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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여럿이 함께하는 경제’를 일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또 어떤 고민, 어떤 혜안을 갖고 있을까. 입사 6개월 차 20대 사단법인 씨즈 매니저 김해인과 입사 6년 차 30대 희망제작소 사회적경제센터 선임연구원 이재흥, 두 주니어가 앞서 길을 걷고 있는 시니어들을 찾아 묻고 답하며 세대공감 토크를 나누고 돌아왔습니다. 두 번째 손님은 <행복중심 생협연합회> 김연순 전 회장님입니다.


김연순 (행복중심 생협연합회 전 회장, 이하 ‘연순’) : 얼마 전 강풀포럼(동북4구 – 강북,노원,도봉,성북 – 마을사람들 모임)에 길담서원 박성준 선생님께서 손님으로 오셔서 정말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고민은 나이듦에 상관없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라고, 선생님께서도 아직까지 늘 고민하는 주제라고 하시더군요. 무척 위안을 받았어요.

가장 고민이 많던 20대 때, 제 고민, 그리고 꿈은 여성운동을 하는 것이었어요. 물론 그 시절 다른 학생들처럼 학생운동에 몰입하긴 했지만,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거든요. 그런데 대학교 3학년 때 ‘여성학’ 첫 수업을 들으면서 마치 눈이 확 뜨이는 느낌을 받은 거예요. 당시만 해도, ‘여성학’이 ‘가정학’을 지칭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수업을 들어보니 전혀 아니더라고요. 물론 여전히 약간 안개 낀 것처럼 뿌연 느낌도 있었지만요.

그리고 이효재 선생님이 쓰신 ‘한국의 여성과 사회’를 읽으면서, 내가 답답해 했던 것들이 비로소 걷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요. 당시 한국에서는 사회적으로, 대외적으로는 진보적이지만 실제생활에서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가부장적인 사람들이 많았거든요.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갖는 한계나 구조적인 원인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계기가 됐어요.

보통 그 시절 대학생들은 4학년이 되면 공장에 가서 노동운동을 하든가, 영어공부해서 취직하든가. 고민을 해서 둘 중 하나로 진로를 선택했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드는 생각이, ‘둘 다 내가 하고 싶지는 않다.’ 대신 여성운동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졌죠.

김해인 (시즈 매니저, 이하 ‘해인’) : 저도 대학 때 정희진 선생님의 여성학 강의를 들으면서  ‘아, 내가 답답했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고 그때부터 <언니네> 같은 단체에 찾아가서 여성운동에 관심을 갖고 활동을 시작했어요. 대학 졸업 후에 언론사에도 잠깐 다녔는데, 지금와 돌이켜 보면 살아남기 위해 아주 매진하면서, 남성 중심의 권위주의적인 세상에 저 스스로를 꿰어 맞추려 했던 것 같아요. 그때 엄청 힘들었는데, 마침내 그만두고 나니 너무너무 기분이 좋은 거예요.

연순 : 맞아요. 사람마다 다 타고난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자기답게 살아가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죠. 저는 대학 때 풍물반 활동을 해서, 마당극도 하고, 극본도 쓰고, 상쇠도 했고, ‘금관의 예수’ 같은 작품도 공연하고 그랬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그만두고 나서 보니 너무 마음이 편한 거예요. 풍물할 때 막 구성진 욕설도 하고, 앞에 나가 많은 사람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고 하는 활동이 나랑은 잘 안 맞았던 거죠. 뒤늦게 깨달았어요

그런데 전 졸업하는 해에 바로 결혼을 했어요. 너무 일찍 했죠? 24살에 (웃음) 남편은 이제까지 제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진보적인(양성평등) 남자인데요. 결혼하고 나서도 아이를 갖기까지 하나도 차이가 없는 사람이예요. 저도 결혼 후에도 변함없이 자존감 충만하고, 사회의식 강한 편이었고요.      

그런데 임신을 하니까, 완전히 달라졌어요. 25살 어린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되니, 겉으로 비치는 모습이 일단 조금 부끄럽기도 하고, 그래서 사람들을 많이 못 만나니까 점점 사회로부터 분절된 느낌이 들었어요.

