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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 ‘여럿이 함께하는 경제’를 일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또 어떤 고민, 어떤 혜안을 갖고 있을까. 입사 6개월 차, 20대, 사단법인 씨즈 매니저 김해인과 입사 6년 차,  30대, 희망제작소 사회적경제센터 선임연구원 이재흥, 두 주니어가 앞서 길을 걷고 있는 시니어들을 찾아 묻고 답하며 세대공감 토크를 나눴다. 세 번째 손님은 <희망동작네트워크>  유호근 사무국장님입니다.


김해인 (씨즈 매니저, 이하 ‘해인’) : 국장님,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유호근 (희망동작네트워크 사무국장, 이하 ‘호근’) : 다 아시면서 뭘요. (웃음) 안녕하세요,  <희망동작네트워크(희망동네)> 사무국장 유호근이라고 합니다. 동작구에서 2004년부터 지역활동을 하고 있고요, 현재 어린이도서관, 마을카페 등 여러 사회적경제조직을 지역주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재흥 (희망제작소 선임연구원, 이하 ‘재흥’) : 얼마 전, 국장님이 고등학교 때부터 흥사단 활동을 통해, 사회운동을 시작하셨다고 들었어요. 10대 때 사회 문제에 눈을 뜨고 그런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은데, 대단하신 것 같아요.

호근 :  어렸을 때, 제 꿈은 역설적으로 육군장교였어요. 물론 나중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했지만요. 그런 사실을 통해 미루어 봤을 때 아무래도 ‘공공영역’ 이랄까. 그런 영역에 어릴 때부터 관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사회 문제나 정의에 관심이 있었다고 하긴 조금 그렇고요.

그 와중에 고등학교 때 신문반을 하게 됐는데, 학교와 많이 부딪쳤어요. 당시 ‘두발자유’가 한창 이슈일 때라 이에 대한 진보적 논지의 기사를 써서 발표했거든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지도하시는 선생님께 엄청 혼이 나고 선생님을 따라 교무실로 걷고 있는데, 도저히 못 견디겠는 거예요. 그래서 선생님께 ‘제 발로 신문반을 나가겠습니다. 그만두겠습니다.’ 말씀드리고 뒤도 안 돌아보고 돌아섰어요. 처음으로 선생님 뜻을 거슬렀던 사건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친한 친구가 마침 흥사단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속된 말로 포섭된 거죠. (웃음) 어느날 그냥 같이 한번 가보자고 해서, 따라 갔는데 재밌었어요.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서 책 읽고 토론하고, 저랑 잘 맞았어요. 그렇게 흥사단 활동을 하면서 그때 처음 사회라는 존재를  실감하게 되고, 여러 사회 부조리들을 접하고 해법찾기를 실천하면서, 대학도 순전히 ‘학생운동’ 하려고 가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입학 후 그런 제 생각에 아주 충실하게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전체 평점 2.05를 마크했고요.

늘 말하는 거지만, 정말 잘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우왕좌왕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으면서 제가 선택한 일을 주욱 집중해서 했으니까요. 지나온 20대를 돌아보면, 내 인생의 8할은 (학생)운동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대 때 그 정도로 무엇인가에 미쳐보지 못했다면 무척 안타까운 청춘이었을 것 같아요.


”사용자

재흥 : 국장님 대학을 다시니던 1990년대는, 상대적으로 1970, 80년대에 비해 학생운동이 덜 격렬하지 않았나요? 흔히들 (학생)운동이 ‘끝물’ 이었다고 이야기 하잖아요.

호근 : 오히려 매우 격렬했어요.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되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초반에는 평화시위로 진행되다가, 학생운동이 격화되기 시작했어요. 1995년부터 요즘 다시 이슈가 되고 있는 전두환, 노태우 전직 대통령을 이제 막 법정에 세웠고, ‘5.18광주민주화운동 특별법’이 도입됐거든요. 그런데 정부가 제대로 처벌하리라는 기대를 점점 저버리니, 전국대학 동맹휴업이 일주일에 3일 이상 계속 지속되고, 몇 만 단위로 사람들이 거리에 계속  모이고 그랬죠. 학생운동이 다시 전투적으로 돌아가던 시기였습니다.

