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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준의 유럽에서의 사색

지난 10년의 개혁정권하에서 이루었던 성취가운데 괄목할 만한 것은, 비록 그것이 놀라운 수준의 진전을 보이지는 못했을지언정, 국가가 자기제약적인 행위선택을 통해 시민사회와의 협치, 즉 거버넌스(governance)의 발전을 모색, 장려했다는 점이다.

그 시기 동안 우리사회의 시민사회와 소위 진보적 학계를 대표하는 실천가들, 전문가들, 이론가들은 국가의 여러 위원회에 참여하거나, 아니면 행정부의 공식적인 직책을 맡으면서, 국가의 쇄신은 물론이고, 사회친화적인 공공정책을 형성, 발전시키는데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와 함께, 시민사회 자체에 대한 물적지원 및 민관이 협력하여 공공정책의 수립과 운영을 추구하는 관행도 직, 간접적으로 강화되어 그 결과 공공정책에 기여하는 지향을 갖는 다양한 시민사회 기관들과 단체들의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이는 권위주의 정권 이래로 사회를 배제한 채 국가주의적 정책형성의 방식이 뿌리 깊이 자리했던 우리나라에서 매우 괄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비록 모방수준에 머물렀다고 하지만, 민주적 거버넌스가 보편화되어 있는 선진민주주의의 발전된 시스템을 향하여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인 모습이었다고 평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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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모색들은 사실 그 이전 갈등의 시대로부터의 ‘학습의 결과’이자, 진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주지하듯이, 노태우, 김영삼 정부하에서 민주화의 진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회적 주체들의 정책참여의 기회를 차단한 방식의 국정운영은 수 많은 사회적 갈등을 유발했다. 그 당시 ‘개혁’은 늘 시민사회가 제시하는 개혁의 청사진을 국가가 얼마나 수용하느냐의 문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민사회의 요구수준은 80년대에 직선제의 수용이나 고문치사에 대한 진상조사 등의 일반민주주의적, 정치적 시민권적 요구에서 나아가, 90년대를 지나면서, 경제개혁 등 사회적 시민권의 요구로 심화되어 갔다. 이후 그러한 요구들 자체가 심화되었을 뿐 아니라, 그러한 요구들을 하였던 주체들이 정부의 구성원이 되거나, 정부와 파트너쉽을 형성하며, 그것을 적극적으로 심화시키는 방식으로 진화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버넌스의 제도와 관행을 구축하려했던 10년 개혁정권의 시도들도 사실 그 실현 정도는 그다지 높은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특히 앞서 언급한 새로운 엘리트들의 영입을 통한 국가의 쇄신과 시민사회의 물적, 정책역량적 강화의 두 가지 경로 중 상대적으로 전자에 보다 우선점이 두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 시민사회 자체를 공식적이고 수준있는 공공정책의 생산자이자 실천자로서 자리매김하는데 있어서는, 실천과 안목 모두에 있어 여전히 초보적이고 실험적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는 아마도 국가권력, 특히 행정부의 권력이 국가운영에 엄청나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는 한국의 상황에서 개혁적 국정운영의 단기적인 필요에 부응하는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심화된 보다 높은 차원의 국가-시민사회 관계의 상이 시민사회를 하나의 준국가적(semi-governmental) 기구에 버금가게, 다시 말해 운동과 이슈파이팅을 넘어, 공공정책의 생산과 실천에 한 축을 담당하는 공식적인 영역으로 키워 국가와 거의 대등한 (congruent) 수준의 파트너쉽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면, 그 시절의 개혁은 지극히 초보적인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고 사려된다.

오늘날 소위 ‘좌파청산’ 의 슬로건 하에서 이명박 정부는 지난 10년간의 개혁정권이 얼기설기 이룬 거버넌스의 초보적 단계의 구성물들을 암묵적, 노골적으로 해체시키고 있다. 이들은 거버넌스의 정신과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며, 과거 국가가 명령하고 시장과 사회가 그에 복종하여 실행하는 권위주의 시대의 국가-사회관계를 정상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현 정부가 행하는 거버넌스 해체의 기도들은 앞서 말한 두 가지 경로 모두에서 과거의 흔적을 지우려 하고 있다. 우선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의 인사들을 좌파인사로 낙인찍고, 그들을 임기도 채우기 전에 요직에서 몰아내고, 그들이 주도하여 구성한 행정부내의 친사회적인 정책기구들을 폐지시키거나 축소시키고 있다. 다음으로 시민사회의 맹아적인 공공정책생산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싱크탱크들을 비롯한 의식있는 단체들의 물적 기반를 차단하고 있다. 그 결과 제반 사회세력들의 궁핍과 역량축소를 초래하고 있다.