약간 괴로웠죠. 이렇게 살려는 게 아니었는데… 남편은 매일 일하러 새벽같이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고.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어려웠고요. 그래서 계속 속으로 “출산 이후에는 절대 이렇게 살지 않을꺼야.” 하는 마음을 내기 시작했죠. 한겨레 신문도 구독해 읽기 시작하고, 남편에게 부탁해 이런저런 책들을 읽으면서 ‘언젠가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될 거야’ 라는 다짐을 매일 했어요. 그러다가 <여성민우회>를 만난 거예요. 여성학이나 여성운동에 대해서 배우고 함께 활동하는데 정말 행복했어요. 그때 제가 사는 집이 노원구였는데, 사무실이 있는 충정로까지 교육받고 활동하러 아이 업고 매일 먼길을 오가며 다녔죠. 그렇게 해서 지역에 계신 분들도 만나기 시작했고 생협활동으로까지 이어지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됐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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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 : 그동안 많은 활동을 오랫동안 이어오셨는데, 어려운 순간도 못지 않게 참 많으셨을 것 같아요.

연순 : 그렇죠. 어린 아이들 키우고, 그러면서 활동에 가기가 정말 어려워요. 밖에 나가려는 찰나에 갓난애가똥싸면 치우고 기저귀 갈아줘야 하는 거죠.  오늘도 오전에 한신대학교에서 생협교육모임이 있어서 다같이 가야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오전부터 카톡방에 ‘이래서 못가고, 저래서 못 갈 것 같아요ㅠ_ㅠ’ 라는 회원들 메시지가 쭉쭉 올라와요. 조금 서운하기도 하지만, 옛날 생각나기도 하면서 무척 이해가 되죠. 그렇기 때문에 기관들마다, 흔히 말하는 지역활동이 아닌 ‘중앙활동’ 할 사람이 많지 않아요.

저처럼 “이거 아니면 안돼. 민우회 활동 아니면 안돼.” 라고 생각한 사람 아니면 2~3시간씩  걸려서 한신대처럼 멀리 있는 곳을 오갈 사람이 정말 많지 않아요. 처음 활동을 시작 했을  때, 김상희 선생님 댁에서 자주 회의도 하고 모임도 가졌는데요, 저나 다른 회원들이 아이업고 가면, 선생님께서는 밥해주시고 아이를 돌봐 주시느라 땀 뻘뻘 흘리고 당신 일은 하나도 못 하시고 그랬어요. 그런 선배님들이 계셨기 때문에 저와 같은 <여성민우회> 후배들이 활동하고 성장할 수 있었죠.

그전에 혼자서 아이를 키울 때는 누군가와 이야기 나눌 기회도 정말 없었거든요. 호칭도 늘 “누구 엄마, 203호 아줌마” 이랬고요. 그래서 처음<여성민우회> 모임에 가서 내 이름을  밝히고 자기소개를 하게 되었을 때도, ‘나같은 아이 엄마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어요. <여성민우회> 활동가분들 중에는 왜 완전 똑똑한 분들도 많으시잖아요.

그런데 두근거리며 계단을 올라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어이구 고생했네”하며 많은 분들이 아이를 받아 주시고, 환영해 주시는데, 어찌나 감사했는지 몰라요. 그래서 저도 그 이후부터는 행사나 모임에 아이 엄마가 눈에 띄면 제일 먼저 다가가 환영하면서 아이를 받아 주게 돼요.

아이들한테도 못해준 게 정말 많아요. 아이들 학교에서 픽업해서 학원 다시 데려다 주고 그런 거는 꿈도 못 꿨고요. 한 번은 점심 때 아이가 밥을 먹다가 울면서 전화를 했어요. 당시에는 급식도 없으니 혼자 밥 먹으면서 어린 마음에 얼마나 힘들고 슬펐겠어요. 그렇게 어렵게 키워온 큰 아이가 지금 26살이 되었는데, 가끔 지나온 날들이 새록새록 해서 짠할 때가 있어요.