결정적인 전환점이 된 게 이른바 1996년 ‘연세대 사태’였죠. 학생운동이 가장 격렬했고, 경찰의 진압도 가장 강했던 시기, 둘의 흐름이 점점 고조되다가 마침내 정면충돌한 사건이 발생했던 겁니다. 학생들 400여 명 구속되고, 언론 등의 비판이 심해 엄청난 여론의 위기가  왔었어요. 설상가상으로 1997년 한국대학생총연합회(한총련) 출범식 즈음, 프락치 사건 등  불미스러운 일까지 겹치면서 학생운동이 도덕적 치명상을 입고, 이후 학생운동이 수세에 몰리며 점점 힘을 잃어가는 그런 흐름이 왔었고요.

제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짧은 시간 동안, 물론 우리가 다 하지는 않았지만, 학생운동이 성공해서 승리한 경험(두 전직 대통령의 법정처벌과 시민공감 획득)도 겪어 봤고, 이후에  쇠락하고 패배한 흐름이 모두 압축적으로 경험했어요. 또 1996년부터는 많은 청년들이 변화를 호소하면서 분신하고 목숨을 던지면서, ‘열사’정국이 이어지기도 했고요, 무려 10명이  넘는 분들이 연이어 자살하셨었는데 마음이 정말 아팠죠.
 
‘정의’ 와 ‘합리성’ 두 가지 원칙

재흥 : 그랬군요. 그렇게 성공과 실패를 모두 겪으면서, ‘격렬한’ 학생운동을 경험했던 그 기간동안 ‘청년 유호근’은 어떻게 또 내적으로 변모하고 성장했을지 궁금합니다.

호근 : 기본적으로 저는 저 자신을 불완전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고집도 세고, 외골수고요. 지금에서야 장점이 되었지만, 그래서 많이 부딪치는 성격입니다. 왜 우리 사회에 ‘좋은 게 좋은 거지’ 라는 보편적인 정서가 있잖아요? 특히 제가 다니던 대학은 농민정서가 강해서, ‘좋은 게 좋은 거다.’ 라는 정서 흐름이 더 강했어요. 그러니 당연히 제겐 잘 안 맞았습니다.

당시 학생운동을 할 때 제게 두 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하나는 ‘합리성’, 그 어떤 주의주장도 합리적이지 않다면 따르지 않겠다는 생각이었고, 또 하나는 ‘정의’였어요. 절대로 올바른 것만을 추구하고 선택하려 했기 때문에 제 편이 많이 없었죠. 그때는 (학생, 사회)‘운동’은  당연히 그런 것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믿었어요. 내 생각에 비추었을 때 올바르고 또 합리적인 것을 실천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선배들에게 많이 대들고 화도 냈고요, 모두가 군말 없이 따르는 것들을 나만 거부하는  일탈행동도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 힘도 들고… 무척 외로웠죠.

하지만 저는요, 그 시기가 바로 한 인간의 자아를 만들어 가는 시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사회를 진보시키고, 역사를 진보시키는 사람의 역할이 바로 그런 ‘돈키호테’ 같은 행동이라고 믿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건 ‘용기’이거든요.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누가 뭐라든 행동에 옮기는 용기. 요즘도 전, 사회운동을 하는 후배들에게 “진보주의자는 왕따가 될 용기가 있어야 한다.” 라고 조언을 하곤 해요.

더불어 정말 중요한 것이 ‘정의’를 좇는 사람은 늘 외골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합리성을 통해, 합리적인 이성을 통해 사유하고 성찰하며 계속 의심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재흥 : ‘정의로움’과 ‘합리성’ 을 원칙으로 삼았다… 라는 이야기가 조금 멀게 느껴지기도 하네요. 그런 원칙들을 정립하게 된 현실 속 어떤 계기가 있나요? 일화라든지요.

