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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숙의 낮은 목소리

올 3월엔 기형도 시인의 이름을 부르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가 떠난 지 20년, ‘여전한 현재형’이며 ‘신화’인 그를 추모하기 위해 유명한 문인들이 엮은 기념 문집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읽으며 그냥 혼자 옛일을 생각해보려 했습니다. 물론 그 회상 속엔 이루지 못한 로맨스나 문우(文友) 사이의 뜨거운 추임새 따윈 없습니다. 함부로 뱉은 말에 대한 부끄러움과 반성이 있을 뿐이지요. (2007년 3월 14일자 ‘김흥숙 동행’ 참조)

마음을 바꾼 이유는 부탁이 있어서입니다. 기형도의 나라에 막 도착한 동갑내기 정 씨를 특별히 돌봐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서입니다. 물론 그곳에도 이곳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이 있겠지만 진정으로 정 씨를 보듬어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기형도 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1982년 12월 시인이 쓴 편지 속 이런 구절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나는 지금 슬픔에 잠겨 있다. 그러나 슬픔이, 가난이 뭔지 모르는 사람도 있단다. 안다면 미학적이거나 냉정함을 가장한 그것! 네 말에 의하면 허영적 감성! 그런 사람들과 이야길 하다보면 자꾸만 목이 조이는 것 같아. 목도리를 하고 가서 목도리 탓이라고 돌려버렸지만 그러나 가난을 모르는 사람도 있다! 그래 가난!이다… 우리는 가난(!)을 호주머니 속에 접어두거나 장롱 밑에 쑤셔 박지만 가끔 이삿짐을 꾸릴 때마다 딸려 나오는 낡은 사진 같은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가난을 모르는 사람들은 가난을 만날 뿐이다. 그리고 기행할 뿐이다…”

기형도는 1960년에 연평도에서 태어나 시흥에서 살았습니다. 교사와 공무원을 지낸 후 농사를 짓던 아버지가 1969년 뇌졸중으로 쓰러지면서 가난이 그의 목을 조이기 시작했습니다. 1979년에 연세대에 입학하여 1985년 2월 졸업했고 졸업하기 몇 달 전 중앙일보 기자가 되어 정치부, 문화부를 거쳐 편집부에서 근무했지만 마음 깊이 스며든 가난에서 벗어나진 못했습니다. 1985년 4월에 발표한 시 “엄마 걱정”이 기형도 속 가난을 말해줍니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아주 먼 옛날/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념문집의 제목이 된 “정거장에서의 충고”는 1988년에 발표한 시입니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마른 나무에서 연거푸 물방울이 떨어지고/나는 천천히 노트를 덮는다/저녁의 정거장에 검은 구름은 멎는다/그러나 추억은 황량하다,…/어쩌다가 집을 떠나왔던가/그곳으로 흘러가는 길은 이미 지상에 없으니…/내 희망을 감시해온 불안의 짐짝들에게 나는 쓴다/이 누추한 육체 속에 얼마든지 머물다 가시라고/모든 길들이 흘러온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

정 씨는 기형도와 같은 양의 시간을 살았지만 시인도 신화도 되지 못했고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매스컴은 그를 그냥 ‘정 씨’ 혹은 ‘정아무개 씨’로 불렀습니다. 쌀농사를 짓는 부모는 1998년 아들이 고려대에 입학할 때부터 학비를 대기 힘들었고 결국 정 씨는 1학기만 마치고 휴학, 이듬해 2학기까지 복학하지 못했답니다. 2000년 자퇴하고 등록금이 조금 적은 수도권 대학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하다 이듬해 다시 고려대에 재입학했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한 학기 만에 입대했고 제대 후에도 등록금과 씨름하다 2006년 다시 자퇴하고 작년 8월엔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고시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고시원에서 가장 싸고 작은 한 평짜리 방이었지만 지난 연말 아르바이트가 끊긴 후엔 그 방값도 내지 못하다 1월 중순 고시원을 떠났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가출 신고를 한 건 1월 30일, 밤섬 모래사장에서 시신이 발견된 건 3월 9일. 경찰은 주검의 상태로 보아 20여일 전에 숨진 것으로 추정합니다.

정 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게 무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지난 10년 동안 그가 살아온 길을 들여다보면 아무래도 가난입니다. 다니고 싶은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한 가난 말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매우 밝은 성격이던 동생이 학교 자퇴 이후 사람 만나는 걸 꺼렸다는 형의 말에서 정 씨의 좌절, 분노와 절망이 느껴집니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는 지난 주 교내 민주광장에서 정 씨를 추모하는 기자회견과 추모대회를 열고 등록금 인하를 요구했습니다. 14일자 인터넷고대신문(Kukey)엔 “정씨의 현실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며 “이러한 삶이 누군가에게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를 알리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정태호 안암총학회장의 말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 측의 생각은 다르다고 합니다. Kukey의 기사 일부를 옮겨 봅니다.

“본교 학생처 관계자는 ‘기부금을 통해 모은 경제위기극복특별장학금 50억 원으로 사실상 2.3%의 등록금 인하 효과가 있는 것’이라며 ‘현재의 등록금은 사실상 인하된 것이나 다름없다’며 반박했다. 또한 예산절감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 등록금을 동결시킨 상황에서 등록금 인하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씨의 죽음에 대해서도 안암총학 측이 정확한 정황 파악 없이 등록금 문제와 연결 짓는 것 같다며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학교를 다니기 위해 몸부림치던 선배의 때 이른 죽음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고려대 학생들이 고맙고 사랑스러운 만큼, 그들이 정확한 정황 파악 없이 정 씨의 죽음과 등록금 문제를 연결 짓는 게 이해할 수 없다는 학교 측이 안타깝습니다. 나이란, 경제란 이런 것일까요? 의당 느껴야 할 슬픔과 부끄러움조차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차갑고 복잡한 산수일까요?

어쩌면 올 3월 이렇게 흐린 날이 많은 건 우리가 양양한 햇빛을 누릴 자격을 잃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어쩌면 저 하늘너머 맑은 곳에선 벌써 정 씨의 젖은 어깨를 감싸 안은 기형도가 “노인들”을 읊조리며 위로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부디 너무 일찍 ‘떨어진’ 두 청년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기를 기원합니다.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인 우리가 한없이 부끄러운 봄날입니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 이 기사는 자유칼럼에 함께 게재합니다.


코리아타임스와 연합통신 (현재의 YTN) 국제국 기자로 15년,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으로 4년여를 보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글을 쓴다.
현재 코리아타임스, 자유칼럼,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중이다.
저서로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와 “시선”이 있고, 10여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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