해인 : 저도 어린시절 그랬거든요. 부모님께서 일하느라 바쁘셔서, ‘엄마가 한 번 만이라도 소풍 때 김밥 싸주면 좋겠다.’ 이런 생각 매일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막내 늦둥이를 제가 직접 키우다 보니까, 엄마가 얼마나 힘드셨는지 알겠더라고요. 엄마가 해주신 것만도 얼마나 대단한지 깨달았어요. 저희 막내가 고민이 있으면 제게 고민 다 털어 놓고, 저도 주말에  진로박람회도 데려고 가고 이것저것 조언을 해 주고 챙겨 주는데, 사춘기가 되니까 조금 달라져요. 예전에는 충고하고 조언해 주면 ‘언니 말이 다 맞아.’ 그랬는데, 요즘은 ‘맞긴 다 맞아. 근데 언니 조금 짜증나.’ 라고 돌직구를 막 날리는 거예요.(웃음)

연순 : 어머, 우리집이랑 똑같다. 근데 우리집은 남자 아이만 둘이라서, 둘이 전쟁 중인데,  작은 아이가 사춘기여서 자기 목소리 내고 툴툴거리면 형아는 그걸 못 봐주겠는 거죠. 그래서 요즘 우리 작은 아이가 맨날 제게 하는 말이 “엄마, 형아 언제 다시 군대 가?” 예요.(웃음)

해인 : 저는 요즘 ‘나보다 먼저 시작한 언니들에게 이렇게 도움을 많이 받고 있으니,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될 수 있겠지.’ 하는 생각에 더 달려나갈 수 있게 되는 것 같아요. 아마 저처럼 김연순 선생님을 본받아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드네요.

연순 : 저는 막 여성민우회 활동을 시작했을 때, 이경숙 선생님(전 국회의원)께서 지역운동을 고민 중이시라는 말씀을 듣고, 눈이 번쩍 뜨여졌는데, 어느 날 그 이경숙 선생님께서 ‘나와 함께 일해볼래?” 라고 직접 제안해 주시지 뭐예요. 어찌나 흥분되고 감동받았던지… 집에 가서 막 일기 쓰고 난리 났었어요. 지금도 스승의 날이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분이신데요, 그렇게 존경하는 이경숙 선생님과 함께 책상 하나, 강의장 하나 두고 시작한 것이 <여성민우회> 최초 지역지부인 ‘도봉노원지부’의 첫걸음이었죠.

그렇게 <여성민우회> 동북지부가 2003년 만들어졌는데, 살다 보니 <여성민우회> 역사가 곧 제 자신의 역사가 되어 왔어요. 오가는 마을 사람들 이야기 들어주고, 사무국에서 이것저것 일하다가 저녁되면 아이랑 함께 포스터 발송작업, 풀 붙이기 같은 작업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아왔죠.

지금은 여성민우회가 약 10개 지역지부로 늘어났고, 생협은 지역에 약 20개 매장으로 늘어났는데, 뭐랄까 서로가 서로의 활동을 보며 배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모두가 서로의 스승이자, 모두가 서로의 제자인 그런 관계요.

이재흥 (희망제작소 사회적경제센터 선임연구원, 이하 ‘재흥’): <여성민우회>에서 활발하게 활동해오셨는데요, 이후 시작하신 생협(생활협동조합)운동은 기존에 해오셨던 지역운동, 민우회 여성운동과는 많이 다른 부분이 있지 않으셨을까 싶어요.

연순 : 네 그렇죠. 어쩌면 성평등 문제는 저에게 평생 화두일 거예요. 그 중에서도 저는 특히 지역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요. 결혼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여성들이 자신감을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예전의 제 모습이 비쳐서 더욱 마음이 가게 됐고, 또 활동을 함께 하면서 조금씩 변화해 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보람과 감동이 있어서 지역활동을 꾸준히  했어요. 소각장 반대운동, 우리가 스스로 지방의원을 선정해 입성시켰던 일, 너무너무 역동적이고 재밌는 일도 많았죠.

