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지역에서는 청년들이 일군 임팩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희망제작소가 이들을 ‘소셜디자이너’라고 호명하는 이유입니다. 나의 성장이 로컬의 변화로 이어지는 소셜디자이너들의 다채로운 활동과 이야기를 특집으로 전합니다. 오는 11월 14일 개최되는 청년 소셜디자이너를 위한 무대 ‘2024 사회적가치 투자(Social Investor Relations, SIR) 대회’에서도 생생한 임팩트 경험담이 펼쳐집니다.
김유솔 용암마을 이장 | 전남 완도
지난 8월 27일 전남 완도읍 용암마을 경로당, 삼복더위에 할머니들이 둘러앉아 부채를 부칩니다. 평균연령 68살, 50가구가 모여 사는 용암마을의 이장 김유솔(27) 씨가 자기 집처럼 들어갑니다. “유솔 이장, 에어컨이 고장 났어.” 할머니들 하소연이 시작되는가 했더니 누군가 얼음 동동 띄운 미숫가루를 타왔습니다. 대화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문제는 바로 해결해야지 그냥 뒀다가는 나중에 크게 터져요.”
2022년 24살에 전국 최연소 이장이 된 그는 두 번 연임해 이제 3년차입니다. 경계가 없는 이장일을 그는 “용암마을을 지키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용암마을의 정서와 경관을 지키면서 ‘끊어진 세대’를 잇는 것입니다. 완도에 어떻게 다양한 직업군의 청년들을 끌어들일지에 대한 고민은 처리하기 어려운 빈집 문제로 이어집니다. “왜 빈집을 정비하지 않고 새 아파트를 짓는가, 누구를 위한 새 아파트인가?” 젊은 이장의 질문입니다.
이장일로만 완도를 지키는 게 아닙니다. 사진관 ‘솔진관’을 운영하고요. 완도 토박이 청년들과 ‘완망진창(엉망진창+완도)’을 꾸려 어르신들에게 핸드폰 사용법을 알려주는 ‘손주학교’를 벌이고 완도 청년들이 완도에서 주말을 즐길 수 있도록 플리마켓을 열었습니다. 완도의 매력을 담은 사진전, 지도 등도 만들고 전남형 청년마을 사업도 벌여 젊은 예술가들을 완도로 끌어들입니다. 완망진창은 행정안전부 주관 ‘2022 청년공동체 최종 성과공유회’에서 장관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활동의 동력은 완도를 향한 애정입니다. 완도에서 태어나 완도가 싫어 떠났던 그는 서울에서 6년을 보낸 뒤 고향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깨닫습니다. 김유솔 이장이 사는 집 창문을 두드려 먹거리를 쏟아주고 가는 마을 사람들은 이장의 남자친구한테 이렇게 말합니다. “이장 데리고 가면 안 된다!”
20대 거의 없는 마을에서 3년째 연임하는 20대 이장
-어떻게 이장에 도전하시게 된 거예요?
=전 이장님이 제안하셨어요. 젊은 사람이 마을에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던 거 같아요. 마을 일에 참여하는 20대가 워낙 없으니까요. 저는 고민을 많이 안 하는 편이에요. 안 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고 이유가 충분하지 않으면 그냥 해요. 이장일도 그랬어요.
첫해에 이장 후보로 나섰던 어르신이 기권해주셨어요. 찬성이 과반이 넘어야 하는데 만장일치로 동의해주셨죠. ‘어린 것이 할 수 있겠나, 금방 마을을 떠나지 않을까?’ 그런 분위기도 좀 있었는데 제가 국면전환 카드로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냈어요. 외할아버지가 용암마을 사람들이 ‘큰 어른’으로 생각하는 분이었거든요. ‘그 집 손주라면 마을에 애착이 있겠다’ 싶으셨던 거 같아요.
-3년차신데, 이장일은 어떠셨나요?
=첫해 절반은 사실 많이 날렸던 거 같아요. 이장일에 대한 고민을 정말 많이 했어요. 누구도 이장일이 뭔지 정의 내린 사람이 없는 거예요. 이장 회의 가고, 지자체에서 하는 사업에 맞는 사람 찾고 이런 게 이장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르신들한테는 ‘이장이 나한테 관심이 있나’가 더 중요했던 거 같아요. 처음엔 제가 너무 공손했어요. 너무 깍듯했죠. 약속 없이 경로당에 가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한번은 제가 실수로 말씀 안 드리고 갔는데 다들 좋아하시는 거예요. 그뒤 열심히 밥 먹으러 갔더니 어르신들이 ‘아, 이제 좀 이장 같네’ 하시더라고요.
