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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의 희망탐사 59>

김정택 목사. 목사는 흔히 교회와 동일시되는 단어이지만 그는 교회에서 하는 목회가 아니라 농사일로 하느님의 사역을 다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위장취업을 통해 노동운동에 나선 그는 이후 동구권이 몰락하고 군사정권이 무너지면서 한국 사회가 새로운 목표와 실천을 요구하?있을 때 귀농을 결심했다.

그런 배경으로 그는 1996년 경북 봉화로 귀농했다가 자리를 옮겨 결국 강화에 터를 잡았다. 노동운동에서 농민운동으로 전환을 한 그는 강화에서 구체적 결과와 성취를 이루어냈다. 친환경농업의 확대, 학교급식조례의 제정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의 꿈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사회적 기업으로서의 고령농민 지원사업, 근교에 도시민들을 이주시키는 귀촌 전략 등 그의 아이디어를 듣고 있노라면 농업에도 또 하나의 희망의 뿌리가 내릴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노동운동판에서 농촌현장으로
-러시아와 동유럽이 무너져 사회주의 대신 제3의 길을 찾다

”?”김정택 목사는 애초 노동운동가였다. 1980년대 많은 이들이 그랬듯 그는 위장취업을 하고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후 소련이 무너지면서 그는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농업에서 자신이 가야할 길을 찾았다.

“노동운동판에 있던 사람들이 러시아 무너지고 동유럽 무너지는 것 보면서 새로운 제3의 길이 무엇인가 그런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때 목회자 부부들이 전국의 공동체운동을 보자고 해서 전국을 돌았는데 유기농하는 곳을 포함해서 제3의 사명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요가를 하면서 어떻게 하면 음식을 바로 먹을 것인가 연구를 했던 그는 음식에 대해 남다른 접근을 했다. 생산을 모르고 바른 음식 먹는 법을 지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운동권에서의 대립과 견해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버리는 수련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농촌으로 향했다.

“흙은 속이지 않으니까 농촌에서 바른 수련을 할 수 있겠다” 싶어 봉화로 떠난 것이다. 당시에는 노동운동판인 인천을 떠나야 수련도 하겠다 싶어 내린 결정이었다. 그래서 봉화로 향했지만 곧 수도권의 도시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곳에 귀농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 강화로 터를 옮겼다.

김정택 목사는 유기농에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도시형 유기농으로 스님들처럼 자신의 음식을 직접 생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상업적 유기농으로 판매를 목적으로 유기농산물을 생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급도 하며 직거래도 하는 혼합형 유기농이 있다. 김정택 목사는 세 번째 길을 택했다. 그래서 대도시 주변인 강화에 터를 잡았다.

“저는 바닥에서 농민과 함께 시작하자는 생각이 있어 자급도 하지만 직거래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소농민과 함께 친환경농업을 하면서 바닥에서 힘이 올라오도록 역할을 해야겠다는 것이었죠. 마침 강화도가 인천광역시로 편입이 되어서 인천의 노동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강화도로 오던 때였습니다. 저는 목적의식적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도시의 음식쓰레기를 농촌으로 가져와 닭을 키우고 그 계란을 다시 도시로!
-음식물쓰레기를 해결하는 순환방식의 실험과 실패

김정택 목사는 농촌과 가까운 도시가 유기농 생산과 소비를 함께 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유기농의 장(場)을 함께 형성해야 하고, 서로 분리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는 도시의 아이들이 강화로 오게 하는 농법이 무엇일까 고민했다.

“강화는 벼농사가 핵심입니다. 벼농사부터 접근하자고 해서 청둥오리농법부터 배워서 강화에서 1997년에 처음으로 시작했습니다. 1996년대 말에 사건이 하나 터졌는데 김포매립지쓰레기 매립장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를 기화로 김포 주민대책위가 생겨 젖은 쓰레기, 바로 음식물쓰레기 차량들을 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환경운동 등이 한 사람 한 사람 교육을 통해 늘어난 것인데 음식쓰레기문제는 모든 도시 시민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구나’하는 생각이었죠.