그런데 그렇게 10년 정도 활동했을 무렵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상근자가 둘밖에 안 되다 보니, 하루하루 늘 바쁜 일상 속에서 일과 삶이 잘 분리가 안 되는 거예요. 나는 대체  어디쯤 서 있는 걸까. 궁금하고 답답한 마음이 커졌죠. 전세계적으로는 어떤 흐름이 벌어지고 있고, 한국 내에서는 또 어떤 흐름이 있고, 내가 살고 있는 도봉구는 어떻게 갈 것인가.  나는 잘 살고 있나.

그래서 <여성민우회> 임기 마치고는 다 끊고 무조건 쉬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마침 경희대 NGO대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 학업에 몰두하기 시작했어요. 윤정숙 선생님이 늘 “공부가 제일 쉬워” 라고 말씀하곤 하셨는데, 실제로 공부를 해 보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그동안 활동해 왔던 것과 달리 다른 사람과 관계 맺고 함께 해 나가는 것 없이, 나 혼자만 집중하고 열심히 하면 그대로 결과가 나오는 거죠.

그렇게 책을 통해, 강의를 통해, 민주주의의 역사를 배워 보니까, 내가 하고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위해서 역사 이래, 이전 사람들이 어떤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 알고 배우게 되어서 너무 감동적이었어요. 고민을 항상 ‘나’로부터 시작해서, 활동을 ‘나의 필요’에 따라 펼쳐나가고, 또 그런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들 서로를 배려하고요. 하루는 수업 중에 너무 울컥해서 눈물을 쏟기도 하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뭐든지 운동이 성공하려면 개인의 필요와 사회의 필요가 맞물렸을 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당시 아이를 키우기도 했고, 환경이나 지속가능한 지구 문제,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 우리마을의 여러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보니, 자연스레 개인의 먹거리, 사회의 먹거리가 화두로 떠올랐어요. 그래서 본격적으로 관심이 생기면서, <여성민우회> 생협본부 교육위원장을  시작으로, 이사장 직을 맡아 활동하면서, 그게 또 새로운 10년으로 이어졌네요.
정말 ‘생협’을 맡아서 경영해 보니까, 민우회, 지역운동과는 또 다른 것이더라고요. 회원들이 “1주일에 한 번밖에 공급을 못 받으니 아쉽다. 매일 물품을 직접 살펴보고 사고 싶다.” 는 바람을 계속 말씀해 주셔서 10년 만에 드디어 처음으로 매장을 만들었는데, 그 이후부터 정말 매일매일 처진 두부 꿈을 꾸고 (웃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잘못하면 조합원들의 출자금이 걸린 문제이니, 경영문제로 고민이 컸어요. 이사장일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늘 마음이 무겁고 고민이예요. 그래서 언제든, 어디에 가든 이렇게 <행복중심생협> 전단지 챙겨서 끼고 다니는 게 습관으로 몸에 배었죠. 만나는 분들마다 먹어보라고 권하고요. 그런데 결국 세상 모든 일은 혼자하는 게 아니잖아요.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고민도 나누고 그러니까 해결책도 생기기 시작하고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어요.

해인 : 정말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지인들과 함께 요즘 반려동물의료생협을 준비 중이거든요. 처음에는 ‘반려동물도 조합으로 가입할 수 있는 병원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른 선례들을 보니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용감하게 시작했는데, 막상 일을 해보니 협동조합을 한다는 것이 보통이 아니더라고요. 설립 초기부터 모든 일에 조합원들의 동의를 일일이 얻어 일을 추진해 나가는 것을 포함해서요.