그만두고 싶었던 적도 있었어요. 처음엔 ‘지난해 한 대로 하면 되겠지’ 이런 생각에 어르신들한테 사인해 달라고 했는데, 순서가 잘못됐죠. 마을 총회를 거쳐 설명을 먼저 드려야 하는 건데 말이죠. 마을이 발칵 뒤집어졌어요. ‘너무 어려서 뭘 모른다’ 이런 이야기도 돌았고요. 전 이장님이 불러 말씀하시더라고요. “이장일 40년 한 사람도 실수를 하는데 어떻게 첫해부터 잘할 수 있겠냐. 이장일은 마을 사람들한테 배워서 하는 거다.” ‘내가 이장이구나’ 하는 실감은 1년 뒤에 들었어요. 이 마을에서 제일 나이 많은 큰 언니가 저한테 “이장 한 번 더 해줬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이장일을 하면서 제가 더 성숙해진 거 같아요. 어르신들이 “우리 이장 야무지다” “평생 이런 혜택 있는지도 몰랐는데 이장이 신청해줬다” “이장이 노인 일자리 연결해줬다” 이런 이야기 해주세요. 제가 업혀 키워지고 있는 거 같아요. 이렇게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이 흔치 않죠.
-용암마을의 매력은 뭐예요?
=저희 마을 주민은 주로 7080이고요. 50가구 사는데 20대는 저 포함해 3명이에요. 한 명은 일이 바빠 집에선 거의 잠만 자고요. 다른 친구는 올해 결혼해서 곧 다른 마을로 가요. 20대는 저만 남은 거죠. 주민들이 저 결혼해서 다른 데로 이사갈까 걱정해요.(웃음) 주민들은 대부분 이주민이에요. 이미 70년 정도 이곳에 사셨으니 완도 사람과 다름없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텃새가 없어요. 잘 챙겨준다는 점에선 시골 분위기도 있죠. 문 두드려 나가보면 먹을 거 주시고. 그리고 보니 곧 먹을 게 쏟아져 나올 때이네요. 가을이니까요.
“마을을 지킬 다음 세대를 찾는 것이 이장일”
-지금 이장으로서 가장 큰 고민은 뭐예요?
=이 마을을 지키는 게 제일 어려워요. 마을을 이어갈 수 있는 다음 세대를 끌어오는 일이 쉽지 않아요. 폐가 수준의 빈집은 정말 많은데 살 집은 부족해요. 저희 동네 아래 건어물 공장이 많았거든요. 용암마을은 그 주변에 가난한 사람들이 손수 집을 지으면서 생긴 동네예요. 세월이 지나 먹고 살 만해 졌지만, 집과 땅 주인이 다른 경우도 많아요. 땅 하나에 주인이 3~4명인 집들도 있죠.
고지대에 있는 저희 마을의 큰 장점은 전망이에요. 바다가 한눈에 보여요. 바로 아랫마을에 너무 높은 건물이 들어서면 용암마을은 점점 더 쇠퇴하게 돼요. 그런데 아랫마을에 46층짜리를 짓는다고 해요. 이게 발전인가? 이렇게 빈집이 많은데 왜 그런 고층 건물을 올려야 하는지 이해가 안 돼요. 저는 투자용 아파트를 만들면 결국 아무도 안 사는 동네가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우리 마을 어르신들은 반반이에요. 고향이니까 지키자는 쪽과 돈 받을 수 있을 만큼 받고 찬성해 줘버리자는 쪽이 반이죠. 의견을 모아가는 일을 하고 있어요.
이 마을의 가장 큰 자산은 풍경과 사람들인 거 같아요. 낯선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계산 없이 정을 나누는 사람들의 마음이 유지돼야 해요. 어르신들은 점점 줄고 있는데 그런 마인드를 이어받을 다음 세대가 없어요. 풍경을 지키고, 마을의 정서를 지키고, 젊은이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게 다 마을을 지키는 거죠. 가능하면 빈집을 마을 공동재산으로 만들어 청년들이 완도에서 살 수 있는 거점으로 만들어 가고 싶어요.
-완도 토박이시잖아요.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오셨는데요.
