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 떠나고 주민들은 늙어가는 지역을 위해 경제를 바꿔야 한다고 외치며 한국을 방문한 지역경제 전문가가 있다. 희망제작소가 지난 9월 30일부터 10월 4일까지 서울, 경기, 대전, 전남 영암군 등지에서 개최한 ‘지속가능한 로컬, 민주주의 경제모델 구축 국제포럼’에 참석차 방문한 미국 싱크탱크 ‘협력하는민주주의'(The Democracy Collaborative) CWB 글로벌리더 닐 매킨로이(Neil McInroy)다.
닐 매킨로이는 영국의 지역경제전략연구소(CLES) 소장을 20년간 역임하며, 영국 프레스턴을 비롯한 스코틀랜드, 미국 등 세계 여러 곳의 지역공동체자산구축(CWB) 모델의 설계와 전략수립을 이끌었다. 2012년까지만 해도 영국에서 하위 20%의 낙후지역으로 아동빈곤과 자살률 높은 도시였던 프레스턴은 2018년 영국에서 가장 크게 개선된 도시로 런던보다 살기 좋은 도시로 꼽혔다. 희망제작소는 대안적 지역경제 전략으로 주목받고 있는 지역공동체자산구축(CWB)의 한국적 방향을 탐색하기 위해 10월 3일 닐 매킨로이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프레스턴 모델의 성공비결
– 2012년 무렵 시작되어 지역 주민들의 삶의 질을 크게 개선시킨 결과로 주목받아온 프레스턴시의 지역공동체자산구축(CWB) 모델의 성공요인은 무엇인가?
“프레스턴의 성공요인은 우선 작은 도시 규모를 꼽을 수 있다. 영국에서 CWB 프로그램을처음 시도할 당시 북아일랜드의 대도시인 벨파스트Belfast, 프레스턴 인근의 맨체스터Manchester 같은 큰 도시들도 검토했다. 그에 비해, 프레스턴은 당시 인구 12만 명의 소도시라 테스트베드 같았다.
두 번째는 지역에 대학교와 전문대학, 주택 협회가 있어서 주요한 앵커(닻) 기관의 역할이다. 무엇보다 프레스턴에는 민주적 경제를 이해하고 지역공동체자산구축(CWB) 모델을 통해 만들고자 하는 비전을 이해하는 정치적 리더십이 있었다. 이번에 나와 함께 한국을 방문한 매튜 브라운(Matthew Brown) 프레스턴시의회 의장이 그런 역할을 했다. 대규모 쇼핑타운을 건설하려던 외부투자사가 글로벌 금융위기 여파로 파산하자 절망에 빠졌던 프레스턴 지역경제를 CWB전략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주민들의 협력을 이끌어낸 게 성공의 기반이 되었다.”
– 지역공동체자산구축(CWB) 모델을 추진하려면 도시 규모, 앵커기관, 정치적 리더십이 필수 요소라는 이야기로 들린다.
“꼭 그렇지는 않다. 내가 꼽은 성공 요인들의 일부는 처음 모델 설계와 연결돼 있기도 했지만, 일부는 CWB가 가능한 조건들을 보다 광범위하게 탐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발견한 지점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프레스턴에 CWB 모델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들여다봤을 때, 우리는 프레스턴 앵커들의 지역 내 지출(조달)이 매우 낮은 점을 발견했다. 2012~2013년 당시 10억 파운드(약 1조760억 원)의 앵커 지출 중 지역 내 지출은 5%에 그쳤다. 내가 영국에서 접한 다른 어떤 곳보다 저조한 수위였다. 그랬기 때문에 오히려 빠르게 성공하리라 예측했고, 프레스턴이 CWB의 효과성을 입증할 좋은 시험대였다고 말씀드린 거다.”
– 그렇다면 지역공동체자산구축(CWB) 모델의 방법론은 언제, 어떻게 체계화되었나?