연순 : 맞아요. 예전에 저희가 생협시작할 때는 의견 합치가 잘 안되는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우리 가족을 위해 바른 먹거리를 먹이고 싶다.’ 는 생각과 필요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필요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기 때문에, 조합원들을 모으고 일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오히려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올해 ‘협동조합 기본법’이 제정된 이후, 이제는 작은 협동조합들을 쉽게 만들 수 있는 시대가 되어서 ‘생협법’만 있을 때와는 많이 다른 것 같더라고요. 참 많은 분들을 만나보았는데, 겪고 계신 어려움들도 무척 다양하고요. 무엇보다 5명만 모여도 설립이 가능한 작은 협동조합이다 보니, 서로 갖고 있는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 더 세세하게 다 드러나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대부분의 분들이 처음에는 협동조합 설립하는 것이 서류 작성 간단하게 해서 신고하면 되는 것이라 생각하다가, 실제 조합원들을 모으고 소통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 아니구나.’를 깨닫는 과정인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처음 협동조합을 처음 시작하는 분들에게 이런 조언을 드리고 싶어요.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해서 듣고, 내 이야기를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하는 게 가능해졌을 때, 그렇게 경험과 신뢰가 쌓였을 때, 비로소 협동조합을 시작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올해 상반기에 도봉구에서 8개 팀을 만나 현재 인큐베이팅을 돕고 있는데요, 그분들께도 그래서 항상 말씀드리는 게 “천천히 가시라…”였어요.

해인 : 저희도 작년 8월부터 아직까지 회의만 계속 하고 있거든요. ‘가치만 단단히 잘 지킨다면, 천천히 가더라도 잘 갈 수 있는 길을 가보자.’ 라는 생각으로요. 그래도 여전히 늘 고민이예요. 일단은 사업을 먼저 시작할지, 본격적인 사업은 나중에 하더라도 필요한 환경이나 제도를 만들기 위한 사회운동을 먼저 펼쳐 나가야 할지를요.

연순 : 어려운 문제죠. 그런데 저는 뭐든지 협동조합으로 다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요. 협동조합이 만능은 아니거든요. 비영리단체도 기부금이나 후원자를 모집해서 재원을 마련하고 문제를 해결해 나갈 수 있잖아요. 협동조합은 이와 달리 ‘사업적’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분야나 주제일 경우 가능한 형태죠. 사업을 일으켜서 수익을 발생시켜서 하는 게 맞을 경우 협동조합을 하는 거죠.

협동조합은 사업체이면서 인적결사체이기 때문에, 수익을 발생시켜서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예요. ‘그런데 후원이나 지원을 받아서 운영하자.’ 라는 생각이 있다면 협동조합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NGO나 이런 게 더 적합하죠.

해인 : 좋은 말씀을 많이해 주셔서, 오늘 정말 컨설팅을 받는 듯한 기분이네요.

연순 : 요즘 그런 일이 많았어요. 지역에서 협동조합 추진하시는 분들이 꽤 계셔서 저를 찾아오시는데, 대부분 말리는 입장이었거든요. 제가 지금 도봉구 마을공동체기업 인큐베이터로도 선정돼서 교육을 받고 3개월째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런데 이게 정말 좋은제도구나 하는 것을 요즘 많이 느끼는 계기이기도 했어요. 제가 생협연합회에 있으면서도 ‘마을지역 협동조합, 기업은 사람들이 모여서 만들면 되는 것 아닌가’ 쉽게 생각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직접 현장을 다녀보니 이것도 역시 생활협동조합처럼, 마을사람들의 필요가 무엇인지 찾아내고 귀를 열고 듣는 것이 무척 중요하고 쉽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재흥 : 말이 나와서인데, 저는 처음에 김연순 선생님께서 생협연합회 회장직 이후에 일 내려놓으시고, 다시 마을로, 지역으로 돌아가 마을기업 인큐베이터로 활동하기로 결정하셨다는 말씀듣고 정말 대단하시다고 생각하고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사실 그런 결정이 쉽지는 않잖아요. 그동안 네트워크나 경험을 토대로  더 크고 넓은 일을 할 수도 있으셨을 텐데,  대신 작은 마을 단위나 지역으로 돌아가 주위와 함께 나누고 성장을 돕는 일을 하신다는 것이요.