호근 : 한때는 옳고 그름의 단일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어요. 학생운동을 할때도 우리 편이냐, 아니냐를 판단할 때가 많았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냥 진영논리로 사물과 사람을 인식하고 편가르는 거죠.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보니까, 내가 엊그제 한 이야기와 오늘 한 이야기가 다른 거예요. 사람들과 계속 소통하고 새로운 생각들을 읽고 쓰고 받아들이고 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도 있었던 거죠. 그런 ‘나’를 스스로가 발견하게 되면서, 생각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학생운동을 함께하던 한 선배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들으면서 변화하지 않았나 싶어요. 당시 저희 대학교가 총투표를 통해 ‘한국대학생총연합회’ (한총련)을 탈퇴한 첫 번째 학교가 되었는데, 언론의 정보왜곡과 옳지 못한 정치적 의도 등이 많이 혼재돼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투표에 찬성표를 던진 선배들이 정말 미웠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도 인간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았지만요.

그런데 그로부터 2년 후 같은 과 한 선배가 제게 사과하러 찾아 왔어요. 당신은 제가 ‘상대편 진영’에 속한 녀석으로 생각했기에, 당연히 자신을 뒤에서 욕하고 돌아다닐 줄 알았다고 토로하면서, 자신의 실수가 있었다고 하는 거예요. 굉장한 충격을 받았죠. 이런 사과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니, 내가 그런 진심 어린 사과를 받게 되다니 말이죠.

“아… 나쁘다고 생각한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실수나 잘못들이 어떤 절대악이 아니구나.” 라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만약 지금까지도 선과 악으로, 흑과백으로 세상을 봐 왔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죠. 그 선배가 정말 고마운 인생선배죠. 그 선배는 지금도 저를 만나면 그렇게 미안해 하거든요. 저에겐 정말 그 선배와의 만남이 큰 성장의 기회가 되었죠.
 
재흥 : 그즈음, ‘양심적 병역거부’도 하게 되신 건가요?

호근 : 잘은 모르겠지만 비슷한 시기였던 듯 하네요. 2000년 초반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것을 처음 접하고 2002년 실행에 옮겼으니까요.

그런데 그 당시 제 입장에서 보면, 저는 학생운동과 함께 통일운동을 했고, 북한과 평화로운 한반도 공존과 평화를 주장했는데, 그런 제가 총을 드는 건 자기모순이었던 거예요. 결과적으로 제 주변사람들 가운데, 비종교적인 이유로로 병역거부를 한 사람은 아직까지도 저밖에 없어요. 그 당시 선배들도 많이 말렸어요. ‘그래도 사회생활하려면 군대는 다녀와야지.’ 라면서요. 

하지만 양심이라는 건 그런 거잖아요. 머리로 판단하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행하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내면의 어떤 목소리 같은 거요. 그렇기 때문에 육군장교를 꿈꾸던 제가, 평화운동, 북한돕기 운동하면서 병역거부를 하는 쪽을 점차 바뀌게 된 겁니다.

물론 막상 실제로 구속이 되고 나니, 약간 두려움은 있었으나, 원체 내 인생을 내 생각대로 의지대로 살아왔기 때문에 (웃음) 감옥에 갔죠. 헌데 그동안 감옥생활에 대해 낭만이 조금 있었는데, 막상 가서 보니 웬만하면 안 가는 게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옛날과 달리 독방이 아니고 ‘혼방’(여러 명이 함께 쓰는 방)에서 빡빡하게 짜여진 시간을 보내야 하거든요. 정말 책 읽을 시간도 없어요. 죄수들에게 30분 이상 혼자 있는 시간을 주지 않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속으로, 지역 속에서’

해인 : 그럼 그 이후에 바로 동작구에서 지역활동을 시작하신 건가요?