“프레스턴에서 2016~2017년에 좋은 결과가 나오고 영국의 다른 도시에서도 관심을 갖게 되면서, CWB의 여러 측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5개 기둥(Five Pillars) 영역을 고안해 방법론을 고도화했다. 이는 2018년 스코틀랜드 노스에이셔(North Ayshire)에 처음 적용됐고 이후 수십 개 지역의 CWB 프로젝트에 활용하고 있다.
5개 기둥은 제가 이끌었던 민간싱크탱크인 CLES(Center for Local Economic Strategies, 지역경제전략센터)에서 동료들과 함께 구상했다. 기본적으로 경제학의 생산 3요소(자본, 토지, 노동) 개념에서 출발해 민주적이고 포용적인 지역경제로 구체화하는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해서 ‘공정한 노동’ ‘진보적 조달’ ‘토지와 자산의 공정한 이용’ ‘지역금융’ ‘포용적이고 민주적인 기업’이라는 5개 기둥이 도출되었다.”
더 나은 지역경제를 만들 5개의 기둥
– 지역에서 CWB모델을 적용해 지역공동체 중심의 경제전략을 세우고자 한다면 먼저 5개 기둥을 어떻게 만들어낼지 파악해야 한다고 보나?
“그렇다. 최우선적으로 해당 지역에서 5개 기둥의 현황이 어떤지 파악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 지역의 조달 지출 현황이 어떠한지, 생활임금 정책이 있는지, 지역화폐가 잘 운영되는지, 협동조합이 몇 개나 있으며, 토지와 물적 자산에 대한 주민들의 민주적 소유권은 있는지 등. 그러한 흐름과 현황을 분석하고, 5개 기둥에 해당하는 활동을 더 많이 하기 위해 앞으로 할 일들을 찾아내는 거다.
각 지역이 CWB모델의 5개 기둥 영역에서 펼치는 사업들은 각기 다르다. 클리블랜드는 앵커기관의 수요를 조달하는 데 집중했고, 프레스턴은 조달과 앵커에 중점을 두었지만 협동조합을 개발하는 데에도 중점을 두었다. 더 큰 자치정부 차원에서 추진하는 스코틀랜드 CWB 모델의 경우는 처음부터 5개 기둥 모두에 걸쳐 설계한다. 중요한 것은 지역상황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그에 맞는 전략을 실행하는 거다.”
–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차원에서 CWB 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고, 닐 매킨로이씨는 그 정책설계 과정에 처음부터 함께하셨다고 들었다.
“2018년에 스코틀랜드 노스에이셔North Ayshire 시의회 의장인 조 컬러닌Joe Cullinane이 ‘CWB를 훨씬 더 깊고 강하게 추진해보고 싶다. 우리 지역 예산은 프레스턴의 5배고, 더 큰 영역의 정책 권한을 갖고 있으니 그에 맞는 실행 계획을 세워달라’고 제안했다.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자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차원에서 CWB 정책을 채택하기로 했다.
특히, 스코틀랜드에는 ‘커뮤니티 플래닝 파트너십’이 15년 동안 운영되어 왔는데, 여기에 이미 모든 앵커들이 포함돼 있어 CWB 정책 추진에 매우 유리한 구도를 가지고 있었다. 웰빙경제 Wellbeing Eeonomy 실행전략으로 CWB 정책을 도입한 스코틀랜드 자치정부는 CWB 전략 실행계획 수립을 의무화하는 기본법안을 내년 6월 통과시킬 예정이다.”
– 스코틀랜드가 이렇게 전폭적으로 CWB 정책을 도입한 배경은?
“한마디로 가난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와의 불평등으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빈곤에 처했다. 위스키와 같은 일부 대형산업 중심으로 성장했지만, 농촌지역 인구는 자꾸 줄어들었고, 도시재생이나 지역주의 정책의 실패를 경험했다. 전통적인 경제성장 전략을 꾀했음에도 지역이나 주민 모두 혜택을 누리지 못했다.”
작은 기업들이 조달에 참여하려면
– 앵커의 지출을 지역 조달로 전환하고자 할 때, 지역 내 협동조합이나 사회적기업, 중소기업들이 계약을 맺을 수 있는 준비가 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조달 계약 규모를 키우는 게 어렵기 때문인데, 이는 CWB 한국모델에 대한 고민 지점 중 하나다.