연순 : 아, 재흥 씨가 일전에 말씀하신 게 그런 뜻이었군요? 처음에 나는 이해가 잘 안 되는 거예요. 제게는 그냥  너무 자연스러운 결정이었거든요. 저는 늘 그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해왔던 것 같아요. 만약에 회장직을 마쳤을 때 정보나 새로운 지식에 갈증이 있었다면, 제가 다른 기관에서 일을 하거나 예전처럼 공부를 했을 테지만, 현장에서 내가 역할을 하면서 도울 수 있는 것이 뭘까를 줄곧 고민해 왔기 때문에 마을기업 인큐베이터를 결심했죠. 마침 작은 협동조합들을 돕는 일,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돕는 일을 때마침 만나게 된 거예요.

재흥 : 저도 언젠가는 지역으로, 현장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목표인데요, 한편으로는 그런 고민도 들어요. 내가 지역이나 현장에 가서 나눌 만한 역량이 충분히 쌓인 것일까. 역량이나 네트워크가 어느 정도 형성되었다는 제 스스로 확신이 없다면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듯 하다는 생각이 있어요.

연순 : 저도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부족하고, 자신이 없을 때가 많아요. 그런데 저는 그랬던 것 같아요. 흔히 말하는 중앙에서 활동할 때도 지역과 괴리된 채 활동을 한 게 아니었고, 중앙이라 해도 상명하달 방식이 아니라 늘 일상적으로 관계 맺고 상호협의하는 평등한 관계로 지역과 일을 함께 해왔거든요. 중앙활동을 하는 내내도, 계속 도봉구에 살면서 마을활동을 떠나지 않았었고요, 동네 조합원들과 함께 ‘캔들 나이트’도 하고, 다양한 지역모임도 계속해 왔고요.

요즘은 ‘아, 그래서 우리 생협이 잘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해요. 물론 아직 경영도 어렵고, 물류도 완전히 독립을 하지 못했지만, 여느 생협에 못지 않게 수평적인 네트워크를 만들어가고 조합원들을 리더로 길러내는 작업들은 정말 잘해왔고, 그게 큰 힘이 되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거든요. 

그래서 그냥 편안하게, 부담없이 다시 지역으로 돌아왔어요. 물론 사람들이 내게 기대하는 것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난 내가 할 수 있는만큼 한다는 마음을 가졌죠. 제겐 내가 가진 네트워크를 활용해 누구를 돕는다는 것이 제일 행복하니까요.

해인 : 저는 은평구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어요. 은평구에 계신 주민들과 함께 ‘소셜 밥터디’라는 것을 진행하고 있는데, 다른 스터디 모임과 달리 정해진 커리큘럼 없이, 주민 스스로 듣고 싶은 대로 강좌를 조직해서 듣는 대화모임이예요. 그런데 여기에 참여하신 주부들께서 재무상담을 받고, 사회적기업에 대해 잘 모르셨는데,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제가 오히려 많이 배우고 저 스스로도 변화하는 것을 느끼고 있거든요.

연순 : 그렇죠. 협동조합이라고 해서 선키스트, 몬드라곤처럼 큰 곳만이 다가 아니거든요. 박성준 선생님 께서 “왜 공부를 하는가?” 라는 주제로 말씀하시면서, 결국 자기 자신을 알려고, 나를 둘러싼 세상을 바로 알려고 노력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가만히 살펴보면 ‘경제는 성장하는데 일자리는 줄어가고, 열심히 살고 있지만 잘사는 사람들과 격차는 점점 커져가고,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남에게, 대기업에게만 필요를 의탁해야 하는가, 직접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를 수 있죠. 대형마트에서 물건을 사면 이익이 고스란히 대기업에게 가지만, 생협에서 사면 그 이익이 우리에게 오게 된다는 것을 많은 분들께서 곧 공감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재흥 : 그렇네요. 두 분 말씀을 듣다 보니까, 제가 정말 중앙과 지역, 삶과 운동 그리고 일을 너무 이분법적으로, 분절화해서 생각해 왔다는 반성이 드네요. 그런데, 아무래도 마을이나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힘든 시련이나 관계 맺음에서 오는 어려움이 아무래도 남다르지 않을까 싶은데 어떠신가요?

