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2011년 1월, 공감만세의 필리핀 공정여행에 참가한 동화작가 이선희님의 여행 에세이 ‘편견을 넘어’를 12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공감만세는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있는 청년 사회적기업으로 희망제작소의 청년 소셜벤처 인큐베이팅 프로그램 희망별동대 1기를 수료했습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조금 더 많은 분께 공정여행을 알리고, 또 다른 여행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용자


편견을 넘어 (5) 이푸가오의 독수리  

동물원에 갔던 기억이 난다. 뜨거운 여름날이기도 했거니와 인기가 없는 동물이라 그런지 독수리 우리 앞에는 한 명의 관람객도 없었다. 철창 너머 가까이에 독수리 한 마리가 서 있었다. 심하게 말하자면 멍청한 눈빛을 가진 독수리였다. 겁 없는 참새 한 마리가 철창 안으로 날아 들어가 제 앞을 왔다갔다 하는데도 미동조차 없는, 용맹함이랄지 민첩함 같은 독수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전혀 떠올릴 수 없는 멍청한 독수리.

그런데 나는 쉬이 그 독수리 앞을 떠날 수가 없었다. 철창 안에 갇혀 참새 한 마리 죽일 정도의 야생성도 모두 죽었다고는 하나, 독수리는 독수리, 존재 자체가 주는 위엄 같은 것이 분명 느껴졌기 때문이다.

필리핀 공정여행에서 나는 또 다른 독수리를 만났다. 끼앙안 마을 공연에서였다. 시트모(SITMo, 이푸가오 지역의 계단식 논과 이푸가오족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NGO)에서 운영하는 호스텔의 회관에서 공연이 열렸다.

필리핀은 전력이 달려서 그런지 어딜 가나 불빛이 약하다. 회관도 마찬가지였는데 침침한 불빛 아래 덩그러니 커다란 책상과 의자가 놓인 휑한 공간에서 이푸가오족의 전통춤 공연을 보게 되었다. 공연을 준비한 이들은 끼앙안 마을의 어르신들이었다. 내가 묶고 있는 홈스테이 집 ‘맘’도 공연에 참가하였다. 어르신들은 이푸가오족 전통의상을 입고 오셨는데 남자 하의가 사타구니만 겨우 가리는 정도라 처음에는 바로 보기가 쑥스러웠다.

공연이 시작되었다. 음악은 우리나라의 북과 징 같은 타악기 두 개가 만들어내는 단조롭고 반복적인 리듬이 전부였다. 둥글게 원을 만들어 선 어르신들이 리듬에 맞춰 움직이기 시작했다. 양팔을 활짝 편 다음 손끝을 까딱까딱 움직이는 손동작과 반의 반의 반 발자국씩 슬쩍슬쩍 앞으로 나아가는 발동작이 전부인 단순하고 밋밋한 춤이었다. 그 춤이 표현하는 것이 바로 독수리라고 했다.


이푸가오족은 해발 2900m 높이의 산으로 이루어진 코르디예라 산맥을 맨손으로 깎아 계단식 논을 일군 산악 부족이다. 이천 년 전에 지구 반 바퀴를 돌 정도의 길이의 논을 맨손으로 만들었다 하니, 얼마나 강한 생명력과 인내심을 가진 부족일까? 게다가 그 때 이미 대나무를 이용한 관개수로를 놓았다고 하니 지혜롭기까지 하다. 그런 이푸가오족의 대표적인 춤이 바로 독수리를 표현한 이 춤이다. 2011년을 사는 여행자의 눈앞에 이천 년 전의 이푸가오족이 장대한 계단식 논 한 가운데서 하늘을 머리에 이고 추었을 그 춤을 후손들의 몸을 빌려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멋지게 표현하자면 이렇지만 사실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여행자를 위해 평상시에는 입지도 않는 전통의상을 꺼내 입고, 평상시에는 잘 추지도 않는 전통춤을 애써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싶었기 때문이다. 전시된 전통, 박제된 전통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전통을 보기를 원했다. 고유의 영역에서 머물며 실제의 삶과는 거리두기를 하는 전통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 녹아있는 그런 전통 말이다.

하지만 여행 산업이 커지면서 전통은 또 다른 이름을 얻은 것 같다. 전통의 또 다른 이름은 ‘관광 상품’. 해외여행을 떠날 때 여행자는 그 나라만의 독특한 문화, 즉 전통을 체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여행지의 사람들은 ‘관광 상품’으로써 전통을 지키려고 한다. 나는 눈앞의 있는 독수리가 동물원 철창 안에 갇힌 독수리처럼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전통을 파는 것과 전통을 지키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우리를 위해 준비된 그 공연은 시트모라는 NGO 단체에서 준비한 것이었다. 시트모는 관광으로 인해 점점 파괴되어 가는 계단식 논을 지키는 것과 동시에 그 논을 일구며 살고 있는 이푸가오족의 삶, 전통, 문화를 지키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계단식 논을 보러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던 이푸가오족들이 점점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서비스업으로 일을 변경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농사를 짓는 사람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돌보는 사람이 없는 계단식 논은 허물어 질 수밖에 없다.

