 나와 두 권을 샀습니다. 그 책이 오늘 강연의 주제인<그리스인 조르바>입니다. 당시에는 표지와 인쇄가 조악했는데, 그날 집에 도착해 우선 라면냄비 받침으로 썼답니다. 지금도 그 자국이 남아 있는데, 냄비 받침이었던 그 책들을 다음날 오후까지 꼬박 하루 하고 한나절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읽었습니다. 저에게는 정말 강렬한 독서 경험을 갖게 해준 책들입니다. 실로 마른가지에 불이 붙으면 확 타 들어가듯 제 온몸에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강렬함으로 인해 언젠가 조르바의 길을 좇아 여행을 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지금 제가 의사 면허도 휴면한 채 여행을 다니고 있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박경철 원장의 그리스 문명 이야기 속으로 떠나보겠습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영향을 받은 작가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일본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 작가인 ‘이사야마 하지메’가 있습니다. <진격의 거인> 노래 가사에는 “땅에 떨어진 새는 바람을 고대한다 / 기도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다 / 지금을 바꾸는 것은 싸울 각오다.” 이처럼 숙명에 순응하지 않고 운명에 도전하는 인간 정신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정신이며, 곧 그리스 정신입니다.

폭압적인 권력에 좌절하고 순응 복종하는 것이 고대의 이데올로기였다면 인간이 최초로 운명에 맞서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 시대입니다. 오딧세이가 포세이돈의 고난에 대항하며 집으로 향하는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런 정신은 중세에 단테의 신곡으로 대표되는 휴머니즘의 발현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계몽주의 선각자인 주인공 ‘나’가 현실의 한계를 느끼고 좌절하면서 낙향하는 길에 살인, 강도, 오입질 등 각종 범죄를 저질렀던 ‘조르바’와 크레타섬에서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서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감동하면서 화합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천하의 난봉꾼으로 인간의 모든 욕망이 조합된 것으로 보입니다. 신화에서 특히 제우스가 가진 욕망 중 가장 잘 나타나는 것으로 바람기를 들 수 있는데요, 바람기 많은 제우스가 인간인 세멜레와 바람을 피워 세멜레가 임신을 합니다. 이 사실을 제우스의 아내이자 가정의 여신인 헤라에게 들키고 헤라는 진노합니다. 바람기는 용서해도 임신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죠. 화난 헤라는 노파로 변장한 뒤 세멜레에게 접근해 당신의 아이 아빠가 정말 제우스가 맞는지 확인해 보라며 의심을 불어넣습니다. 음모에 넘어간 세멜레는 제우스에게 진짜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고, 제우스의 진면목을 보자마자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임신 중이던 아이만은 살리기 위해 제우스가 허벅다리에 아이를 두 달 동안 넣어서 태어나게 했는데, 이 아이가 바로 디오니소스입니다. 디오니소스는 출생 뒤에도 많은 역경을 겪고 비판, 절망, 소외의 상징이 됩니다. 심지어 갈기갈기 찢겨져 죽기도 하지만 다시 태어남으로써 이른바 ‘부활’을 상징하게 됩니다. 인간의 피가 반이 섞인 디오니소스가 여러 번 죽을 운명에 처하지만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극복해 내고 결국 12주신의 자리에 오릅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의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디오니소스 신앙은 기원전 6세기 지중해 인근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유행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여성, 노예, 장애인 등 소외되었던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디오니소스를 추앙하면서 포도주를 마시고 뿌리고 난교와 난음을 일삼는 광란의 축제를 벌였으며, 자신들의 행위를 가로막는 이들을 찢어 죽이고 그 살을 뜯어먹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이 다소 과장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산 사람을 뜯어먹는 것은 디오니소스의 부활의 신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성이 지배하던 시대에 이성을 거부한 이들 세력이 국가를 위협할 지경에 이르자 그리스 지도자들이 회의를 하게 됩니다. 군사력으로 토벌할 수도 있었지만 큰 피해를 우려한 그리스 지도자들은 디오니소스 지도자들과 합의를 하고, 공간을 제공해 그곳에서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허락하였습니다. 현재 그리스 에피다브로스에 있는 원형극장이 바로 그 현장입니다.

디오니소스 신앙을 가진 자들은 이 원형극장에서 그들의 의식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화합의 증거로 그리스 지도자들도 이 의식에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그곳에서는 어떤 행동을 해도 상관없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도 소양강 처녀를 부르는 한국인 관광객이나 아리아를 부르는 유럽 사람들의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이 원형의 장소를 스케네(skene)라고 불렀습니다. 오늘날 영화의 ‘씬(scene)’의 기원입니다. 무대와 원 중심에 있는 제단 사이의 빈터를 ‘오케스트라(orchestra)’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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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니소스 신앙자들과 그리스 지도자들의 화합을 ‘대립자들의 묶음’이라는 뜻의 ‘하르모니아’라고 불렀습니다. ‘하르모니아’는 오늘날 하모니의 어원이 됐습니다. 하모니처럼 이성과 야만이 서로를 적대시 하지 않고 다름과 다름을 존중하여 조화를 이뤄 훗날 오케스트라 뿐만 아니라 연극, 영화, 뮤지컬 등을 탄생시킨 것입니다.

디오니소스가 운명에 굴복했었다면, 오딧세이가 집으로 향하길 포기했더라면, 디오니소스 신앙인들이 이성의 시대에 맞서지 않았더라면, 그리스 신화도, 문학도, 예술도 지금과 같은 모습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운명에 순응하지 않고 도전하는 태도와 다름과 다름을 존중할 수 있는 모습이 만날 때 세상이 더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것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통해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닐까요?

다음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마지막 유언으로, 박경철 원장도 이 말을 끝으로 강연을 마무리 했습니다.”

“나는 이제 연장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지치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다.
다만 해가 저물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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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생의 마지막에도 자신의 신념을 잃지 않았는데 2014년 새해 아침 다짐했던 약속들은 잘 지켜지고 있나요? 원형극장 사진을 보면서 저도 그때의 이야기들이 물밀 듯 다시 찾아왔습니다. 다르다는 것! 이 다름과 조화라는 그리스 문명의 본질은 2700년을 뛰어넘어 니체의 <비극의 탄생>으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60년 만에 찾아온 청마의 해, 풍요롭고 희망찬 기운을 듬뿍 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반가운 만남을 기대합니다.

글_ 정세희(회원재정센터 인턴연구원)
사진_ 정세희(회원재정센터 인턴연구원) 이지형 (회원재정센터 전 인턴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