연순 : 사람들마다 다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관점의 차이가 분명히 있죠. 생협매장 시간을 늘려달라는 분도 있지만, 생협이 왜 노동권 등을 생각하지 않고 일요일에까지 일을 하느냐는 분도 있고, 바른 먹거리와 농촌 생산자에 집중하자는 분이 있는 분이 있는가 하면, 소비자를 생각해 공산품 품목을 늘려달라는 분도 있고요.

원래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할 수 있고, 가능하기 때문에, 이런  식의 관점의 차이에 따라 늘 갈등이 있게 마련이예요. 이사회가 밤 열두시까지 안 끝나는 일도 많고요. 그래서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생각을 잘 설명하고, 열린 자세로 듣고 이해하면서, 서로 교감을 확대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재흥 : 저도 그 부분이 가장 고민이어서, 미국에서 보급 중인 ‘민주주의의 10가지 기술’ 같은 것 찾아서 연구도 해보고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이야기도 나누고 있는데, 민주적 소통에 대한 방법론이 더 많이 개발되면 좋겠어요. ‘모.떠.꿈’ 워크숍도  참여하셨죠? 다양한 현장사례나 방법론을 많이 접해보셨을 것 같아요.

연순 : 네, 물론 방법론이 잘 개발되고 교육할 필요가 있죠. 말씀하신 것처럼 저도 대학원에서 ‘중재와 협상’이라는 과목도 듣고, 모더레이터 교육도 받고 ‘모.떠.꿈’ 워크숍도 듣고 했는데요, 그런데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일방적이지 않게, 교육에 참여한 사람이 단 한마디라도 자기 이야기를 하고 가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것이 만족도가 높고 사람을 변화케 하는 지름길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이사장직을 수행해야 해서, 회의를 주재하는 기회가 많았는데 항상 회의운영 원칙이, 참여하신 모든 분들은 반드시 단 한마디라도 하고 끝내는 것에 방점이 찍혀 있었어요. 엊그제 관악구에 가서도 강의를 했는데 93점이 넘는 평가를 받게 되서 그 이유를 봤더니 역시나 수강하시는 분들이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게 해서 였더라고요. 협동조합 7원칙을 강의했는데 7원칙이 무엇인지는 간략히 설명하고, 모서리 게임을 하면서 해당 모서리에 가서  해당 원칙에 대해 함께 말씀 나눠보시라는 식으로 진행했거든요. 얼마 지나지 않아 참가하신 분들이 나는 누구고 여기에 왜 왔고 금방 웅성웅성. 너무 재밌어 하시더라구요.

재흥 : 저도 다음에 꼭 시도해 봐야겠네요. 그런데 또 저는 민주적소통이 조직 내 구성원들하고 잘 안될 때가 많은 것 같아요. 늘 프로젝트성 업무들이 많아서 바쁘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는 것 같구요. ‘깨달음의 장’ 도 다녀왔는데 대체 왜 이럴까요?

연순 : 아 깨장 다녀왔구나. 그러데 저도 그래요. 저도 잘 잊어버리고. 아… 내가 또 내 중심으로 생각했구나 하는 것을 순간순간 깨달으면 이제, ‘정기적으로 주사 맞아야 하는데 그 시기가 왔나보다’ 싶죠.

재흥 : 사실 오늘 인터뷰를 처음 기획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가 주위에 흔히 말하는 ‘무중력  여성 청년’, ‘경력 단절 여성’들이 많으셔서, 이 분들께 좋은 언니를 소개시켜 드리고 싶다, 선배 언니의 애정 어린 조언과 격려를 전해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왔는데 제가 더 큰 힐링과 가르침을 받고 가는 것 같습니다.

