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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열차 충청편] 먹을거리의 힘!

2011 희망제작소 창립 5주년 프로젝트 박원순의 희망열차 ● [충청] 3월 22일 천안 KYC  북카페 산세는 1,2층은 카페로 쓰이고 있고, 3층은 천안 KYC의 보금자리이다. 산세에서는 천안 KYC가 주체가 되어 천안학교급식협의회,천안농민회, 충남사회적기업포럼 등의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공간의 힘을 보여주는 곳이라고 할까? 마치 신사동 가로수길에 있을 법한 아담하고 정겨운 공간의 모습이 산세에서 보여지는 것 같다. 커피와 책, 포럼을 담고 있는 산세의 공간은 사람들을 모으는 흡입력을 가진 곳이다. leftright ‘마을이 희망이다’ 강연이 있기 전 3층 KYC의 보금자리에서 원순씨와 천안국립대 학장님, 천안KYC 부회장님의 간소한 대담이 이루어졌다. 학장님은 사회적기업의 대한 관심과 지원의 뜻을 밝히셨다. 사회적기업 활동은 젊은 사람들만 하는 이미지가 강한데, 이번 계기를 통해 학장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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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열차 전라편] 광주의 무릎팍도사

2011 희망제작소 창립 5주년 프로젝트 박원순의 희망열차 ● [전라] 3월 10일 광주국제교류센터 현장에서 답을 찾는 실사구시형 민간 싱크탱크 희망제작소! 희망제작소에서는 창립 5주년을 맞아 ‘2011년 희망나눔 프로젝트’로 박원순 상임이사님이 전국을 돌며 지혜와 힘을 나누는 ‘박원순의 희망열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듣게 된 저희 직원들은 그 희망열차가 광주국제교류센터도 방문하길 요청하였습니다. 그동안 지역의 국제교류 비영리단체에서 일하면서 각자 나름대로 일과 삶에 대한 이런 저런 고민들을 해온 열혈청년, 교류센터 직원들은 희망제작소에 외쳤습니다! “원순씨를 교류센터에 빌려주세요!” 희망열차의 형식이 일방적인 강의로 한정돼 있지 않아, 교류센터에서는 ‘직원 카운슬링’이라는 형식으로 조직 운영에 대한 고민과 NPO활동가로서의 고민들을 함께 나누고 원순씨에게 조언을 듣는 워크숍을 요청했습니다. 교류센터에 도착한 희망열차 설레는 마음과 기대로 가득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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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열차 전라편] 엿새 동안의 발견

2011 희망제작소 창립 5주년 프로젝트 박원순의  희망열차 ● [전라] 전체 스케치 (3월 6일 ~ 11일)2년을 작은 시골마을에 숨어살았습니다. 제 스스로 “선택적 유배”란 거창한 수식어를 만들어내며, 세상의 가진 것을 내어놓고 나니 더없이 편한 마음으로, 그렇게 조금 낯선 삶을 살기로 하고 2년이란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직은 더 배워야할 것들이 많기에 제가 속하고 허락된 공간에 감사하며 살고있습니다. 그리고 2011년 어느날, 문득 세상과 소통하는 인터넷을 통해 희망열차란 의미있는 행사를 알게되었습니다. 동행의 의미가 좋았고, 함께 하는 분들의 마음이 느껴져 용기내 신청했습니다. 가슴 떨리는 기다림. 얼마만에 느껴보는 떨림인지 모릅니다. 부디 지역 곳곳에서 희망을 볼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지치고 힘들어도 분명 누군가는 그렇게 지역에 남아 의미있는 활동들이 지속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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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김수환 추기경님, 2차 갑시다!

박원순의 한 걸음 더 개인적으로 저는 김수환추기경님과 몇 차례 회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귀한 인연이었지요. 1980년대 후반 이른바 인권변호사 20여명을 명동성당 옆 수녀회 건물 지하 3층인가에 초청해서 저녁을 대접해 주신 것입니다. 수녀님들이 준비한 아주 깔끔한 뷔페였지요. 지하의 카타콤베 같은 신비한 분위기와 카톨릭의 장중한 분위기에서 회식은 시작되곤 했답니다.그런데 문제는 수녀님들이 만드신 밀주였습니다. 이걸 마시면서 분위기가 무르익어 가자 술 취한 변호사 한 분이 추기경님께 이런 소리를 했답니다. “추기경님, 2차 갑시다”라구요. 김추기경께서 크게 웃고 실제 2차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당시 양심수들을 위해 변론하던 변호사들을 사랑해 주시던 그 분의 면모가 드러나던 순간이었습니다.또 이런 에피소드도 있었답니다. 부천서 성고문사건이 터져 당시 안기부는 “이념적 냉혈녀의

[박원순] 인생 황금기

박원순의 한 걸음 더 며칠 전 김태동 교수를 만났다. 십여 년 전 상가에서 그를 만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차를 얻어 탄 적이 있다.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그의 차는 놀랍게도 포니였다. 아직도 현대자동차가 생산한 포니가 굴러다니는 것을 보고, 그리고 한 때 청와대 경제수석까지 지낸 사람이 포니를 타고 다니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했다.“과거 나는 문익환 목사를 잘 몰랐다. 친구인 김근태와 함께 그 분 댁에 새해 인사를 간 적이 있었다. 세배객 100여 명이 집을 다 못 들어올 정도였다. 나는 그 분이 인생의 전반기보다 후반기를 더 잘 살았다는 점에서 존경하게 되었다”그 말을 들으며 새삼 스스로 자세를 곧추세웠다. 문익환

[박원순] 발트해에서 불행한 나라의 아이들을 생각하며 통곡하다

박원순의 한 걸음 더 안승문. 교사-> 해직-> 서울교육위원. 이것이 그의 경력이다. 그는 교육위원으로서 스웨덴과 핀란드의 교육을 시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마지막 순간, 발트해를 보며 목놓아 통곡했다는 사람이다.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고통스런 학교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 나라 아이들의 상황과 비교하며 흘린 눈물이다. 그는 이윽고 단봇짐을 싸메고 이곳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에 유학을 왔다. 제대로 아이들을 교육하는 최고의 교육선진국을 배우고자 한 것이다. 그로부터 2년, 그는 이 지역의 여러 학교와 교육 현장, 교육자들과 교육 행정가들을 만나며 글도 쓰고 강연도 하면서 한국교육을 좀 더 나은 희망의 미래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어느 날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리고 이메일을 보내 왔다. 스웨덴과 핀란드의 교육정책과 현실을 보러 가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