호근 : 아니요. 감옥에서 나와서야, 이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죠. 당시 이런 말이 유행했습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고, 시민운동에 시민이 없다.’ 우리가 하는 운동은 사회운동이자 대중운동이기 때문에, 마땅히 늘 대중들과 함께 해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할까가 화두가 됐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종로나 명동 같은, 도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도모하는 건 아니잖아요. 당연히 내가 발 붙이고 있는 삶의 터전, 지역에서 시작 해야죠. 그때 제가 스스로 ‘지역 속으로, 지역 속에서”라는 모토를 정했어요. 마침 생각난 곳이 내가 나고 자란 ‘동작구’였고요. 용산은 미군기지가 있고, 구로나 금천은 노동운동이 역사도 깊고 잘 활성화되어 있는데, 동작구는 당시만 해도 정말 시민사회가 척박했거든요. 그래서 어느 정도 약간 오기도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그렇게 ‘난 지역운동을 할 거다’ 떠들고 다녔죠. 한 2년 동안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 했어요. 지역에 있는 청년들과 등산모임을 만들고, 조금 진보적인 지향을 담은 ‘캠퍼스 내일’ 같은 대학 내 무가지신문도 펴내는 회사도 하나 만들었고요. 결국 신문은 못 만들고 기획사 사업만 2년을 했지만요.

그 무렵 마침 한 학교선배가 진보정당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2년간 상근을 하며 지역위원회를 만들어보면 어떻겠냐” 제안을 해주셔서,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많은 실무나 지역활동 노하우를 익힐 수 있었어요. 그런데 결과적으로 정당활동은 머지 않아 그만두었어요. 그 속에 있어 보니, 정당의 지역위원회는 지역에서 지역민들이 필요로 하는 사회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중앙정당의 원칙이나 지침을 지역에서 구현하는 게 강하더라고요.
  
그래서 지역정당을 그만두고, 3달을 빈둥거리다가, 그때 단체 이름도 생각해 정하고, 사람  만나러 다니고, 충전의 시간을 보내다가, 2004년 3월 8일 드디어 단체 설립을 완료했습니다.

재흥 : 처음에는 어떤 방식으로 지역운동을 시작하셨나요? 2004년이면 대표적인 시민단체라 할 수 있는 ‘참여연대’의 활동도 10년 즈음 됐던 때라, 권력감시 활동, 1인 시위를 비롯해 여러 방법론들이 보편화 되었을 때이긴 한데요. 또 협동조합 등 사회적경제조직도 애초부터 설립계획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호근 : 당시 우연히 손우정 씨가 쓴 글을 읽었는데 “과거의 사회운동은 전국적, 주제별 경향성이 있었다. 미래는 지역에서, 삶의 영역에서 나로부터 바뀌는 운동의 경향성이 있을 것이다.” 라는 글귀가 있더라고요. 정말 100% 공감했습니다.
 
어찌보면 협동조합, 사회적경제라는 것은 혁명과 달리 ‘전복’을 하는 게 아니라, ‘구축’을 하는 사회운동이라고 할 수 있죠. 자기 삶에서, 자기네 지역에서 출발해 하나하나 성을 쌓아가는 것에 비유할 수 있는 거죠. 그렇게 일상 속에서 작은 변화들이 모여 성을 쌓아가야 하는 건데, 당시 사회운동은 서로의 성을 부수는 방식들이 많았어요. 또 사회운동, 노동운동 하는 분들이 퇴근하고 집에만 가면 완전 가부장적으로 변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많이 비판하잖아요. 처음 그 이야기를 듣고 완전 공감했어요. 제 자신도 내 생활 속에 그런 모순된 부분이 있다는 반성과 자각이 들었거든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 부단히 생활 속에서, 삶의 기반을 바꿔나가야 더 큰 사회변화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고요.

또 대학교 앞 사회과학서점을 들렀다가, 아무도 읽지 않는 먼지 쌓인 한 권의 책을 우연히  4천 원에 사서 읽고는 큰 충격을 받았죠. 그 책이 바로 ‘몬드라곤에서 배우자’예요. 이후 제게 큰 영향을 미쳤어요. 그때는 아직 지식들이 제 속에서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지역활동을 하는 내내 새로운 것들을 기획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묻어나왔던 것 같아요.
  