해인 : 맞아요. 사실 제 주위에도 정말 많으시거든요.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탄탄대로의 길을 걷다가, 한 번 사회에서 넘어진 상처가 잘 씻겨지지 않은 분들이 많으세요. 과연 내가 다시 가능할까하는 두려움 때문에  머뭇거리는 분들요. 그분들께 그런 세상이 전부가, 다가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 필요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자주 들거든요. 생협에는 아무래도 여성분들이 많으시니, 조직 내에 경력 단절 여성이셨던 분도 많으실 것 같고 상대적으로 잘 안착하시지 않을까 싶네요.

연순 : 오늘도 한신대학교 강의장에 오시라고 전체 카톡방에 알렸는데, 그것을 보고 도봉구에서 한 조합원이 아이를 업고 오셨어요. 그 먼거리를 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짠했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생협조직들은 그런 환대의 마음은 있는 것 같아요.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이 바른 먹거리를 위해서 왔다가, FTA반대운동으로, 탈핵운동으로 폭을 넓히며 조직이 성장해 왔으니까, 다른 사람도 아닌 제가 바로 그랬으니까요. 생협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 교류하고, 삶의 의미를 새롭게 되찾았다는 여성분들 이야기들 듣다보면 너무너무 감동적인 경우가 많아요. 오래전에 평생 생협에 뼈를 묻고 싶다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눈물 글썽이며 이야기 하셨다는 한 조합원이 지금은 이사가 돼 계시는데, 그분이 요즘은 또 새로운 젊은 여성조합원들을 배려하며 성장을 돕고 있거든요. 그런 분들이 많이 있어요.

가끔은 나 자신, 자기 자신이 먼저였으면 좋겠어요. 자기가 행복하고 자기가 바로서야 존경받고 소통하는 엄마가 되지 않을까요. 언제까지 아이가 먼저이고, 남편 시중만 든다면 자기 자신을 찾기란 영원히 어렵게 돼죠. 혹시 선택의 순간, 혹은 고민의 순간에 있다면,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나는 죽은 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를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사실 자기 자신에 집중해서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주위에 잘 찾아보면 아이를 대신 돌봐주거나, 아이 키우는 것을 돕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거든요.

갈까 말까 고민할 때, 늘상 주저하며 한 발 뒤로 빠지는 사람들을 많이 봤어요. 그런데 그분들이 몇 년 후에도 똑같은 고민을 반복하며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여전히 힘들어 하시더라구요. 나를 위해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지금 실천에 나서야만 합니다.

최근에는 이런 필요들을 나 혼자 진행하는 것은 힘이 부족하니, 정기적인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것을 고민하고 있어요. 저처럼 전임 회장들, 우리끼리는 퇴물이라고 하는데 (웃음) 함께 모여 <행복중심 협동조합 지원센터>를 만들었죠. 15시간짜리 강의계획도 확정해서, 협동조합 개념부터, 민주적의사소통, 회의하는 법, 회계까지 종합적으로 알려드리고 미래의 리더를 길러낼 계획이예요.

저는 이미 우리 사회에 사회적일자리, 사회적경제에 대한 관심은 봇물이 터졌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이런 수요를 어떻게 하면 맞춤형으로 잘 연결해 줄 것인가” 하는 진지한 고민이 필요할 때라고 봅니다. 그러려면 일단 모여야겠지요. 저는 제 생각을 알리고,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것. 앞으로도 계속 그런 일들을 해 나가고 싶어요.

재흥 : 긴 시간 좋은 말씀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여성민우회생협에는 남자는 가입할 수 없나요?

연순 : 그런 오해하는 분들이 너무 많으셔서 이름을 바꿨어요. <행복중심 생협연합회>로요.  저희 조합원들 가운데 남자도 많아요. 혼자 사는 싱글 모임도 많고요.

재흥 : 오랜시간 좋은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글_이재흥 (희망제작소 사회적경제센터 선임연구원 weirdo@makehope.org)
사진_김해인 (사단법인 씨즈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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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경제 세대공감 인터뷰
(1)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일’로 해보자” _  (주)한국커퓨터재생센터 구자덕 대표
(2) “언니도 그랬어, 언니가 들어줄게”_ 행복중심 생협연합회 김연순 전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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