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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바와 같이 우리나라의 복지수준은 매우 낮다. 2009년 현재 공공부문의 사회비지출(social spending)은 GDP의 9.5% 수준이다. GDP의 약 30% 정도를 지출하는 스웨덴 프랑스 벨기에 등과는 물론 20%에 이르는 OECD 평균과도 큰 차이가 난다. 당연히 최하위 수준이다. 멕시코가 우리 뒤에 있는 유일한 국가이다.
앞으로도 이 수준으로 버틸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양극화와 저출산 고령화 등 국가가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글로벌화가 심화되면서 구조조정의 압력도 점점 더 거세지고 있다. 사회안전망이 강화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여기에 복지수혜대상자들의 목소리는 높아지고 전통적 안전망이라 할 수 있는 가족도 해체의 길에 들어서고 있다. 누가 보아도 국가의 역할이나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상황인식에는 여야와 진보와 보수가 따로 없다. 국가가 어느 정도까지 감당하는 것이 옳으냐에 대한 차이가 있을 뿐, 수요 자체가 늘어나고 국가의 역할이 일정 수준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다. ‘뉴 라이트’ 이론가들만 해도 글로벌화에 대한 따른 구조조정의 불가피성 등을 역설하고 있고, 이러한 구조조정의 부작용의 최소화하기 위한 사회안전망의 확대를 강조하고 있다. 복지가 진보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러다보니 정부의 성격과 관계없이 복지사업은 점차 확대되어 가고 있다. 기존 사업들이 강화되고 있는 한편 새로운 사업들이 계속 추가되고 있다. 바람직하기도 하거니와 누구도 쉽게 꺾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문제는 돈이다. 복지사업이 늘어나는 만큼 이에 필요한 돈도 마련이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쉽지 않다. 흔히들 ‘증세’를 이야기하고 ‘부자증세’를 이야기하는데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우선 ‘부자증세’는 상징성은 크지만 그 효과는 한계가 있다. 많아봐야 수 조 원 정도인데, 이 정도로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돈의 작은 일부도 되기 힘이 든다.
결국 중산층을 건드릴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지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조세부담률, 즉 국민총생산 대비 세수의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턱 없이 낮은 것은 돈 많은 사람들이 덜 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중산층 또는 중간 소득계층이 덜 내고 있는 것이 더 큰 원인이다.
한 예로 근로소득세의 경우를 보자. 사용자가 한 사람의 근로자를 위해 지불하는 돈에서 실제로 근로자가 손에 받아 쥐는 돈을 뺀 것을 텍스웻지(tax wedge)라 하는데, 우리나라 중위소득자의 텍스웻지는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편이다. 벨기에 프랑스 독일 같은 나라들이 50% 정도가 되는데 비해 우리는 20%도 채 안 되는 수준이다. 그만큼 적게 내고 있다는 뜻이다. 돈이 어디서 나와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지방으로의 부담 전가
이렇게 복지수요는 늘고 돈 만들기는 쉽지 않은 상황에서 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중앙정부가 지방정부에 그 부담을 전가하는 일이다. 지방정부로서는, 가뜩이나 재정이 어려운 판에 정말 기가 찰 노릇이다. 어떻게 해서, 또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그 메커니즘을 이해해 보자.
우선 복지사업의 중요한 특성 하나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복지사업은 주민의 직접적인 후생과 관련되어 있고, 그러다보니 주민의 요구와 관심이 대단히 크다. 일단 중앙정부가 사업을 던지고 나면 어떠한 이유로건 개별 지방정부가 이를 거부하기는 쉽지 않은 구조이다. 특히 지역 내 내부효과가 큰 사업이나 개별 주민에 직접 혜택이 가는 사업은 그러하다. 고객집단, 즉 수혜대상자들이 강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다.
복지사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국고보조사업들도 그렇다. 다른 분야 국고보조사업과 마찬가지로 지방정부는 이들 사업을 시행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신청주의 원칙에 입각해 운영되기 때문이다. 즉 지방정부가 스스로 원해서 신청해야만 사업이 성립되도록 되어 있다. 중앙정부나 상급 지방정부가 강제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복지사업에 있어서는 이 신청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개별 주민에게 직접 혜택이 가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주민의 관심과 요구가 큰 만큼 지방정부는 싫건 좋건, 재정여건이 좋건 나쁘건 신청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주민의 관심과 요구가 크지 않은 다른 국고보조사업, 예컨대 민방위시설을 개선하는 사업이나 산의 임도를 정비하는 사업 등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된다.
복지사업의 이와 같은 특성은 곧 중앙정부의 입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때로는 도덕적 해이로 이어지기도 한다. 예컨대 사업을 결정하는데 있어서나, 또 국고지원의 규모를 결정하는 보조율을 정하는데 있어서도 지방정부의 입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게 된다. 이렇든 저렇든 지방정부야 따라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2월 국회를 통과한 0세에서 2세까지 영유아 무상보육사업은 그 좋은 예이다. 지방정부의 큰 재정적 부담을 초래하는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지방정부의 입장이나 형편에 대한 고려 한번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결정해 버렸다. 보조율도 국회와 정부 마음대로 그냥 정해 버리고 말았다.
