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A씨는 지하철 화장실에 왜 갇혔을까
[포럼] 희망제작소 ‘2007 지하철 프로젝트’ 발표회
텍스트만보기 이경태(sneercool) 기자

▲ 서울메트로나 서울도시철도공사도 ‘높낮이가 다른 손잡이’ 아이디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 희망제작소
▲ 지하철 화장실은 겉으로는 깨끗하지만 막상 들어가면 여전히 불결하다
ⓒ 희망제작소

A씨는 급하게 지하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현재 시각 오전 7시48분. 바로 역에 도착하는 지하철을 타고 가면 출근시간에 가까스로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개찰구를 열고 나가면서 A씨의 머릿속은 최단거리로 환승하기 위해 타야 하는 차량 번호로 가득하다.

겨우 인파를 비집고 들어간 차량 안. 역시 러시아워다. 전동차의 급제동과 급출발에는 이미 익숙하다. 발끝을 부지런히 놀려 중심을 확보한다. 하지만 여전히 어깨에 멘 가방이 문제다. 거치적거리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무겁다. 선반 위에라도 올려놓고 싶지만 손잡이보다 높은 곳에 있는 선반이 멀어 보인다.

전날 마신 술 때문인지 배가 살살 아파온다. 한 정거장만 참아보자고 되뇌어본다. 환승역인 다음 역까지 가는 시간이 한 시간과 같이 느껴진다. 도착과 동시에 황급히 전동차에서 내렸지만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다.

우선 무작정 개찰구 바깥으로 나왔다. 여전히 수많은 광고들만 눈에 띌 뿐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화장실 위치를 알리는 표지를 겨우 발견한다. 뛰어 가보니 앞으로 108m 앞에 있단다.

식은땀을 흘리며 A씨는 걸음을 옮겼다. 각고의 노력 끝에 화장실에 무사히 도착했다. 비어 있는 곳이 눈에 띈다. 황급히 뛰어 들어갔다. 이 순간만큼은 출근 시간도, 러시아워의 고통도 A씨의 머릿속에서 저 멀리 날아갔다.

그러나 5분 뒤 A씨는 심각한 실수를 발견했다. 세면대 쪽에 있는 화장지를 뜯어오지 않았던 것. 순식간에 눈앞이 노래졌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는데 딱히 방법이 없다. 엉덩이를 깐 채 A씨는 도대체 아침이 이렇게 꼬인 이유가 뭔지 고민해봤다.

▲ 여기에도 광고가? ‘광고천국’ 지하철.
ⓒ 희망제작소
▲ 도쿄지하철의 점자운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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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가 화장실에 갇히게 된 근본적인 까닭은 무엇일까? 전날 마신 술 때문일까, 아니면 늦잠을 잤기 때문일까. 희망제작소(박원순 상임이사) 사회창안센터라면 이렇게 답할 것이다.

“지하철이 시민의 눈으로 디자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는 4일 오후 6시 수송동에 있는 희망제작소 3층 회의실에서 ‘2007 지하철 개선 프로젝트 : 더 좋은 지하철을 위한 박원순 변호사의 국내외 지하철 탐방기 발표회’를 열었다. 이날 발표 내용대로 지하철의 많은 부분이 다시 디자인됐다면 A씨는 화장실에 갇히지 않아도 됐을지도 모른다.

발표회에는 음성직 서울도시철도공사 사장, 김택균 서울도시철도공사 홍보팀장, 최희주 서울메트로 부사장, 신동진 건설교통부 도시철도팀장 등 지하철과 관련된 실무자들도 참석했다.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는 지난해 말부터 ‘2007 지하철 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12월까지 진행한 공모전을 거쳐 시민 아이디어를 모은 ‘지하철 개선 1차 정책제안서’도 1월에 관련 사업기관들에 제안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높낮이가 다른 지하철 손잡이’가 그 대표적인 예.

또 지난 3월부터 진행된 공모전에서 나온 시민 아이디어 중 91개 중 22개를 정책제안서로 만들어 5월 7일 건설교통부와 지하철 운행 지자체 교통국, 서울메트로, 서울도시철도 등에 제안했다. 상당수 아이디어에 대해 긍정적 회신도 받았다.

지하철이 국내에서 운영된 지 34년째. 수송인원은 27배나 늘어났다. 박 변호사는 이날 영국·일본·독일 등에서 지하철을 이용한 경험과 사진을 토대로 한국의 지하철이 보완해야할 점을 지적했다.

시민의 눈으로 지하철을 디자인하라

▲ 박원순 변호사(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이종호

박 변호사는 “평범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하철을 바라봤다”며 “지금의 세상을 새로운 시각, 상상력으로 보다보면 희망을 더 찾을 수 있고, 좋은 세계로 가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발표를 시작했다.

“도쿄지하철은 점자운임표, 휠체어 높이에 맞춰진 비상벨, ‘노약자석’이 아니라 ‘우선석’과 같은 단어 사용 등 세세한 부분에서 약자에 대한 배려가 돋보인다.

게다가 한 장의 정보판에서 현재 위치뿐 아니라 역 주변 주요 기관·단체·가게 등을 업종별·지역별로 나누어 잘 설명해주고 있다. 몇 번 전동차량에 타면 환승을 최단거리로 할 수 있는지, 환승역의 첫차와 막차시간이 언제인지도 한 번에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지하철도 약자를 위한 배려와 함께 정확하고 체계적인 정보를 제공해야 하지 않겠나.”

특히 박 변호사는 “한국의 지하철은 광고 천국”이라며 “서울메트로와 서울도시철도공사에서 적자가 나고 있는 실정인 것은 알지만, 공중파 TV에서도 퇴출당한 대부업 광고가 지하철에 있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다”고 지적했다.

“광고가 너무 난잡하게 있는 것도 문제다. 그러다 보니 정작 시민들에게 필요한 공공표지가 보이지 않는다. 또 비상조명등이나 비상방독면 등 안전물품 비치장소에도 광고판이 설치되어 있어 시민들이 안전물품 비치장소라는 것을 기억할지 모르겠다.”

이 밖에도 박 변호사는 “화장실에도 휴지 비치나 청결 문제 등 아직 고쳐나가야 할 부분이 많다”며 “세계인권선언이 벽면에 적혀있는 독일 지하철처럼 테마가 있고 역사가 살아있는 문화 지하철로 발전시키는 방안도 모색해 시민에게 정말 쾌적한 환경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희망제작소 사회창안센터는 근거리 지하철역 간 환승시스템 구축, 수송인원 확충을 위한 접이식 의자 설치 등을 제안했다.

음성직 서울도시철도공사 사장은 “이미 몇 가지는 시행 중인 것도 있지만 지하철 건설 초기 승객수송과 건설편의에만 치중했고 지금도 시민 편의, 문화 등의 시각을 갖추기 위해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라며 “이러한 지적을 잘 반영해서 시민에게 다가가는 서울도시철도가 되겠다”고 말했다.

최희주 서울메트로 부사장도 “운영에서 발생하는 적자를 메우기 위해 광고가 난립한 것”이라며 “오늘 나온 제안을 운영 실정에 맞춰서 하나라도 더 시정하겠다”고 말했다.

▲ 참가자들은 발표회를 마친 후 이날 나온 제안들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며 의견을 나눴다.
ⓒ 오마이뉴스 이경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