현 정부의 이러한 행위선택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것이 향후 더욱 더 더 심화되어야 할 한국의 민주주의를 온전한 방향으로 이끌려는 장기적인 청사진 하에서 이루어지는 선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그저 촛불집회 이후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을 다스리기 위한 단기적인 정치전략의 일환일 뿐이다. 단 한 번도 국민들 앞에 떳떳이 나서서, 왜 그러한 선택이 필요한지, 그것이 우리의 민주주의의 장기적인 발전비전과 관련하여 어떠한 연관성을 갖는 것인지,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시민사회의 강화를 통한 거버넌스의 구축은 비단 좌파의 편협한 요구라는 식으로 폄하시킬 문제가 아니다. 국가가 아니라 시민사회가 강화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공공행정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차원에서도 매우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국민들로 하여금 국가에 모든 것을 위임하고 팔짱끼고 서서 감놔라 배놔라 하는 무책임한 방관자적 태도를 부추기는 것보다, 그들로 하여금 주인의식을 갖고 지방행정이든, 중앙행정이든 직접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여지와 기회를 높였을 때, 사회의 활력도 높아지고, 정권이 실현하려고 하는 경제사회적 목표도 보다 용이하게 달성될 수 있는 법이다.

World Bank나 OECD 등 대부분의 국제기구들은 일찍부터 시민사회의 역량강화를 통한 거버넌스의 혁신이 여러나라들이 당면한 경제사회적인 과제를 해결해 나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는 연구와 실천들을 진행해 왔다.

유럽의 경우 상대적으로 친비즈니스적인 싱크탱크들 역시 민주사회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사회혁신과 당면 현안들의 해결을 위해 매우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일례로 독일의 대기업인 베텔스만사를 모기업으로 하는 싱크탱크인 베텔스만 재단도 한편에서는 신자유주의 싱크탱크라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시민사회의 강화를 위한 여러 프로젝트들을 구상하고 그것을 촉진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 세계를 호령하는 자동차, 기계산업의 거대기업인 보쉬사와 연계된 로베르트 보쉬 재단 같은 곳도 이민자들의 통합 문제 등의 정책과제에 관심을 가지며, 시민사회 주체들의 자발적이고 창의적인 역량활성화를 이루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인다.

특히 독일의 경우, 시민사회의 공적기능이 고도로 제도화되고 국가의 자기제약성이 깊이 있게 제도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외교나 개발협력의 영역에 있어, 독일의 소위 정당재단들은 전세계의 개발도상국에 사무소를 두고 있는데, 이들은 정당과의 연계가 깊지만, 어디까지나 공식적으로 협회와 재단의 형식을 갖는 시민사회 행위자들이다. 외교와 국제협력의 영역에서 시민사회의 역할이 극히 미비하고 주변적인 한국과 달리 독일의 정당재단들은 국가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되, 해당 시기 정부의 입장에 좌지우지 되지 않으면서, 역량있는 공공정책의 수행자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국가가 사회적 공공성에 둔감한 미국의 경우도 수 많은 자발적 결사체들이 태동하여 유럽식 복지국가의 역할을 대체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며, 사회의 공공성 강화에 기여를 하고, 적지 않은 기업들 역시 이러한 실천들을 직, 간접적으로 후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 정부를 이끄는 인사들이 더 깊이 있게 고민하고, 더 준비된 상태로 역사의식을 갖고 정권을 맡았다면, 분명 민주주의를 존중하는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자신들이 이루려는 정책적인 목표를 이룰 수 있는 여지가 있었을 것이다. 거버넌스를 강화하고 친사회적인 정책을 펴는 것은 경제성장에 해를 끼치고, 비즈니스의 환경을 악화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적어도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키는데 동의표를 던진 국민들의 다수는 민주적 거버넌스가 싫고 거추장스러워서가 아니라 그것의 맹아적 형태를 더욱 계승, 발전시키키는 것을 암묵적으로 당연시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경제적 파이를 키워내는 일에 정부가 혜안을 만들어내고 구현하리라 기대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현정부가 보여주고 있는 태도는 이러한 기대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양극화를 방관하고 더욱 심화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 민주적 거버넌스의 기반마저 해체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보다 수준 높은 거버넌스의 발전을 기대하는 국민들 대다수의 염원과 어긋나 있다. 거버넌스의 복원, 나아가 그 계속된 발전만이 현 정부가 그토록 외쳐대는 선진화의 필요조건이라하지 않을 수 없다.

글_ 박명준 (희망제작소 객원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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