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준] 날치기와 공권력 투입이 가능하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사회

박명준의 유럽에서의 사색

미디어법, 비정규직보호법, 쌍용자동차 사태, 용산 참사 등 한국 사회의 굵직한 현안을 놓고 힘겨운 공방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특히 그 내용을 차치하고 주요 논쟁 지점이 ‘직권상정이냐 아니냐’, ‘공권력 투입이냐 아니냐’ 등의 극단적인 수단의 선택 여부에 맞추어져 있는 것은 안타까울 뿐이다.

정치적 의사 결정과 사회 갈등에 대한 해결 방식에 있어, 우리 사회는 여전히 직권상정(혹은 날치기)과 공권력 투입과 같은 극단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빈도가 높다. 정확한 통계 조사를 해 보지는 않았지만, 지난 20여 년의 민주화 과정-심지어 그 하반기 10년 동안의 이른바 개혁 정부 하에서도?우리의 정치권과 사회적 주체들은 이 두 가지 문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다. 이른바 ‘불통 정부’로 통하는 이명박 정부 들어 그러한 극단적 수단에 의존하려는 정도는 더욱 높아져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한국 정치와 선진민주주의 정치가 극명하게 대조를 보이는 지점이다. 한국의 의회에서의 고함과 폭력 대결은 이미 세계 주요 언론의 선정적인 보도의 주된 소재로 즐겨 이용되고 있다. 필자는 약 10년 가까이 독일에서 생활을 하면서, 그 어떤 중요한 갈등과 대치의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합의 당사자가 파국적인 결론에 이르는 경우는 보지 못하였다. 그 어떤 경우에도 합의를 통해 문제 해결이 이루어졌고, 언제나 사회적 압력은 ‘합의’를 가장 큰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였다. 사정이 그러하다보니, 정치가들이나 사회문제의 당사자들은 합의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보이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무능력함으로 느끼게 된다.

[##_1C|1332945664.jpg|width=”500″ height=”313″ alt=”사용자 삽입 이미지”|미디어법 직권상정이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22일 오전 국회 본회의장으로 들어서려던 한나라당 김성태 의원이 중앙홀에서 점거 농성중이던 민주당 백원우 의원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2009.7.22 (사진제공: 연합뉴스) _##]좌와 우로 정책의 지향이 나뉘는 것은 현대 사회의 복잡한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서로 상이한 시각의 대표적인 범주이자 정상적인 분화다. 사회가 분화할수록 문제를 바라보는 상이한 이해가 생기고, 의견의 분화도 함께 동반된다. 리더들의 고민은 분화된 사고와 이해를 갖는 사람들을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합시켜낼 것인가에 있을 것이다.

정치적 의사 결정과 사회 갈등의 해결을 위한 수단을 선택하는 문제는 정책의 내용상에 있어서 좌냐 우냐의 문제와 또 다른 차원에 있다. 한마디로 좌파라고 다 같은 좌파가 아니고, 우파라고 다 같은 우파가 아니다. 합의적 우파도 있을 수 있고, 독단적 좌파도 있을 수도 있다.

구냉전 체제 하에서의 구도를 생각한다면, 서방 세계의 우파들은 상대적으로 합의적 우파였고, 동구권의 좌파들은 독단적 좌파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의 경우, 사실상 좌우를 막론하고 합의주의적 입장보다는 독단적 입장이 강했다고 생각된다. 특히 여당이 다수당일 경우 직권상정에의 유혹에 자주 넘어가곤 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우파보다는 좌파 쪽이 합의의 정신에 좀 더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예컨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 못 해 먹겠다’고 토로하며, ‘권력을 통째로 내 놓으라면, 고려해 보겠다’고까지 발언하며 ‘대연정’이라는 우리 문화에서는 매우 낯선 방안까지 거론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은 비록 그것의 현실성 여부를 떠나 합의를 통해 문제를 풀어보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실제로 지난 정부는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중을 두었던 이른바 4대 개혁 법안의 처리에 있어서, 끝까지 날치기를 하지 않고 정치적 교환과 양보를 통해 자기 제약적인 선택을 한 바 있다. 비록 여전히 국가보안법과 사학법의 잔존으로 여러 부작용이 있고 사회적 악습이 폐절되지 못하였지만, 분명 그러한 선택은 다시 합의적인 방식으로 문제들을 풀어나갈 여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고 싶다. 한번 합의는 또 다른 합의를 나을 여지가 있으나, 한번 날치기는 또 다른 날치기를, 한번 공권력에 의한 억압은 또 다른 공권력을 통한 문제 해결을 부를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