“매우 어렵지만 중요한 지점이다. 우리의 CWB 전략은 언제나 무한 규모확장을 최우선으로 하는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를 길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예컨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미드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우리가 CWB 실행계획을 세웠는데, 그곳은 규모는 작지만 고품질의 지퍼를 만드는 중소기업들의 터전이었다. 그런데 이런 중소기업들이 록히드나 보잉 같은 대기업에 줄줄이 인수되고 자산이 추출되자 직원들의 소유권과 지역내 자산을 보호하기 위해 CWB를 도입했다.
중소기업도 충분히 계약에 참여해 경쟁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공공기관 조달의 경우 계약규모를 더 작게 만들어야 한다. ‘언번들링'(unbundling)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중소기업이 대기업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동등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중소기업 우선구매라든지 장애인고용기업 계약 비율 준수와 같은 규정은 우대 또는 특혜 계약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의 성장을 장려하는 일이다.”
– 기존 조달에 참여하는 계약업체, 기득권을 가진 업체들의 저항이나 반발이 있을텐데, 프레스턴이나 다른 지역, 도시에서는 어떻게 극복했나?
“프레스턴에서도 큰 규모의 기업들이 여전히 조달 지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많은 대규모 건설계약은 대기업이나 지역의 기득권자에게 돌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지역경제 개발사업에 더 많은 업체들이 경쟁력을 갖추고 시장에 진입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단순히 ‘지역에 있는’ 농장이고 업체라서 계약을 주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접근이다. 그들도 경쟁에 참여해서 계약을 따낼 수 있도록 해야한다. 경쟁력을 기르고 역량을 갖추도록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부와 자산을 지역으로 옮기는 CWB라는 대담한 전환에서 로컬은 프록시(대리자)다. 즉, 로컬은 부의 순환 가능성이 더 높고, 지역주민을 고용할 가능성이 더 크며, 지역 공급망을 보유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의미지 로컬 현지업체가 항상 최고라는 뜻은 아니다. 또한 지역이 반드시 모든 자원을 현지화(localization)해야 한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 반대를 원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 미국 시카고의 낙후된 지역의 CWB는 지역사회 구성원 가운데 누가 가장 불이익을 받고 있으며, 그들이 어떻게 계약을 따낼 수 있는지에 관한 전략이다. 시카고에서는 빈곤층이 많은 남부, 서부가 계약을 따내고 시카고의 다른 지역에서 계약을 양보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는 그런 시도가 의미 있을 것이다.”
– CWB 전략을 채택한 세계의 각 도시와 지역을 보면 앵커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해 보인다.
“모든 앵커는 투자하고, 고용하고, 토지와 부동산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CWB는 앵커들의 투자와 고용, 보유한 자산이 공익을 위해 활용될 수 있도록 촉진하는 전략이다. 또한 앵커는 그 자체로 ‘장소성’과 장소의 ‘리듬’을 만든다. 앵커는 지역의 중요한 경제주체로서 문화적·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이는 CWB 전략을 확산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 현재 한국은 지방도시들의 청년 인구유출과 고령화 문제가 심각하다. CWB 전략이 대응책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
“인구감소는 지역경제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상이다. 효과적이지 않은 경제전략이 물리적, 공간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고 할까. 인구감소는 그래서 권력과 경제의 통제권과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더 많이 가지면, 그 지역을 떠날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다.
이번에 한국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한국형 CWB 모델을 만들고 있는 전남 영암군을 방문했을 때 청년들이 지역에 정주하지 않으려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나는 청년들을 유인하는 핵심방법 중 하나가 그들에게 지역경제에 대한 통제권을 더 많이 부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토지 소유권, 직원 소유권, 공동체소유권, 기업에 대한 지분 등과 같은 경제활동 권리가 높아지면 자신들의 직업과 지역에 더 큰 의미가 생길 수 있다.”
인터뷰 진행: 이은경 희망제작소 소장, 배규식 희망제작소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