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 김이혜연 (kunstbe3@makehope.org)


사전에도 없는 말, 새로운 길을 만들다
           

”사용자
                                                           
“저는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에서 일하는….” 이라고 소개를 하기 시작하면 열에 아홉은 “사회…. 뭐라구요?” 또는 “무슨 창안이라구요?” 라고 되묻기 일쑤였다. ‘사회’도 ‘창안’도 익숙한 단어지만 ‘사회창안’이라는 조합은 낯설기 그지없었으니, 그 뜻을 묻는 질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회창안은 ‘어떤 방안을 처음으로 생각해 냄’이라는 ‘창안’의 정의 앞에 ‘사회적으로 이익이 되는’ 이라는 수식어를 추가한다. 그래서 사회창안이란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안을 생각하고 그것을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그리고 함께 풀어나가는 모든 과정이다. 이 사전에도 없는 말은 지난 3년간, 우리 사회에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재미난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의미 있는 변화들을 만들면서 고유명사이자 보통명사가 되었다.


중요한 질문을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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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창안은 ‘모든 사람이 정책입안가’ 라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매일매일의 경험 속에 우리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매일 매일의 삶, 그 구체성으로 시선을 이동시키자 지금껏 대수롭지 않게 혹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온 많은 것들이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되고 질문되기 시작했다.

키가 작은 사람의 경험은 전철 손잡이의 높이가 적정한지 묻는다. 그리고 한두 개 손잡이의 높이를 조금 낮추어도 좋지 않겠냐는 제안을 한다. 그래서 알아보니 전철 손잡이의 높이는 성인 남성의 평균 신장을 기준으로 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전철을 타는 성인 여성은 과연 손잡이를 편히 잡을 수 있을까? 어린이는? 노인은? 장애인은? 다시 말해 성인 남성이 아닌 사람들은 손잡이를 편히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전철이 모든 사람을 배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높낮이 다른 손잡이’ 제안은 공공재를 만드는 데 있어 누구의 경험이 기준이 되어 왔는지를 질문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가 당연하게 기준으로 삼아왔던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인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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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낮은 손잡이, 모두를 배려하는 전철을 만들기 위한 첫걸음

시각장애인은 점자 지원이 되는 ATM을 제안했다. ATM가 터치스크린 방식으로 점차 바뀌면서 이를 이용하는 것이 점점 힘들게 되었기 때문이다. 발전된 기술이 터치스크린을 만들었지만, 터치스크린의 등장으로 시각장애인은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서는 안 되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반가운 기술적 진보가 누군가에게는 진보는커녕 퇴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안전한 보행을 위해 만들어놓은 주정차방지돌기둥(이하 볼라드)이 시각장애인에게는 거대한 흉기라는 인식도 시각장애인의 경험을 통해 알려졌다. 이를 통해 비장애인의 안전한 보행권은 모두의 안전한 이동권을 확보하는 것 속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중요한 앎이 가능하게 되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의 목소리도 사회창안센터를 통해 모이고 퍼졌다. 한국에서 수십 년 동안 거주하면서 세금도 납부하고 있는 주한외국인 노인에게는 65세 이상 노인에게 제공되는 지하철무임승차권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 한국에서 나고 자란 화교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경험에서 나온 제안들은 복지서비스가 국적을 중심으로 제한되고 있으며 그것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처럼 초기임산부, 영유아 양육자, 지방에 사는 사람들, 노인 등 다양한 경험과 입장을 가진 시민들이 자신의 경험을 렌즈로 하여 바라본 세상에 대해 와글와글 이야기를 하였다.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많은 부분들을 상대화시켰다.


재미난 상상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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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 배기통을 땅으로 향하게 해서 그 열로 겨울철에 얼어붙은 미끄러운 도로를 녹인다면? 헬스장에 있는 운동기구에 발전기를 달아서 전력을 모은다면? 보온 기능이 있는 밥상이 있다면 맞벌이 부부의 자녀들도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보도블록에 공사한 날짜를 새겨 넣으면 보도블록 굴착 공사가 줄어들지 않을까? 가축의 배설물에서 나온 메탄가스가 취사용으로 이용된다는데, 그렇다면 방귀로 가는 자동차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다소 무겁고, 진지하고, 심각한 제안들도 많았지만, 이처럼 기상천외한 상상, 재미난 아이디어들도 끊임없이 제안되었다.
                                                                                                                                                                                                                                                                                                       보도블록에 생년월일을 새긴다면?

