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스쿨존’ 등굣길 차량 금지-‘번화가’ 입간판 대신 화단


[한겨레] #1 지난 7일 아침 일본 도쿄도 미타카시 시립초등학교 앞. 1~2학년생들 한 무리가 찻길을 건너 정문으로 들어선다. 찻길에는 차가 없다. 미타카시에서는 아침 7시40분부터 1시간 동안 초등학교·유치원 반경 50m 이내인 ‘스쿨존’에 차량 진입이 금지된다. 아이들은 부모의 손에 이끌리지 않고도 안심하고 등굣길에 오른다. 이곳에서 만난 교통지도원 마쓰나카 오토모는 “어려서부터 학교 앞에는 차가 다니지 못한다는 점을 피부로 받아들인 아이들은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차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2 8일 저녁 도쿄 하라주쿠역 부근 이메노토 대로. 저녁 시간이면 늘 젊은이들로 붐비는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잘 알려진 패션 중심지다. 그러나 대로 어디에도 보행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찾아볼 수 없다. 상인들이 먼저 나서 선간판을 내놓지 않는 등 보행환경 개선에 힘썼다. 상점을 운영하는 주조 쇼헤이는 “걷고 싶어야 사람들이 찾고, 사람들이 찾아야 장사가 잘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이런 풍경은 1990년대 들어 일본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생활도로’ 사업이 낳은 성과들이다. 도시에서 자동차의 주행 속도를 떨어뜨리고 인도를 정비해 보행자 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생활도로 사업은 우리의 건설교통부에 해당하는 국토교통성과 자치단체, 지역주민이 함께 추진한다. 미타카시, 나고야, 오사카 등지에서 96년 처음 시작돼 2007년 1월 현재 55개 지역으로 확대됐다.

미타카시는 생활도로 사업이 가장 성공적으로 이뤄진 곳이다. 도쿄 외곽에 자리잡은 이곳은 그동안 보행환경이 가장 열악한 곳으로 꼽혀왔다. 하지만 현재 미타카시 구석구석에서는 보행자 안전을 우선적으로 고려한 장치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도로 폭이 좁은 곳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색깔을 달리해 보행로를 확보했다. 유치원 정문 등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올 수 있는 곳엔 볼라드를 설치해 차량 진입을 막았다. 또 교차로마다 과속방지턱과 같은 개념인 ‘이미지 험프’를 만들고, 교차로에 다가갈수록 정지선 양쪽으로 인도 폭을 넓혀 차량의 감속을 유도했다. 오시타 히사무네 미타카시청 문화실장은 “생활도로 사업이 마무리된 시점을 전후로, 6개월 동안 31건이었던 보행자 교통사고가 같은 기간 14건으로 50% 넘게 줄었다”고 말했다.

처음엔 정부가 사업을 주도했다가 지금은 자치단체와 주민들의 제안을 중심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주민 제안으로 이뤄진 대표적인 생활도로 사업이 ‘안심보행지구’다. 지구 지정을 신청하면 정부가 예산을 지원해 보행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치우는 등 걷기에 쾌적한 거리를 조성한다. 지난해 말까지 일본 전역에 796개 안심보행지구가 지정됐다.

이 가운데 도쿄 신주쿠역 남쪽 출구 주변의 안심보행지구는 일본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길로 꼽힌다. 도로 양옆 300여m 구간에 테라스가 늘어서 있고 그 안에는 화단 등이 잘 꾸며져 있다. 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유학생 김재경(도쿄도립대 박사과정)씨는 “이 길을 걷다 보면 답답한 도시 공간에서 거리를 걷는 즐거움과 묘한 해방감마저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일본의 생활도로 사업은 곧 ‘교통사고 없는 나라’로 이어졌다. 2005년 기준 일본의 인구 10만명당 보행자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1.9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네번째로 낮았다.

생활도로 사업이 최우선으로 내세우는 가치는 ‘도시에서는 더 이상 자동차가 사람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것. 국민 1천명당 자동차 보유 대수가 우리보다 1.4배 가량 많은 일본이 ‘보행자 천국’으로 불리기까지는 이처럼 단순한 구호를 실천에 옮기려는 의지가 밑바탕에 깔려 있었다.

일본 내 도시설계 분야의 최고 권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사이타마대학 공학부의 구보타 히사시 교수(건설공학)는 “보행권은 근대화 이후 인간이 산업사회에 빼앗긴 가장 기초적인 인간적 조건”이라며 “이를 되찾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정부나 자치단체가 만든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 ‘내가 마을을 바꾸겠다’는 주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의지”라고 강조했다.

이런 점을 미타카시 주민들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미타카시 중앙공원에 있는 시민헌장 안내판 한쪽에서는 도시설계의 권위자 구로카와 기쇼가 쓴 <도시 디자인>이란 책 속의 한 구절을 볼 수 있다.

‘도시는 그냥 머물러 있는 사람들이 아닌 도시를 바꾸려는 사람들에게만 주인 대접을 해준다.’ 도쿄/김연기 기자 yk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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