=디자이너가 되고 싶었거든요. 완도에서는 배울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어요. 제가 수산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취업계를 내고 졸업 전에 아무 연고 없는 서울로 올라왔어요. 막무가내로 부딪혔던 거죠. 완도에서 버스 타고 7시간 넘게 와야 할 수 있는 일을 서울 사람들은 집 앞 컴퓨터 학원만 가면 할 수 있더라고요. 서울에서 학원 다닌 지 1년 반 만에 취업해 편집 디자인을 주로 했어요. 몇 년간 홍대, 부천 고시원에서 살다 조금씩 집 크기를 늘려가 완도 내려오기 전에는 투룸에 살았어요.
서울이 싫어서 완도로 돌아온 거 아니냐는 오해를 많이 받아요. 저 아직도 서울 좋아해요. 그런데 그 이상으로 완도가 좋아요. 문제를 피해 도망친다는 느낌으로 완도로 온 친구들은 다시 떠나더라고요. 저는 생각의 전환을 경험한 거 같아요. 어릴 때는 만날 보니 완도가 예쁘다는 생각을 안 했거든요. 서울에서 직장 다니다 휴가 때 와서 보니 제주도보다 예쁜 거예요. 제가 오키나와 여행 가 SNS에 사진을 올리니 친구들이 완도인 줄 알더라고요. 제주나 오키나와는 그 아름다움을 멋있게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완도는 그런 사람이 부족해요. 제가 그 일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쁜 재료를 제가 잘 포장해 사람들에게 보여줘야지.
사진관인 솔진관을 열었을 때 마음도 비슷했는데요. 저같은 여고생들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었어요. 초중고 때 보정 안돼 얼굴이 달덩이처럼 나온 사진 보고 마음 상했거든요. 예쁘게 찍어주고 싶었어요. 휴가 때 제가 사진 찍어준 친구들이 ‘너 같은 애가 완도 있으면 좋겠다’해서 서울 가서 본격적으로 배워 돌아왔어요. 증명사진, 가족사진도 찍고 마을 이야기도 기록해요. 해가 갈수록 어르신이 자꾸 사라지니 기록이 더 중요해진 거 같아요. 제가 재미로 하는 일이 완도에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완도 토박이 5명 뭉쳐 완도 매력 발산
-완도 토박이 5명이 뭉쳐 ‘완망진창’을 만드셨는데요.
=서로 ‘쟤는 왜 완도에 계속 있지?’ 궁금해하다 가까워졌어요. 저는 사진관, 제 동생은 조향공방을 운영해요. 한 친구는 다시마 양식과 카페를 같이하고요. 또 한 친구는 우럭 양식을 해 반건조 우럭을 판매하고 있어요. 나머지 한 명은 20살이에요.
이장이나 완망진창 일이나 운명 같아요. 완망진창은 친구들하고 완도 뒷담화하다가 시작했어요. 군청에서 열린 문화 기획 수업에서 “완도엔 놀 데가 없다” 이런 이야기하는데, 담당 팀장님이 “너희가 만들어 보면 어때”라는 거예요. 팀명 완망진창은 ‘완도와 엉망진창’을 합친 거예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성장한다는 뜻이죠. 주말에 놀만한 공간을 만들려고 플리마켓을 한 번 해봤어요. 제 사진관에서 대뜸 테이블 펴고요. 팔 사람은 팔고 살 사람은 사라는 뜻인 ‘8844플리마켓’이에요. 처음엔 한 20명 왔고 그중 절반이 지인이었죠. 3년 동안 플리마켓을 6번 이상 열었네요. 이제 한 번에 방문객이 3천 명 정도 돼요. 저희 장기가 됐어요.
팀장님 도움으로 비영리법인 등록을 하고 지원 사업비 800만 원을 받았는데 그걸로 프로그램 7개를 했어요. 완도의 매력적인 공간을 담은 지도나 영상도 만들었고요. 어르신들께 핸드폰 작동 방법 알려드리는 ‘손주학교’도 하고요. 쓰레기 함께 줍는 ‘쓰레기 절도단’, 사진전, 취미수업도 벌였어요. ‘손주학교’는 어른신들과 어떻게 친해질까 고민하다 하게 됐어요. 문자 보내기, 사진찍기 알려드렸는데 어르신들한테 문자 받고 손주들이 깜짝 놀라 전화하고 그랬죠. 어르신들이 저희 지나가면 먹을 걸 막 주세요. 생활 정보도 알려주시고. 제 삶의 질이 높아졌어요. 프로그램 7개 하면서 지원금이 모자라 저희가 갹출하기도 했고, 힘도 들었는데 반응이 좋으니까 재밌었어요. 자부심을 느꼈어요.