형편이 이러하다 보니 복지사업과 관련된 지방정부의 재정부담은 계속 늘어만 간다. 중앙정치권과 정부가 이런저런 복지사업을 계속 만들어 내면서도 필요한 재원은 제대로 마련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방정부 예산에서 복지비가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커지고 있다. 대도시 자치구의 경우 전체 예산 대비 복지예산의 비율이 평균 40%를 넘고 있다. 서울의 자치구들은 그나마 형편이 좋아 30%를 조금 상회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부산을 비롯한 다른 대도시 자치구들은 평균 50%를 넘고 있다. 광주광역시 일부 자치구는 한때 65%에 이르기도 했다. 예산 운영상 경직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 많은 기초 지방정부들이 중앙정치권과 중앙정부가 만든 복지사업 분담금(matching fund)을 감당하느라 자체 사업들을 포기하고 있다. 지방자치 자체가 실종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이러한 일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일본과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다. 일본만 해도 지난 10여 년 동안에 있어 지방정부의 복지분야 재정부담이 크게 늘어났다. 중앙정부가 그 부담을 지방으로 전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복지사업 영역에서만 일어나는 일도 아니다. 명분상, 또는 정치경제적 구조상 지방정부가 쉽게 빠져 나올 수 없는 정책 영역에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환경이나 교육은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예컨대 환경부문에 있어 중앙정부가 대기오염이나 수질오염을 일정 수준 이하로 유지할 것을 의무화하는 법을 만들면 지방정부는 이를 쉽게 거부할 수 없다.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를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하게 하는 사업도 마찬가지이다. 지방정부가 쉽게 거부할 수 없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자체 예산을 투입할 수밖에 없다.
지방정부로서는 이러한 상황이 마음에 들 리가 없다. 당연히 불만을 토로하게 된다. 지방재정을 걱정하는 학자들이나 실무자들 또한 이러한 관행에 대해 강한 우려를 제기한다. 당연히 이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간의 재정부담을 합리화하기 위한 준칙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법제정을 통해 중앙정부의 이러한 관행을 규제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1995년 미국 의회를 통과한 ‘예산 없는 의무사무의 개혁을 위한 법률(Unfunded Mandate Reform Act, UMRA)’는 바로 이러한 주장들이 구체화된 좋은 예이다. 이 법은 주와 지방정부에 연간 5천만 달러 이상의 부담을 지울 가능성이 있는 사업의 경우, 또 민간부문에 1억달러 이상의 부담을 지울 가능성이 있는 사업의 경우 주정부와 지방정부 수장이나 그들이 지정하는 관계자 등의 의견을 들어 반영하도록 되어 있다. 아울러 의회 해당 위원회로 하여금 당해 사업과 관련하여 주정부와 지방정부가 부담을 어떻게 덜어 줄 것인지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도록 되어 있다. 주정부와 지방정부로서는 획기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러한 법이 모든 문제를 다 해결 해 주지는 않는다. 미국만 해도 재정부담을 둘러싼 정부 간 갈등이 다 사라지지 않았다. 지금 현재도 2002년 새로 시행된 학습부진아 지원사업(No Child Left Behind)을 놓고 연방정부와 일부 주정부 간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연방정부가 주정부에 의무지출을 강요하고 있느냐 여부에 대한 싸움이다. 2006년 코네티컷 주는 연방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패하기도 하였다. 재정부담의 문제가, 또 이를 둘러 싼 갈등문제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시도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도 이런 법이나, 유사한 조치가 필요하지 않는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한다. 지방정부의 지출을 수반하는 사업의 경우 최소한 지방정부의 입장을 제대로 듣고, 이를 반영하는 시늉이라도 하게 해야 한다. 중앙정치권과 중앙정부가 자기 편의대로 사업을 결정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국가보조사업을 결정하거나 보조율을 정하는 문제도 그렇다. 법정기구로서의 지방자치단체장협의회나 지방의회의장협의회가 있으면 최소한 이들 기구의 의견을 듣는 것을 의무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 기구의 의견과 그에 대한 중앙정부와 국회의 답변을 전 국민이 평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중앙정부와 중앙정치권뿐만 아니라 이들 기구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지금처럼 행정자치부의 의견만 듣도록 되어 있는 것은 아무래도 부자연스럽다. 자치와 분권의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마침 곳곳에서 이번에 국회를 통과한 0세에서 2세까지 영유아 무상보육사업에 대한 지방정부의 불평과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 불평과 불만만 할 것이 아니라 단체장협의회 등을 중심으로 이를 잘 묶어 좋은 제도를 만드는 동력으로 전환시켜 주었으면 한다. 좋은 자치는 위로부터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아래로부터 만들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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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_ 김병준
희망제작소 고문
공공경영연구원 이사장
국민대학교 행정정책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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