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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숙의 낮은 목소리

봄을 실은 마차소리가 들리는 2월엔 어느 달보다 떠나가는 노인이 많습니다. 곧 시작될 사계(四季)의 새로운 순환이 버겁게 느껴지는 걸까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하신, 즉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돌아가신 16일, 멀리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에선 마리아 돌로레스 탈라베라 여사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93년 삶의 궤적을 볼 때 여사 또한 선종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로리타 안 (Lolita Talavera)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여사는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1906~1965) 선생의 부인입니다. 여사의 부음을 접하니 제일 먼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946년 안 선생과 결혼해 돌아가실 때까지 한국인이었던 여사에게 우리가 해드린 게 너무 없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선생 생전엔 늘 남편 뒤에 서고, 돌아가시는 날엔 김 추기경 뒤에 가리어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니 더욱 안타깝습니다.

스페인 백작의 딸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여사는 선생을 만나기 전부터 그의 팬이었다고 합니다. 한국, 일본, 미국에서 바이올린, 트럼펫, 첼로 등 악기와 작곡법, 지휘법을 배운 후 1936년부터 유럽에서 활동하던 선생을 여사가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다 2차 세계대전 중 선생이 스페인으로 피난을 갔고 마침내 두 사람은 1946년 7월 5일 부부가 되었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결혼한 후 마요르카에 정착했고, 선생이 마요르카 오케스트라 (선생이 창설했다는 설도 있습니다.)의 상임지휘자를 맡아 1965년 9월 16일 59세를 일기로 생을 마칠 때까지 그곳에 살았습니다.

여사의 별세를 전하는 국내 언론은 모두 여사가 남편을 지극히도 사랑하여 선생이 돌아가신 후에도 ‘내내’ 한국 국적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92년 여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맞추어 쓴 일간스포츠 김인규 기자의 기사를 보면 ‘내내’라는 부사를 쓰기 민망한 사연이 있습니다. 김 기자의 기사 ‘초대받지 못한 애국가의 미망인’ 일부를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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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요르카시는 한국에서 온 위대한 예술가를 숭모, 시가지 한 곳을 ‘안익태 거리’로 명명했으며 매년 추모행사를 펼쳐오고 있다. 어여뻤던 신부 로리타는 이제 73세의 할머니가 되어 혼자서 부군 안익태를 생각하며 함께 살았던 집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의 조그만 섬도시가 먼 동양에서 건너온 예술가를 존경하고 지금도 그의 위대성을 아끼는 것과는 달리 정작 애국가 작곡가의 고국인 한국은 그를 너무나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스페인에서 치러지는 올림픽에, 숨진 남편의 나라 선수들과 임원들, 숱한 관광객, 정부 인사들이 몰아닥쳤으나 누구하나 찾아주는 이 없고, 부군이 작곡한 애국가가 바르셀로나에서 수많은 국가를 제치고 가장 먼저 연주됐음에도, 또한 앞으로 계속 연주될 것임에도, 초청해주는 이 하나 없는 현실이 어떠했을까 미루어 짐작이 간다. 남편과 남편의 조국을 사랑했기에 부군이 숨진 뒤에도 24년간이나 한국 국적을 유지해오다 생활비가 부족, 연금을 탈 단순한 목적으로 지난 89년 스페인국적을 재취득하게 됐을 때 로리타 할머니에게 대한민국은 어떻게 비쳤을까…”

기사엔 또 여사가 한때 집세를 내지 못해 선생과 함께 살던 집을 떠나야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다는 얘기, 이를 안타깝게 여긴 그곳 교민 실업가 권영호씨가 1990년 11월, 그 집을 11만 달러에 사서 여사가 마음 놓고 거주할 수 있도록 조치한 후 그 집을 ‘안익태 기념관’으로 조성하여 한국정부에 기증할 뜻을 밝혔으나 정부가 기념관의 관리비를 부담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는 것, 그리하여 기념관 조성사업은 물론 집 소유문제도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있다는 얘기가 실려 있습니다.

김 기자의 기사가 게재된 뒤, 한국일보는 국민성금을 모으기 시작했고 외교통상부와 안익태 기념재단설립을 공동추진하기로 합의했습니다. 그 해 10월엔 권영호씨에게 국민훈장 동백장이 수여되었고, 이어서 ‘안익태 기념사업재단’의 창립총회도 열렸습니다. 2001년 2월, ‘안익태 기념재단’으로 이름을 바꾼 재단은 매달 여사의 생계보조비로 천오백 불, 유가(遺家) 관리비로 천 불을 지급해왔으며 매년 9월 16일엔 선생을 위한 추모식을 열고 기념음악회도 개최해왔습니다.

여사는 1972년 안 선생의 일대기 ‘나의 남편 안익태’를 펴냈으며, 2005년엔 한국을 방문해 “애국가는 한국의 것이고 우리 가족은 한국인이므로 저작권은 한국 국민에게 있다”며 무상으로 한국 정부에 애국가의 저작권을 양도했습니다. 또 교향시 ‘마요르카,’ ‘포르멘토르의 소나무’ 등 미공개 악보를 포함한 모든 악보와 선생 관련 자료를 안익태기념재단에 넘겼습니다.

여사가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한 건 2006년 12월, ‘안익태 탄생 100주년 기념 음악회’에 참석하셨을 때라고 합니다. ‘마요르카’의 한국 초연을 지켜본 후 지갑 속에서 빛바랜 남편의 얼굴사진을 꺼내어 한국일보 기자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와 함께 한 모든 날, 모든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 훌륭한 음악가였고 무엇보다 조국을 사랑했다. 남편이 그랬듯 우리도 늘 한국을 그리워한다.”

두 분이 함께 산 기간은 겨우 19년, 여사는 그 후 44년을 혼자 살았지만 남편과 남편의 조국을 향한 사랑은 한결 같았습니다. 여사가 선생을 잊을 수 없었던 건 어쩜 선생이 여사를 위해 작곡한 가곡 ‘흰 백합화’와 그 악보에 친필로 써놓은 부탁 —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나를 기억해주오 — 때문인지 모릅니다. 그렇담 여사의 끝없는 한국사랑은 어디에 기인할까요? 진정한 사랑은 자라는 거라지만 보답 못한 사랑은 받은 사람을 부끄럽게 합니다.

여사의 부음 기사엔 안익태기념재단 이사인 한나라당 전국위원회 부의장 신현태씨가 영결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출국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적어도 재단의 이사장이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총리는 몰라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정도는 현지에 가서 미사에 참석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게 옳지 않으냐고 하면 제가 지나친 걸까요?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 사랑을 갚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많아지는 우리나라, 오늘 더욱 부끄럽습니다.


* 이 칼럼은 자유칼럼에 함께 게재합니다.


코리아타임스와 연합통신 (현재의 YTN) 국제국 기자로 15년,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으로 4년여를 보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글을 쓴다.
현재 코리아타임스, 자유칼럼,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중이다.
저서로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와 “시선”이 있고, 10여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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