최근 미디어법을 둘러싼 대치 국면에서 박근혜 씨가 여야 합의를 종용하는 독자 행보를 취하였다. 필자는 박근혜 씨의 전체적인 정책 노선에 그다지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현재의 대치 국면에서 여야 간에 합의를 존중하고 우선에 두려는 목소리가 여권 내부에서 제기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그것이 박근혜 씨가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위한 포석의 차원이나 친박계 정파 내의 ‘내부 다지기’ 차원에서 취한 정략적 계산에 입각한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 힘센 여권의 정객들이 몰고 가는 강공 드라이브에 제동을 걸며 합의를 강조한 것은 일차적으로 반가운 모습이다.

정치가들이 날치기가 아닌 합의를 하도록 하고, 이해당사자들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공권력을 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사회적 압력의 행사가 필요하다. 좌와 우 모두에서 자신의 이해에 적합한 정책 수단의 실현 못지않게, 그것을 반대자들과 합의를 통해서 이뤄갈 것에 강조점을 두는 국민들이 다수일 것이다. 그들이 연합하여 ‘중도의 압력’을 형성하고 해당 진영 내에서 극단론자들을 설득시키는 방법이 필요하다.

특히 합의를 이끌어내는 정치가들에게 사회적으로 높은 점수를 주는 방식의 문화를 정착시킬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 일정한 주도적인 행동(initiative)을 마련하는 방법도 가능할 것이다. 이를테면 독일의 사회적 기업 중에 하나인 ‘국회의원 관찰’과 같은 곳은 국회의원 개인들의 의정 활동과 발언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고 명시하여 투표시마다 유권자들이 쉽게 판단의 근거로 삼을 수 있도록 한다.

좌든 우든 선명한 정책적 지향을 가진 사람만으로는 훌륭한 정치가로서의 덕목으로 충분치 않다. 어떤 장밋빛 환상의 정책을 갖고 있는 인물보다 자신의 경쟁자 내지는 반대자와 타협과 화합의 미덕을 발휘하며 그러한 정책을 수정해 나갈 여지가 있는 인물이 어쩌면 더욱 더 필요하다. 특히 강압적인 수단을 부르도록 만든 장본인들에 대해서는 심하게 말해서 사회적 낙인까지 찍도록 해서 정치가로서의 자질이 의심받도록 해야 한다.

미디어법, 비정규직보호법, 쌍용자동차 사태 등 모두 충분히 사회적 지혜를 모으면 분명히 합의를 통해 결론을 내릴 수 있다고 믿는다. 예컨대, 현행 미디어법의 문제에 있어서 결국 조·중·동의 방송 진출이 문제라면, 그리고 야권과 적지 않은 국민들이 그에 대해 심한 우려를 표하고 있고 그러한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는 보완 조치가 충분히 강구되지 못했다면, 비록 아무리 미디어 산업이 일자리를 창출하고 산업 경쟁력을 높인다고 할지라도 굳이 그 길에 목을 매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싶다.

야권 역시 미디어법이 결국 보수 언론의 방송 장악을 초래할 문제에 대해서 크게 우려를 하지만, 미디어 산업의 규모와 경쟁력 확대가 한국의 경제의 파이를 키우고 고용을 창출할 가능성에 대한 여권의 강조에 담긴 합리성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합리적 핵심을 고려한 타협책을 왜 수백명의 선량들이 수개월간 머리를 맞대면서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인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다.

합의는 한편으로는 정치권 전체의 문화적 자원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가 개개인의 정치가로서의 역량이다. 정치사회적으로 합의 중심적인 문화가 뿌리 내리도록 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사회 모두 새심한 노력을 기울이고 일종의 장기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 합의를 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의사 결정의 호흡 자체가 일정하게 길어야 하고, 더불어 그러한 의사 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한 경험적인 현실에 대한 정책 자료들이 풍부하게 존재해야 한다.

그에 앞서 정치가들 개인이 이 문제를 한국 정치의 고질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가급적 날치기와 직권상정이 아니라, 최대한 반대자들과 합의를 통해 풀 수 있는 길을 중시하고, 그것을 갈고 닦으며 역지사지하는 가운데 사안을 처리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지금까지 쪽수에 의존하는 강압적 의사 결정이 우리의 정치문화의 주류의 경로(path)였다면, 그러한 모습에서 과감히 이탈하는 경로 파괴적(path-breaking)인 선택을 오늘의 국회의원들에게 기대한다.

글_ 박명준 (희망제작소 객원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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