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올해 나이 여든 다섯. 김주정 할아버지는 오늘도 어김없이 희망제작소를 찾았다. 동장군이 심술을 부리는지 코끝이 시려오는 추운 날씨였다. 매월 두 차례, 첫째 셋째 금요일이 할아버지가 종로구 수송동 동일빌딩 4층, 희망제작소 사무국을 찾는 날이다. 희망제작소 창립부터 시작한 일이니 벌써 3년째 접어든다.

잿빛 점퍼 차림에 갈색 모자를 쓴 할아버지는 입구 소파에 앉자마자 배낭과 천가방, 종이가방을 꺼낸다. 익숙한 솜씨로 사무국 한 구석에 쌓아놓은 신문이며 종이를 차곡차곡, 배낭과 가방이 미어터질 정도로 재 넣는다. 그 무거운 짐을 메고 들고 폐지 수집상에 넘긴다. 1킬로그램에 90원, ‘좋은 일 한다’며 남들보다 10원 더 쳐준다. 그렇게 모은 1만원 남짓한 돈을 매달 희망제작소에 후원한다.
”?”“이게 몇 푼 도움이 되겠어요?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밖에 없으니까…몸이 움직여 줄 때까지는 해야지. 누가 시켜서는 못 하는 일이지요. 내가 하고 싶고, 좋아하니까 할 수 있는 일이지. 방구석에 우두커니 있는 것보단 백배 낫지.”

할아버지는 귀가 좀 어두운 것 말고는 건강한 편이다. 허리도 곧고, 눈빛과 어투에선 꼬장꼬장함 마저 묻어난다. 일제 때 전주사범학교를 나와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던 할아버지는 진보당 계열에서 활동하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평생을 그렇게 “정치 계통의 부랑자처럼 떠돌며” 살았다고 한다. 싫은 일 안 하고, 보기 싫은 놈 안보고. 그러다보니 평생 두 자식 거두기도 힘겨웠다. “6년 전 먼저 간 마누라한테 젤 미안하다”는 할아버지는 봉사활동으로 남은 삶을 채우고 있다.

할아버지는 매주 월, 수 두 차례 마포구 성산동 이대성산종합사회복지관(관장 정순둘)에서 8년째, 독거노인을 위한 점심 도시락 배달을 한다. 한 번에 여섯 군데를 도는데, 도시락을 받아든 노인들이 “도시락을 받아야 할 영감이 배달을 하고 있다”고 말한단다. 그 말처럼 정작 자신도 ‘독거노인’인 할아버지는 점심을 거를 때도 많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또 둘째, 넷째 금요일에는 ‘아름다운재단’을 찾는다. 이곳에서도 6년째 폐지를 수거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여기저기서 부지런히 모은 폐지를 팔아 ‘노인의전화’, ‘대방복지관’, ‘에다가와조선인학교’를 후원한다. ‘외근(?)’을 하지 않는 토ㆍ일요일엔 ‘수락산성당’(주임신부 전종훈)에서 미사에 참석하거나 성당 일을 본다. 이처럼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쉼 없이 몸을 움직인다.

“십 몇 년 전인가, 일본에 간 적이 있는데, 어쩌다 한 노인요양원을 방문하게 됐지요. 거기 여든 넘은 한국인 할머니 한분이 계셨는데, ‘나 좀 살려 주세요’ 하면서 우는 거예요. 몸도 맘대로 못 움직이고, 자식들도 안 찾아오고 하니까 외롭고 힘든 거지. 그때, ‘아, 나는 몸이라도 성하니까 늦었지만 봉사하면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이지요.”

”?”그렇게 일흔 넘어 시작한 일이 훌쩍 10년을 넘어섰다. 쉽지 않은 일이다. 고단하고 힘들어 일을 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그만 둘 수가 없었다.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조금이라도 더 나누고 싶었다. 그 간절한 염원이 그를 일으켜 세운다.

“젊어서 남 신세만 지고 살았으니, 조금이라도 갚고 가야지요.”

할아버지는 오늘도 삶의 좌표로 삼는 시 한수 읊조리며 무거운 짐을 메고 길을 나선다.

설한풍 불어오니 만산수목 낙엽이라/낙엽이야 죽을망정 뿌리마저 죽으리/새봄 다시 올 때 낙락장성하리라

짐을 져본 사람은 안다. 자신의 짐은 자신만이 져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짐을 지고 길을 나설 때, 가장 보기 좋다는 것을. 짐을 진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무척 자연스러워 보였다. 애초에 그 모습으로 살아온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