그래서 당시에 음식물쓰레기가 농촌과 결합해서 퇴비와 사료가 되면 도시와 농촌이 결합해 하나의 공동체가 되겠다고 건방지게 생각했습니다. 음식물쓰레기협의회를 인천에?조직하고 아파트단지와 결합해서 아파트단지의 음식찌꺼기를 강화도에 날라서 닭을 먹여 그 계란을 아파트에 파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몇 농가와 닭을 키우면서 음식물찌꺼기 나르는 일만해도 일자리가 만들어지겠다고 보았습니다. 그때는 생 음식물을 가져다가 하니까 처리과정에서 냄새가 났고 닭이 다 먹지도 못했습니다. 동네 노인들이 몰려와 시비를 걸기도 했죠.

그 후 음식찌꺼기가 기계화되기는 하였지만 실제 비용이 많이 들어 남은 음식물을 통한 도시와 농촌의 순환작업은 중단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화도 북쪽에 음식찌꺼기를 가지고 돼지를 먹이는 분이 계셔서 성공해서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김정택 목사는 정부의 정책에 불만이 많다. 쓰레기 처리를 중소규모의 농업인들에게 맡기지 않고, 대규모 업체로만 지정하다 보니 음식물 쓰레기를 이용한 유기농업의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즉 농민들이 순환의 길을 찾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이 그때그때마다 변합니다. 음식물쓰레기를 가지고 사료화 하다가 그 다음으로는 퇴비화 하였습니다. 정부정책과 부딪히는 것이, 정부정책은 항상 산업화하고 시장경제형이고 개인 업체를 지원하는 쪽으로 갑니다. 농민을 지원해서 기계화해 주는 것이 아니라 정부정책 자체가 지자체와 대규모화해 버립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는 개인 기업체와 함께 해 버리는 것입니다.

농민이 도시민과 결합해서 순환해서 퇴비화하고 사료화하는 정책을 안 쓰고 돈 많은 기업이나 업자가 그것을 건조해서 퇴비화하거나 쓰레기로 처리해 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음식물 쓰레기는 김포매립지에 못 들어가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지자체가 수십억 원을 들여 시설을 만들거나 돈 있는 업체가 시설을 만들고 돈을 받아가며 처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처리는 되고 있지만 제대로 안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료화는 포기하고 퇴비화하거나 소멸형으로 하고 있는 상황인데, 대단한 자원을 순환시키고 있지 못한 것입니다.”

급식조례운동으로 친환경쌀의 생산이 늘고 소비가 확보되다

강화에 터를 잡은 뒤 김정택 목사는 여러 실험을 하게 된다. 우선 청둥오리농법으로 벼농사를 시작하면서 농민들과 함께 강화환경농업농민회를 조직했다. 청둥오리 농법으로 짓는 농지는 1999년 5만 평 정도로 늘어났는데 다시 우렁이농법을 하면서 아주 많이 늘어났다. 그리고 1999년부터 한살림과 계약재배를 시작했고, 2002년부터는 한살림 등 여러 생협과 직거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 힘을 바탕으로 2002년 학교급식 조례운동을 시작했다.

“제 처가 영아원과 유아원을 오래 전부터 했는데 노동운동 하던 사람들이 결혼하면서 아이를 낳으면 돌볼 사람이 없어서 공동육아를 하게 되었지요. 우리 집은 언제나 육아원이 되었죠. 아이들에게는 먹거리가 절체절명의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는 안전한 먹거리가 주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친환경 농산물의 생산이 늘면서 직거래로는 더 이상 안 되는 상황이 벌어져 가장 친환경농산물이 필요한 학교급식을 통해 친환경농산물을 소비하는 운동을 처음 제안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시인들이 이기적인데 농촌 살리자는 캠페인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농촌문제가 도시문제화 되어 있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보았고 바로 그것이 급식문제였습니다.