시트모는 계단식 논을 지키며 더불어 이푸가오족들이 그들의 삶도 지키기를 바랐다. 에코투어나 호스텔 운영 등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익은 계단식을 논을 지키고 이푸가오족들의 생활을 향상시키는 데 쓰인다고 한다.

여행자들이 여행하며 어쩔 수 없이 허물어뜨린 계단식 논을 조금이라도 복원하는 작업을 하는 것, 그들의 전통공연을 보는 것, 주민들과 함께 홈스테이를 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정당한 가격을 치루는 것, 이것이 그들의 삶을 존중하는 길이며 그로 인하여 그들 역시 자신들 문화의 가치를 깨닫게 되는, 거울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공연이 끝나고 어르신들이 여행자들의 팔을 잡아끄셨다. 함께 춤을 추자는 것이다. 어르신들 사이에서 어색하게 쭈뼛거리며 춤을 배우는데, 처음에는 단순한 박자라고 생각했던 그 리듬이 서서히 흥을 돋우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이푸가오족의 전통춤은 흥에 겹다고 하여 덩실덩실 모든 기분을 표출해내면 안 된다. 소란스레 날개를 퍼덕여 날지 않고, 한 번의 날갯짓으로 고요하게 나는 독수리처럼 그리 고상해야 한다.

움직임이 별로 없어 힘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계속 팔을 뻗은 상태로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해야 하니 얼마 추지 않았는데도 팔이 아팠다. 어쩌면 독수리도 날개가 아프지 않을까?

보기에 좋은 것도 이면에는, 고통을 수반하는 치열한 삶이 있을 것이다. 여행자에게는 보기 좋은 전통공연에도, 전통을 지켜야한다는 것과 공연을 통해 수익을 내어 삶을 지속시켜야 한다는 것, 그 외에도 지역과 관광을 둘러싼 갈등은 많을테다. 서로 함께 고민해 볼 일이다. 여행지의 원주민들은 관광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지켜나가는 것, 여행자는 자신만 즐거운 여행이 아니라 여행지와 원주민과 함께 즐거울 수 있는 여행을 고민하는 것 말이다.

덧붙이는 이야기

내가 동화를 쓴다고 했더니 ‘맘’이 보여줄 것이 있다고 했다. 그녀는 영어로 쓰인 교과서를 지역의 아이들을 위해 지역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필리핀은 7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그 말은 7107개의 다른 문화가 존재한다는 의미와 같다. 따갈로그어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지만, 지방으로 가면 그 지역마다 쓰는 고유의 언어가 또 따로 있다. 언어의 개수만도 170개라고 한다. 끼앙안 마을에서 내가 들은 언어만도 따갈로그어와 영어, 끼앙안 친구들이 알려준 뚜왈리드어, 그리고 ‘맘’이 작업하고 있는 일루카노어를 포함 네 가지나 된다. 말 한 마디를 할 때도 하나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언어를 섞어서 말한다.


‘맘’은 내게 한국은 단일어를 쓰는 것이 이점이라고 하셨다. 한국 사회에서 말이 안 통하는 곳은 없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언어를 쓰니까. 그런데도 서로 대화하고 소통을 하는 데는 어려움이 많다.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듯이, 같은 언어를 쓴다고 하여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언어를 써도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남과 나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 다른 것을 인정하는 것과 더 나아가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성을 갖춰야 할 것 같다.
 

글ㆍ사진_이선희
가늘고 오래 공부한 끝에 2011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다방면에서 부족함을 절감, 불꽃 튀는 경험을 원하던 중 공정여행에 반해 청년 소셜벤처 공감만세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은 아이들과 함께 북촌을 여행하며 아이들이 스스로 동화를 쓸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월간 토마토에서 어른들이 읽는 동화를 연재중이다. 
● E-mail: sunheemarch@gmail.co?m  ● Facebook:
www.facebook.com/sunheemarch


공감만세는
‘자유롭게 고민하고 상상하며 길 위에서 배우는 청년들이 모여 세상을 바꾼다!’ 라는 구호 아래, 대전충남 지역에서 ‘최초’로 법인을 설립을 한 청년 사회적기업이다. 현재 필리핀, 태국, 제주도, 북촌, 공주 등지에서 공정여행을 진행하고 있으며 공정한 여행이 필요한, 공정한 여행을 실현할 수 있는 지역을 넓혀갈 생각이다. 공정함에 감동한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기대해보자.  ● 홈페이지:
fairtravelkorea.com  ● 카페: cafe.naver.com/riceterrace


● 연재 목록
1.
나는 왜 공정여행을 떠났는가    
2.
필리핀 ‘골목길 미소’에 반하다  
3. 여자 여섯 명, 수다로 지새운 필리핀의 밤  
4. 끼앙안, 천국보다 평화로운
5.
이푸가오의 독수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