2004년에만 해도 ‘협동조합’ 이라는 개념도 잘 알려져 있지 않을 때이고, 저도 뭐가 뭔지 잘 모르고 당시에는 상점 몇 개로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불과 10년 사이에, 요즘 모든 사람들이 지역을 이야기하고 사회적경제와 협동조합을 이야기 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마다, 기가 막히고 신기해요.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온다는 말도 있긴 한데, 제 경우는 지역이라는 화두를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었는데 10년 후 우연히 시기가 맞아 떨어지기 시작했던 거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과정을 견디는 것은 굉장히 쓴 것이고, 정말 힘들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물론 실패도 많았고요. 그런데 요즘 사람들을 보면, 열매는 취하고 싶고 쓴 과정을 견디는 것은 피하려는 경향이 있는 것 같거든요. 이럴 때일수록,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 유행하는 것을 실행하는 게 아니라, 내가 옳다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실 요즘의 제 고민은 ‘어떻게 하면 이 흐름을 타고 더 성장할까’ 라는 생각이 아닌, ‘어떻게 하면 이 흐름을 비켜갈까.’예요. 분명히 사회적경제나 협동조합도 곧 거품이 빠질거라 생각하거든요.
  
재흥 : 그러고 보니, 올해 벌써 희망동네 협동조합이 5호점을 돌파했잖아요. 그야말로 폭발적인 성장세가 아닌가 싶은데요.
  
호근 : 바깥에 계신 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폭발했던 것은 아니예요. 3~4년 전부터 꾸준히 준비되어 오고 있었고, 실제로 2014년까지 10개의 사회적경제조직이나  협동조합을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해왔으니까요. 그 전 6년간 제가 지역에 계신 무수히 많은 분들과 관계를 만들어 오고, 신뢰를 쌓아온 과정이 있었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요즘 이런 반성을 합니다. 목표한 것에 비해, 그에 맞는 준비를 내실 있게 많이 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희 협동조합들 가운데는 구성원들 사이에 의견 충돌이 일어나는 조직도 있고. 사업전개나 조합원 모집에 난항을 겪는 조직도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모아, 반드시 사전준비모임을 만들고 계속  공부를 한 다음 협동조합으로 성장시켜 가려고 해요. 올 해 몇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굉장히 좋은 공부를 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회의에서 상근자들과 ‘개인 미션이 없는 상근자는, 그저 주어진 일을 처리하는 실무자일뿐이다.’ 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 어느 조직에서든 일하는 사람들 스스로의 미션을 찾는 것이 완료되면, 일은 이후에 저절로 풀려나가기 시작하거든요.

또 냉정하게 생각해 보세요. 협동조합 목공소가, 협동조합 카페가 문 닫으면 지역사회에 어떤 악영향이 있을까요? 아무 영향도 없어요. 카페가 망하면, 청소하고 화단을 가꾸면 어떻습니까, 지역을 위한 일이고 지역에 보탬이 되기만 한다면요.

사업이란 건, 아이템이란 건 때때로 잘 될 수도, 잘 안 될 수도 있다고 봐요. 중요한 것은 사업이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는 한 명의 사람이 남고, 경험이라는 자산이 남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 사업을 통해, 그 경험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였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남겼는가가 무엇보다도 중요하죠.
  
제가 처음 지역운동을 시작할 때 지역운동은 10년을 깔고 가야 한다고 주위의 많은 선배들께서 조언을 해 주셨어요. 그 말씀대로 저는 아직도, 제대로 된 지역운동을 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해요. 지역운동을 정말 잘 하기 위한 생생한 공부를 하고 있는단계인 거죠.

그래서 때로 “그게 무슨 협동조합이야.” 라는 비판을 들어도, ‘100점짜리 협동조합이 아니면, 협동조합이 아닌가? 2호점이 다르고, 3호점이 다르고, 앞으로 10호점은 또 다를 텐데.’ 라고 생각해요. 그저 부단히 반성하고 성찰하고 하나씩 개선해 나가면 되는 거죠.