지금은 아이들이 도시에 몰려 있으니 급식은 도시 문제였고 급식문제를 제기하면 도시 사람들이 관심을 안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중앙정부보다는 지자체를 움직이는 운동에 역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정경식 씨의 100인 100일 걷기 운동과 연결되었습니다. 이 100인 100일 걷기 운동이 바로 급식조례운동과 연결되어 급식조례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친환경 농산물로 아이들에게 급식을 제공하자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조례 제정 전부터 김정택 목사는 시장을 만나 친환경농산물시범학교를 만들자고 제한하기도 했다. 그런 노력들이 모아져 2004년부터 강화도에서 생산된 친환경쌀을 모두 급식에 납품했고, 이후에는 남는 쌀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인천의 시민단체와 학부모들은 예산을 올리라고 요청하였는데 시에서는 지역 안에서 생산되는 친환경쌀을 소비할 수는 있지만 다른 지역의 쌀은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강화도의 친환경쌀을 많이 생산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007년에는 친환경쌀 재배지가 230만평 정도로 늘었다. 그러나 그렇게 늘어났어도 강화의 전체 논의 3% 정도밖에 안 된다고 한다.

이처럼 농민들이 직접 생산하고 공급하는 친환경 쌀로 학교급식을 하다 보니 일반 쌀만 취급하던 농협이 끼어들기 시작했다.

“(활동을 하다보니) 농협이 문제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강화도 환경농업농민회가 인천 학교에 납품을 하는데 농협 소속의 친환경농민들이 환경농산물을 농협에 넘겨주어 농협이 이를 갖고 학교급식에까지 침투해 들어왔던 것입니다.

그동안 농협은 일반 쌀만 다루어 왔는데 학교급식으로 친환경쌀이 납품되기 시작하니 이제야 손을 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무래도 환경농업농민회를 마치 운동권처럼 사시로 보는 교장들이 농협의 납품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동안은 우리가 농민들로부터 친환경농산물을 수매해왔는데 농협이 수매를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농민들이야 아무 것이라도 좋으니까 농협으로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농협과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농협은 돈 가지고 장난치는 신용사업처럼 농민의 자주적인 발전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농협 개혁문제가 최고 숙제로 다가왔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저는 학교급식지원센터가 해결책이라고 봅니다. 지자체 아래 학교급식지원센터를 두고 거기를 통해 공급하자는 것입니다. 유통기관이 직접 학교와 계약을 체결하면 유통회사와 학교장 사이의 야합도 생기고 부정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학교급식지원센터를 설치해서 학교와 계약을 체결하면 투명해질 것입니다.”

농촌이 희망이 되기 위하여
-지역자원순환농법의 확산과 우렁이 양식장 건설, 그리고 고령농민을 위한 사회적 기업

김정택 목사는 농사의 시스템을 강조한다. 순환농업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야 자원 낭비 없이 친환경농산물을 생산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농사의 시스템은 돼지나 한우 등을 키우는 축산업과 친환경쌀을 결합하는 것이다.

쌀겨 등 농업부산물은 지역축산업의 사료로 들어가고 축산분뇨는 지역 내의 친환경농업에 사용한다는 것인데 이를 위해 김정택 목사는 축산단체, 농업기술센터 등을 끌어들여 지역자원순환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있다.

또한 김정택 목사는 유기농뿐만 아니라 농촌을 희망의 장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그는 “농촌이 희망이 되기 위해서는 유기농업도 중요하지만 새로운 교육운동이 농촌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김정택 목사는 우렁이 양식장을 만드는 일을 추진 중이다.

“산마을 대안고등학교라는 대안학교가 있는데 제가 이사로 있습니다. 홍성의 풀무고등학교에서 오리농법을 해서 산파역을 했듯이 강화에서 산마을대안학교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강화에서 우렁이농법을 하면서 매년 3억 원이 들었는데 산마을학교의 자립도 되고 대체도 되게 할 겸으로 우렁이 양식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40%의 자체 예산과 지자체 지원으로 산마을 농업회사법인을 만들고 우렁이 양식장을 만들었습니다. 지역학교와 지역농민, 지자체가 공동으로 하는 협력사업인 셈입니다. 이렇게 지어도 60만 평의 우렁이 논밖에 소화할 수 없습니다.”