말도 안 되는 제안이라고? 이를 얼토당토 않는 생각들이라 치부해버릴 수 없는 것은 그 엉뚱한 상상이 그리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태적인 순환이 일어나는 지속가능한 사회, 소외된 자들이 없는 사회, 모두를 배려하는 사회다.

이러한 재미난 상상은 비록 지금 그 상상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고, 또 꿈꾸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 구체적 현실이 될 거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리고 생각의 경계를 지우지 않고 마음껏 상상하고 그것을 꺼내 많은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 하나쯤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사회창안은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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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수수료를 미리 알려주는  캐나다 한 은행의 ATM기 /  다국어 분유 표기 시작 / 광역시 ‘빈좌석없음’ 표시. 수수료를 미리 알려주는  캐나다 한 은행의 ATM기 사진은 한국의 시중은행을 설득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사회창안센터에 올라온 많은 제안들은 현실에서의 구체적인 변화를 만들어냈다. 주민등록상의 내용을 변경했을 경우 자동차등록상의 내용도 자동 변경되도록 제도가 바뀌었고, 사망신고 후 필요한 후속절차의 내용을 동주민센터에서 공지하도록 제도 개선이 이루어졌다. 광역버스에 빈 좌석이 없을 때는 만석임을 알리는 표시를 하는 등(경기도 시범실시) 시민들의 제안은 크고 작은 불편들을 해소하거나 감소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ATM을 인출할 때 명세표 출력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수수료도 미리 공지하여 인출 여부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시?군?구립 수영장에서 여성의 생리를 고려하는 요금체계가 도입되었고, 아이스크림 및 빙과류에도 제조년월일이 표기되었다. 또 5만원 신권에 시각장애인 식별 표지가 대폭 강화되었으며 이주여성을 위한 다국어 분유 복용법이 유업회사 홈페이지에 실리게 되었다. 사회창안을 통해 작지만 중요한 권리들이 하나씩 제자리를 찾고 있는 중이다.


‘사회창안 시즌 2’를 준비하며

“예전에는 속 터지는 일, 답답한 일을 겪으면, 혼자 분을 삭이고 말았다면, 지금은 생각을 정리해서 사회창안센터에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예전에는 만약 문제가 있다면, 문제로 그쳤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은 해결할 방법부터 생각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한 사회창안센터 회원과의 대화 중에서)


 
사회창안을 통해 수많은 변화들이 만들어졌지만 구체적인 변화만큼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것은 바로 이 부분, 불만이 그 자체로 머무르지 않고 무언가를 바꾸어내는 좀 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사회창안이 시민들의 불만, 상상, 제안을 정책으로 전환시키는 통로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사회창안의 한 형태인 시민제안이 굉장한 유행이 되었다는 것도 중요한 변화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정부 기관을 비롯해 많은 지자체 심지어 청와대까지 시민 제안을 일상적인 프로세스의 하나로 두고 있다는 것은 시민제안이 형식적인 이벤트에 그칠지라도 시민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우리 사회의 공통의 인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것 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들은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의 활동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곳곳에서 참여의 가치를 실현하고 구현하고자 한 노력의 축적을 통해 사회창안이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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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제안/ 사회창안 현실화의 모델을 넘어

지금까지 사회창안은 “제안하세요. 사회창안센터가 현실화합니다.”라는 모델이었다. ‘시민의 제안’과 ‘사회창안센터의 현실화’라는 모델은 본의 아니게 시민의 역할을 제안 자체에만 가두는 이분법을 만들었다. 시민평가단를 비롯한 다양한 시민서포터즈 그룹의 조직을 통해 시민참여의 통로와 방법들을 모색했지만, 안타깝게도 모색에 그친 부분이 없지 않다.

지금 다시 긴 호흡으로 긴 발걸음을 떼면서 사회창안센터는 사회창안의 새로운 모델을 구상하고 있다. 그것은 시민 제안과 사회창안센터의 현실화라는 이분법적인 모델을 넘어 ‘이런 문제가 있는데, 당신이라면 어떻게 풀겠어요?’ ‘이런 캠페인을 조직해보실 분, 계신가요?’ 등으로의 이동이다. 즉 시민과 함께 문제를 발굴하고, 그를 해결해가는 구체적인 방법들까지 시민들과 함께 찾아가보려는 것이다.

정책제안을 통해 관계기관을 설득하는 작업 말고도 사회창안의 다양한 솔루션 모델을 찾고 만드는 일, 이 모든 일을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 가려고 한다. 이 실험이 즐거운 실험이 될 수 있도록, 많은 응원과 관심 그리고 참여를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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