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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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상용 달력의 6월 19일 화요일에는 ‘봉이불닭’ 시공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간판디자인학교가 같은 날 오후 1시에 개교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봉이불닭’은 함께 운동하는 후배에게 의뢰받은, 인테리어가 포함된 공사였고 실내외를 최종 마감하는 공정이기에 현장을 잘 알지 못하는 일당기사들에게 선뜻 맡기기도 힘들었습니다.

금요일에는 용인시 수지에 체인점 공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일기예보는 더욱 심상치 않아 장맛비가 오락가락할 것이라는데, 마음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3일동안 혼자서 점심도 먹지 못하며 끙끙 앓고 있어야 하는 아내에게 무어라 얘기할 것인지 딱히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문제의 화요일 아침은 밝았고, “홍익대에서 뭔가 배울 것이 있다”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리고 전철을 탔습니다. 함께 동행한 한 총무님에게 넌지시 물었습니다. “이거 뭔가 기대해도 되는 겁니까? 홍대에서 한다니 혹시나 하기도 하지만…” 총무님 왈, “일단 뚜껑은 열어봐야 하지 않겠어?”

며칠전, 수주해 놓은 갈빗집 공사 설계를 진행하면서 가슴이 답답했습니다. 뭔가 색다르고, ‘멋진 간판’이라고 10년 동안 칭찬받을 수 있는 간판을 제작해보라는 광고주의 압력 아닌 압력에, 방부목에 채널을 얹은 컨셉트로 제안서를 만들어 제출했지만 광고주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다시 설계하겠다고 말했지만 뭔가 색다른 모티브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전철이 강을 건너갈 때 기도하듯 중얼거렸습니다. “이 강을 다시 건너올 때 부디 가슴에서 두근거림이 있어야 할 텐데…”
”?”희망제작소와 간판문화연구소, 그리고 간판디자인학교를 개설하게 된 배경에 대해 안상수 교수의 소개가 있었는데, 화려하지 않고 요란하지 않은 시작이어서 오히려 안심이 됐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멋부림은 싫어지더라”는 말이 잔잔하게 와닿았습니다.

내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는 것이 현실감 있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파주시와 홍익대가 맺은 모종의 약정으로부터 이런 프로그램이 기획되었다는 사실에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한국옥외광고협회는 들러리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아름다운 간판문화를 이끌어가는 중추적인 역할을 각 지방자치단체에 맡기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이런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제1강 ‘간판디자인의 요소’에서 듣게 된 수평·수직 모듈 개념은 앞으로 간판을 시공할 때 기본적으로 참조해야 할 만한 중요한 포인트였습니다. 무턱대고 시공했던 수 백, 수 천 개의 간판들이 아른거립니다.

제3강은 성균관대 김도년 교수로부터 ‘건축, 도시환경과 간판’이라는 주제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김 교수가 예로 들은 노유거리 사례는 지자체의 획일적인 도시미관사업에 있어서 모범이 될 만한 좋은 사례였습니다.

외국의 멋진 거리가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고, 많은 사람에게 좋은 추억과 함께 도시 전체에 활력을 불어 넣고 있음을 영상물을 통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간판이 어떻게 역할하고 기획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제4강은 삼청동 현장답사였습니다. 서울의 한복판에 이처럼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고 새삼스러웠습니다. 그보다는 그 허름한 건물에 걸려있는 간판들이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보통의 간판디자이너들에게는 피하고 싶은 악조건은 두루 다 갖춘 건물에서 마치 한 송이 꽃을 피워낸 듯한 멋진 간판들이 즐비했습니다. 유연성 원단에 익숙해진 지난 10여년 동안 디자인은 평면적일 수밖에 없었고 사각의 틀 안에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거리가 유연성 원단으로 뒤덮이는 가운데 간판 제작은 누구나, 너무나 하기 쉬운 업종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더구나 디지털프린팅 설비의 도입은 이런 상황을 더욱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삼청동 골목길은 마치 오아시스처럼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한 곳 한 곳이 주위 배경과 잘 조화되어 낡았어도 추하지 않았고, 녹슬고 찌든 것이 오히려 정감어렸습니다. 눈부신 원색과 필요 이상의 그래픽 테크닉이 범람하는 디지털 세계에서 아스라한 ‘추억으로의 여행’과도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은 정원을 가꾸어 놓은 유럽풍의 레스토랑에서부터 구두 판매점의 돌출사인에 이르기까지 기발한 아이디어와 소재의 다양함에 모든 참가자들은 탄성을 지르고 말았습니다. 중간에 고춧가루처럼 박힌 유연성 원단 간판이 그처럼 초라하고 기괴하게 보일 수 없었습니다. 커다랗고 원색적인 것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는 있겠지만 감동은 없습니다.

한국인의 미적 정서는 자연스러움에 있고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분방함에 기초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삼청동 답사에서 우리가 열광했던 것은 바로 그 미적 공감대가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되뇌어봅니다. 발걸음을 멈추게 하면서, 작은 정서의 교감을 이루어낼 수 있는 간판들이 있는 도시를 그려보는 것은 가슴 벅찬 즐거움입니다.
제6강으로 수강한 ‘이야기가 있는 디자인’은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디자이너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메마른 나뭇가지도 디자이너에게는 생명력 있는 소재일 수 있고, 그 바탕에는 감정이입이 필요함을 배웠습니다. 또 광고주의 의도를 제대로 읽어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제8강 ‘옥외광고산업 육성 발전 방향’을 들으면서 임병욱 회장의 현업에 관한 속깊은 인식을 공감할 수 있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옥외광고 관련 인터넷 교육방송을 제안하신 것과 지자체의 획일적인 도시미관사업에 업계 일선 현장의 목소리를 전달해야 한다는 것에 크게 공감했습니다. 특히 한국옥외광고협회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신 것은 너무나 현실적으로 가슴에 와 닿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정된 토론과 수료식 이후에 이어진 회식자리가 끝나고 전철을 몸을 실었을 때, 아내의 지친 목소리가 귓전을 맴돕니다. “내일 어떻게 할 건데?” “……”

전철이 한강 위를 건너갑니다. 가슴은 분명 뛰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있어 자꾸만 솟구치려 합니다. 변화하는 것, 새로 태어나는 것에 대한 이미지가 이것저것 떠오릅니다. 이 한강 다리가 연결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해봅니다. 아내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일보다 더 긴 내 ‘일’이 있어!”

”?”* 6월 28일「한국광고신문」 칼럼란에 기고된 글을 필자의 동의를 받아 게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