최근 김정택 목사는 사회?일자리 확장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마리교육생협과 강화도환경농민회가 연합해서 50인의 사회적 일자리를 따냈는데,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고령농민을 위한 영농지원사업과 안심먹거리 나눔사업’이 그 명칭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도시형, 공장형 사회적 일자리가 대부분이었지만 김정택 목사는 사회적 일자리를 농촌에까지 확산시켰다. 물론 정시에 출근하고, 퇴근하는 도시형 일자리와는 많이 다른 농촌형 사회적 서비스 일자리를 설득시키는 것이 힘들었지만 말이다.

“노동부에서는 고령농민을 55세 이상으로 잡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현재의 농민60%는 고령농민이 됩니다. 정부 정책이 1만 평 이상의 전답을 가진 영농후계자에게 몰아주겠다는 것인데 젊은 영농후계자들은 농사일이 많으니까 모두 개인이 농기계를 모두 소유하고 있습니다.

크게 농사짓는 젊은이들은 자기 농사지으며 농기계를 다 소유하고 노인들의 농사를 지원하면서 사용료를 비싸게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농기계가 적어도 한 해 농사에서 4번은 쓰이는데 현재 농촌은 개인이 기계를 소유하게 하고 그 사람이 소규모 또는 노령 농민을 착취하는 구조입니다.

저는 농협이 경제사업의 일환으로 월급을 주면서 영농기계사업을 운영하면서 고령농민에게 봉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마을공동체가 유지됩니다. 농촌에서는 고령농민을 위해 일하는 것 자체가 사회서비스라는 것을 우리가 입증하려 합니다.

농촌에서의 사회적 일자리의 우선순위는 고령농민을 위한 영농지원에 두어져야 합니다. 농협이라고 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데 그 대표적인 예가 용인의 원삼농협에서는 영농기계를 사서 그 마을에서 공동으로 운영을 하게 하는 아주 좋은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농협의 개혁이 쉬운 것이 아니지만 이렇게 하나의 모델을 만들면 가격의 인하를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도시민을 농촌에 데려올 수 있는 방안
-생태영구임대주택을 만들고 어린이집을 만들어주자

농촌을 희망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굳이 귀농이 아니더라도 농촌에 사람 사는 냄새가 나게끔 만드는 것도 김정택 목사가 스스로에게 설정한 과제다.

“어떻게 해서든지 영아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농촌에 내려오도록 해야 합니다. 과거에는 농사짓는 사람만 오라고 했는데 그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무조건 내려오라고 해야 하고, 그래서 도시 근교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점진적입니다. 장성의 한마음공동체가 사람으로 미어터진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광주에서 가깝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이 점차 퍼져나갈 것이고, 그래서 강화의 임무가 중요합니다. 저는 그 방안으로 농촌에 20내지 50가구의 생태영구임대주택이 지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임대주택에는 반드시 어린이집이 있어야 합니다. 도시의 비정규직 등의 사람들이 한 달에 임대료 5만 원만 주고 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오기 어려우면 남편은 돈 벌고 부인이 아이 데리고 와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농촌은 희망이라는 이름과 이미 멀어진 지 오래다. 사람도 없어지고, 남아있는 사람은 계속 나이가 먹고 고령화하고 있다. 들어오는 사람보다 떠나가는 사람이 많은 곳. 그 질긴 악순환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 악순환을 끊기 위해, 농촌을 희망의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김정택 목사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물론 성과도 있었지만, 아직 그에게는 스스로 설정한 과제가 많이 남아있는 모양이다. 그 과제가 이뤄지는 날, 아니 그 과제를 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한 농촌에 희망의 씨앗이 뿌려지는 것이다. 농촌현실은 무척이나 냉혹하지만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 희망의 몸부림을 하고 있는 한 농촌은 여전히 우리의 희망이다.

면담인사 – 김정택 (목사, 강화도환경농업농민회장 )

면담일시 – 2007년 12월 8일

면담장소 – 경기도 강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