평소에 사랑의 본질은 ‘그래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는 이야기를 자주 해요. 성공해서 혹은 어떤 좋은 대가가 있어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좋지 않은 조건 힘든 일 시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것일 뿐인 거죠.

지역운동도 연인들의 사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회적기업과 협동조합에 관심을 갖는 분들이 많으신데, 지자체나 정부의 지원이 아닌, ‘내가 이 일을 진정으로 왜 하는가’ 질문에 대한 스스로의 진지한 답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죠. 지원금이 끊기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직은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운동을 할 수 있고, 지역운동을 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재흥 : 그나저나, 연애는 정말 안 하시나요?

호근 : 보틍 그렇게 얘기 하죠, 조국과 사랑을 하고 있다고. (웃음)

사랑은 기본적으로 착각이라 생각해요. 행복한 착각. 또 그것의 본질이 이성간의 사랑에만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구요. 이성과의 사랑도 인연이 닿으면 한다는 주의인데요, 전 다른 유형의 사랑도 마찬가지의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때때로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닌데요, 다른 관계들과 사랑을 통해 보완과 충족이 되는 것 같아요. 또 사회생활을 해보니, 30대 후반의 제 나이 사회인들이 다들 엄청 바쁘잖아요. NGO활동을 하지만 저 역시도 마찬가지로 가장 일이 많을 때인 것 같구요. 그래서 40대 중반쯤이, 혹 인연이 되면 좋은 사람과 함께 하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재흥 : 말씀하신 것처럼 공동체 속에서 다양한 관계들을 맺고 계시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분들에 비해 외로움이 덜할 수도 있겠다 싶어요. 또 지금 가족과 함께 사시잖아요, 어제도 페이스북에 아버님과 한잔하셨다는, 부러운 사진 올리신 걸 봤는데, 아무래도 가족 공동체로부터 받는 힘도 있으신 것 같아요. 가족들께서 국장님 활동을 많이 지지해 주시는 편인가요?

호근 : 그런 것 같아요. 완전히 혼자 사는 싱글이었다면, 외로움이나 고립감이 지금과는 조금 달랐겠죠. 사실 가족은 지지라기보다는 포기를 하신 듯 하고요. (웃음) 가족들이 매우 화기애애한 것은 아니고 그냥 평범해요. 어머님도 불과 3년 전 까지도 제게 “언제 취직 할 거냐고” 물으시고, 제가 그렇게 오랫동안 비영리단체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는데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가족으로부터 받는 힘이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협동의 핵심이 기꺼이 서로를 위해 희생하고 내놓는 것이라 보는데요, 그런 면에서 요즘 들어 가족이 협동의 원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전통적인 가족도 소중하고, 그에 못지 않게 새로운 공동체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죠.

재흥 : 사실 유호근 국장님을 처음 알게 된 게, 크라우드펀딩 관련 기사를 발표했을 때, 그 글에 페이스북 댓글을 달아주셔서였거든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활동을 굉장히 열심히 하시는 편이잖아요? 협동조합 조합원모집뿐 아니라, 출자금, 기부금, 자원동원도 하시고…   때로는 민감할 수도 있는 여러 정치적 이슈들에 대해서도 가감 없이 솔직한 의견을 개진하시는 활동모습도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호근 : 저는 트위터는 하지 않고, 페이스북을 선호하는 편이예요. 제가 사용하고 느낀 바로는 트위터는 글로벌이고 페이스북은 로컬이다라고 생각했거든요. 트위터는 아무래도 짧게 자기 생각을 써서 올리다 보니 딱딱한 면이 있고, 기하급수적으로 사람들의 관계망을 통해  불특정다수에게 퍼져나가게 되잖아요. 반면에 페이스북은 관계를 맺고, 그것을 통해 원하는 사람에게만 이야기를 교류할 수 있고, 글자수나 내용에 대한 제약도 크게 없으니까요

또 저는 힘들고 고민하는 것을 글로 쓰면 쉽게 정리되는 습관이 있는데, 때로는 출자자를 만나고, 후원자를 만나기도 하게 되니, 소통이란 참 좋은 도구라는 생각을 자주 하죠. 가장 중요한 것은 일단 SNS를 하면,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게 된다는 거에요. 왜 일반 대화를 하다보면 꼭 삼천포로 빠지게 마련이고, 그렇지 않으면 경청을 하는 게 쉽지 않잖아요.

