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20대 청년보다 활기차고,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미국 시니어, 그들에겐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을까요? 젊은 한국인 경영학도가 ‘세 번째 장을 사는 사람들’ 이라는 제목 아래 자신의 눈에 비친 미국 시니어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적극적으로 노년의 삶을 해석하는 미국 시니어의 일과 삶, 그 현장으로 초대합니다.  


세 번째 장을 사는 사람들 (3) 

“전에 하던 일을 관두고 이 일을 시작한지 5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 제게 ‘어떤 일을 하세요’ 라고 물어오면 저는 여전히 이 새로운 일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한번쯤 머뭇거리게 됩니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죠.”

작년 이맘때 미국의 시니어 분께서 제 논문을 위한 사전 인터뷰 중 나누어주신 이야기입니다. 데비 씨(가명)는 미국 메릴랜드 주립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한 후 통역사로 일을 해왔습니다. 그러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메사츄세츠 주 보스턴으로 이사를 온 후 이 분은 완전히 새로운 산업에 뛰어들게 됩니다.

영어에 능통한 외국인들이 많은 이 도시에서 통역 일은 이미 그들의 몫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보스톤으로 이사 온 후 데비 씨는 20여 년 동안 하이테크 회사에서 일을 해오셨습니다. 그리고 현재는 보스톤 근처 뉴튼 시에 위치한 ‘새 인생 찾기 (Discovering What’s Next)’라는 비영리단체에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사용자

뉴튼 시 공공도서관 3층에서 시작한 단체 ‘새 인생 찾기’는 은퇴기 50세 이상의 분들이 인생의 다음 장을 준비하는데 필요한 정보와 1:1 상담 및 네트워크 기회를 제공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시니어들끼리 서로 돕는 공동체를 만드는 매개 역할을 하는 지역사회 비영리단체입니다.

이 단체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인생의 세 번째 장에서 돈과 삶의 의미를 같이 찾아 나선 시니어들, 사회에 공헌하기를 원하는 시니어들, 재산이나 건강 문제, 그리고 노부모나 자녀들에 대한 걱정을 안고 사는 평범한 시니어들, 여가를 즐기고 창의적인 일을 꿈꾸는 시니어들입니다.

이 곳에서 데비 씨는 변화를 꿈꾸는 시니어 분들에게 1:1 상담을 통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세 번째 장의 설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데비씨는 본인이 하이테크 대기업에서의 일을 관두고 인생의 다음 장을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고민할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는 시니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 있는 지 잘 알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한편으론 변화에 직면한 자신이 느꼈던 낯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해주셨습니다.

‘새 인생 찾기’ 에서 일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파티 장소에서 누군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면 언제나 ‘전직 하이테크 대기업 종사자’라고 소개하면서 공공도서관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은 진짜 자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이제 이 의미있고 보람된 일을 시작한지 5년이 넘어 “어떤 일을 하고 계세요?”라고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새 인생 찾기’ 에서 하는 자신의 일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는 포춘지 선정 500대 기업(Fortune 500 companies)에서 일하던 예전 직함을 말하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을 본다고 합니다.

저는 ‘새 인생 찾기’ 서 자신이 하는 일과 자신이 속한 비영리단체를 소개하는 데비 씨의 눈에서 진정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힘을 봤습니다. 그녀 역시 “자신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인지 잘 알고 있다”고 말했고요. 하지만 20여 년을 함께 한 직장에서 키워온 자신의 모습은 그녀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어떤 변화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세 번째 장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 본인의 모습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기 마련입니다. 새로운 일을 배울 때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변화에 대한 부담과 어려움의 정도가 한결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또 변화가 더욱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키워나가는 것이 곧 예전의 모습을 지우는 것이라 받아들이기 때문은 아닐까요. 인생의 세 번째 장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수십 년 넘게 간직해온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기보다 현재의 자신에게 또 다른 살을 붙이고 색을 입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인생에서 변화란 항상 쉽지만은 않은 과정입니다. 그래서 데비 씨처럼 중년 이후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시니어 분들에겐 ‘변화란 기존의 자기를 버리는 것이 아닌 더욱 성숙된 자아로 나아가는 여로임을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글_ 김나정 (보스턴 컬리지 경영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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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정은 영국 런던 정경대에서 조직사회심리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미국 보스턴 컬리지 경영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일터에서 다양한 종류의 변화를 겪는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박사 논문 주제로 은퇴기 사람들의 새터 적응기 및 정체성 변화를 살펴보고 있다.  
najung.kim@bc.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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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재목록
1. 세 번째 장을 사는 사람들
2. 인생의 의미, 한 문장으로 간추리면
3. ‘낯선 자신’이 두려운 시니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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