-2022년 전남형 청년마을 1기 사업도 벌이셨는데요.
=저희 청년마을 이름은 ‘모인도’였어요. 무인도의 반대죠. 완도는 양식업, 수산업 종사자는 많은데 다른 직군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부족해요. 디자인이나, 프로그래밍하는 친구들이 거의 없죠. 어울릴 수 있는 친구의 폭은 줄고, 떠나는 사람은 늘어요. 저희는 다른 직군 사람들이 모일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웠어요. 프리랜서 예술가들을 모집했죠. 한 달 10만 원만 내면 숙식을 모두 제공했어요. 그 대신 저희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멘토링이에요. 완도 청소년들이 수산업 이외 다른 직업에 대해 멘토링 받을 기회가 별로 없거든요. 이 분들이 자기 작품 만들어 전시하고 플리마켓에 참여도 하고요. 사진 전시도 열고, 일러스트레이터는 완도를 주제로 책 한 권을 만들었어요. 공예작가는 유리 쓰레기로 작품 만들고, 시인은 완도를 주제로 시를 쓰고요. 청년마을 참여자 다섯 명 가운데 세 명이 완도에 정착했습니다. 연고도 없는데 왜 그런 결정을 했냐고 물으니 이렇게들 답하더라고요. “바다가 예쁘고, 살만하다.” 시골을 거주지 후보로 넣지 않았던 사람들인데 저희 프로그램으로 완도를 그 후보에 올린 거예요. 저희랑 여전히 친하게 지내고 그래서 힘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완망진창이 협동조합 잔물결로 바뀌던데요.
=정부 지원 사업하면서 가장 아쉬운 건 수익을 지향할 수 없다는 점이에요. 비영리 법인이니 영리 사업을 할 수 없고 사업이 끝나고 지원이 끊기니 지속하기 힘들었어요. 일 년 지원 사업이이었지만, 그 일 년을 위해서 지원한 건 아닐 거잖아요. 이 자원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 사업을 유의미하게 이어가고 싶어서 지난 7월에 협동조합을 만들었어요. 청년마을 때 마련해 놓은 숙소를 ‘한달살이’나 ‘워케이션’으로 운영하려고 해요. 도시재생 용역에도 도전하고 청소년 관련 프로그램도 꾸려볼 계획이에요. 기후변화나 길고양이 학대 등 사회적 주제를 다룬 전시회도 꾸준히 열고 있고요.
정부 지원 사업의 아쉬운 점 두 번째는 지역마다 맞는 사업이 다른데 다른 지역에서 잘된 사업들을 가져온다는 거죠. 비슷비슷한 사업을 여러 지역에서 해요. 예를 들어, 완도에선 청년아파트가 좀 애매해요. 빈집을 고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청년들이 많은데 왜 아파트를 지어야 하죠? 있는 걸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지원이 한 쪽에 치우친 거 같아요. 어업과 농업 관련 지원은 많은데 다른 일을 하는 청년들에 대한 지원은 너무 적죠. 지역 산업 연계도 억지스러울 때가 많아요. 예를 들어, 수제 버거를 만든다고 치면, 해조류, 전복, 김, 다시마 같은 특산물을 넣어야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거예요. 과하게 엮으면 잘 되기 힘들어요. 완도에서 제일 유명한 맛집은 순두부찌개를 하거든요. 메인 요리에 완도 다시마는 안 들어가요. 그래도 지역에 그런 브랜드가 있는 게 도움이 되잖아요.
우리 팀의 장점? 실수를 환영하는 것
-완망진창에서 한 일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걸 꼽는다면요?
=정성적으로는 ‘손주학교’가 제일 좋았어요. 봉사인 줄 알았는데 저희를 위한 프로그램이었어요. 정량적으로는 플리마켓이죠. ‘처음엔 엉망진창일 수 있지만 결국엔 성장해 가는구나’ 이런 걸 느끼게 해 준 사업이죠. 실수를 환영하는 게 완망진창의 특별한 점이에요.
글: 김소민 희망제작소 연구위원 | 사진: 희망제작소, 김유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