또 효율성도 높아서, 페이스북에 뭔가 써놓으면 다들 알고 있어 좋아요. (웃음) 원래 만나서 하나하나 세세하게 이야기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요즘은 만나면 다들 내용을 잘 알고 있어서 ‘아’ 하면 ‘어’ 하고 맞장구치거든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생각을 가감 없이, 활동의 허물이나 성과 모두를 기본적으로 오픈하고 소통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저도, 우리 조직도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고 믿기 때문이죠.


”사용자

해인 : 협동조합 활동에 참여하면서 느꼈던 것도, 무엇보다 조합원들과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요 어떻게 하면 그것이 가능할까요?

호근 : 일단 이 조직과 일에 대한 분명한 자기 확신이 있어야 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내놓을 수 있으면 사람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 정말 진심으로 내놓아야 한다. 사람들은 다 알아요, 진짜로 내놓는지 아닌지.

‘내놓는다’는 것도 살펴보면, 예전에는 과하게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의미했지만, 지금은 그런 게 아니예요. 다 내놓는 게 아닙니다. 그저 내가 한 번 더 전화하고 한 번 더 얘기하고, 연락 돌리고, 그런 겁니다. 생활운동이라는 것이, 지역운동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거죠. 하지만 현대사회를 사는 우리는 그만큼 내놓는 것도 쉽지 않잖아요. 내놓기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거죠.

요즘 마을 사람들을 대상으로 나눔교육을 해 보니, 쉽게 뭔가를 내놓지 못 하는 사람들은 자기확신, 자기자존이 약한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반면에 쉽게 뭔가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은, 다시 만들면 된다는 자기확신이 있는 사람들이고요. 슬픈 현대의 자화상인 것 같아요.

재흥 : 마지막으로 아직 자기확신이 부족한, 갈대처럼 흔들리는 20대 청춘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호근 : 제 20대를 뒤흔들었던 선배의 한 마디 충고가 있어요. “인간은 20대에 목표를 찾고, 30대에 준비를 마친 뒤, 40대에 비로소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갈 수 있다면 족히 성공한 삶이다.”

처음 듣고는 너무 충격받았던 게, 나는 20대에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  꿈이 있었기에 행복했지만, 한편으로는 불행하기도 했어요. 세상을 바꾸 수 없는, 그러지 못 한 나에 대한 절망, 실망, 자책감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불행해지는 가장 빠른 방법이 바로 비교하는 거거든요. 요즘 그렇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불행한 이유가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끊임없이 경쟁하고 비교하는 사회문화가 큰 걸림돌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 사회에서 40대에 자기가 진정 원하는 일을 하며 사는 거 성공한 인생이지 않나요? 그런데 20대에 욕심을 부리잖아요. 20대라는 나이는 나라는 그릇을 키우는  시기다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해요. 기회가 올 때, 그릇이 넓은 사람은 기회를 충분히 담을 수 가 있어요. 반면에 너무 꽉 차 있으면 채울 수가 없어요.

20대에는 우선 그릇을 크고 넓게 키우고, 돈키호테 같이 도전하고 행동하면서 내용물을 비워내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합니다. 그런 20대 청년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글 사진_ 이재흥 (사회적경제센터 선임연구원 weirdo@makehope.org)
              김해인 (사단법인 씨즈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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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경제 세대공감 인터뷰
(1)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일’로 해보자” _  (주)한국커퓨터재생센터 구자덕 대표
(2) “언니도 그랬어, 언니가 들어줄게”  _ 행복중심 생협연합회 김연순 전 회장
(3) 지역 속으로, 지역 속에서 _ 희망동작네트워크 유호근 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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