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희망소기업’은 희망제작소 소기업발전소가 지원하는 작은 기업들로, 지역과 함께 고민하고  성장하며 대안적 가치를 생산하는 건강한 기업들입니다. 이 연재가 작은 기업들의 풀씨 같은 희망을 찾아 많은 이들에게 알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희망소기업 열 여섯 번째 이야기는 인쇄용 한지(韓紙)를 만드는 ‘미래영상’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엄마, 나 피아노 싫어. 가야금 배울래”

7살 때부터 전주에서 자란 미래영상 김석란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그 나이 때 어린 여자 아이라면 으레 한번쯤은 다니는 피아노 학원을 마다하고, 가야금을 배우고 싶다고 부모님을 졸라댔던 것. 우리 옛 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있는 전주 지역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오래 전부터 그녀의 머리 속에 자리 잡은 궁금증 때문이었다.

“어느 날 음악 수업을 듣는데, 책을 자세히 살펴보니 모두 서양음악 뿐이더라고요. 왜 우리가 국악은 배우지 않고 양악만 배워야 하는지 이상했어요. 저는 당연히 우리 것을 먼저 배워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남들 다 배우는 피아노 대신 가야금을 배우겠다고 한 거에요. 그때 민요하고 산조 가락까지 배웠던 것 같아요.”

”사용자
우리의 것을 스스로 비하하는 서양 우월 교육은 비단 음악 시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이어진 제도권 교육에서 은연 중에 강요되는 ‘서양 것은 좋고, 우리 것은 좀 떨어진 것’이란 메시지는 끊이지 않고 계속됐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그러한 현실이 내심 못마땅했다. 그러다 들어간 대학에서 그녀는 한지(韓紙)와의 첫 인연을 맺는다.

김 대표는 대학에서 학보사 기자 생활을 했다. 많은 기사를 썼지만 그 중에서 1년 이상 연재했던 ‘부채와 한지 장인(匠人)’에 대한 기획 기사가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종이를 만드는 장인들을 취재하면서 한지에 대한 매력에 푹 빠졌던 것. 하지만 한지에 대한 역사적 자료는 턱없이 부족했다. 한지의 발상지로 알려진 전주에서도 그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한지와의 두 번째 인연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다.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던 그녀는 대학 졸업 후 10년 가까이 전문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전통 무용 등 우리 춤에 대한 사진 작업을 주로 했다. 이를 위해 전주에 작은 스튜디오도 차리는 등 사진 작업에 열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품 구상을 하는 중 ‘우리 춤을 우리 종이인 한지에 담아 보면 어떨까?’ 란 생각이 들었다. 한지는 보존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고유의 질감이 우리 춤의 느낌을 더 잘 살려줄 수 있으리란 느낌에서다. 눈으로만 보는 사진이 아니라, 촉감으로 느낄 수 있는 사진이 눈 앞에 어른거렸다. 마음 속에만 담아두기에는 아까웠다.

“사진하고 관련된 모든 재료는 수입품이에요. 사진의 기본적인 기능과 특성은 기록, 보존, 재현에 있어요. 즉 보존과 재현을 얼마나 잘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한데, 이러한 특성에서 그 어떤 종이보다도 한지가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한지로 사진을 인화할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죠. 96년 10월에 이 사진들을 가지고 사진전을 열었어요.”

실험적인 사진전이었지만,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다. 처음이라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한지에 담긴 우리 춤의 역동적이면서도 단아한 자태는 제 자리를 찾은 것처럼 보였다.

사진작가에서 한지 사업가로

김 대표가 본격적으로 한지 사업에 나선 것은 아이를 갖게 된 이후부터다. 전업 화가인 남편과 함께 둘 다 돈 안 되는 전문 작가 활동을 하기에는 경제적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아무 일이나 할 수는 없는 일. 경제적 이익만을 목표로 삼기에는 아직 젊었다. 사진전을 통해 관심이 더욱 커진 한지로 사업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사진전을 준비하면서 한지로 인화작업을 해봤던 경험을 살려 한지 인화지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다. 때마침 당시(98~99년)가 벤처 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이 적극적이었던 터라 사업 시작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남편의 적극적인 지원도 큰 힘이 됐다. 한지로 인화한 사진이 기존 인화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진다는 남편의 말이 용기를 주었다.

“99년 말, 세계적 흐름의 중심이 오리엔탈리즘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확신을 했어요. 그러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 한지 인화지 사업의 시장성이 충분하다는 판단이 들었던 거죠. 우리 종이에 인화를 해보면 기존 인화지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전혀 다른 느낌을 얻을 수 있어요.”

한지 사업에 대한 기대감이 이들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2000년 8월에 설립된 미래영상은 업계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사람들은 현대적 매체라고 할 수 있는 사진 기술과 전통적 매체인 한지가 결합된 사업 아이템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순탄할 것 같았던 사업은 초기부터 벽에 막혔다. 사업성과 대중성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가 나오면서 정부 지원이 계속 반려됐던 것. 당시 사진 시장은 3천 억 원 규모였지만, 한지 인화지 사업이 뿌리를 내리기에는 미약하다는 것이 평가단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애초 시장 자체가 전무한 한지 인화지 사업에 들이댄 평가 잣대로는 너무 엄격해 보였다.

그렇게 사업 초기부터 암초에 걸렸지만, 쉽게 물러설 그녀가 아니었다. 김 대표는 평가단원들을 일일이 만나가며 설득해 나가는 등 3번의 도전 끝에 정부 지원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애초 목표한 금액에는 다소 못 미치는 액수였지만, 한지 사업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에는 기술혁신 자금 지원도 받는 등 나름의 사업 기반을 닦아나갔다.

인쇄용 한지 개발로 상품화에 성공

전통 한지 그 자체를 사진 인화지로 쓸 수는 없다. 인화지로 만들기 위해서는 한지에 적합한 감광유제를 찾아야 한다. 감광유제는 빛을 감지하여 상을 만들기 위한 감광물질로, 통상적으로 필름에 도포해서 사용한다. 김 대표는 이 감광유제를 이용해 한지를 사진 인화지로 만드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사진 인화지 기술 대부분은 코닥이나 후지필름 등 몇몇 대형 기업들이 그 기술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사진과 관련된 과학적 메커니즘은 철저히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비밀이었고, 어디서도 그 노하우를 얻을 수 없었다. 오직 그 동안의 경험과 주변 지인들의 조언에만 의지해야 했다.

실험실에서 수많은 실험을 반복하면서, 최적의 감광유제를 찾는 데 주력했다. 각각의 특성에 맞게 찾아낸 감광유제를 한지에 바르고 사진 현상 하기를 여러 번.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인화지 개발에 성공했다. 그 동안의 땀방울이 결실을 얻는 듯,  이제는 양산만 시작하면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실험실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상하게도 실험실에서 소량 생산할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대량 생산에서는 품질이 균일하지 못했다. 김 대표는 결국 인화지 사업을 접어야 했다. 현실적인 선택이었고, 보다 대중적인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서다. 새로 선택한 분야는 디지털 프린터 용지였다. 사진 인화지에 비해 시장도 훨씬 컸으며, 한지의 특성을 잘 어필하면 틈새시장이 있을 것이란 판단에서다.

”사용자인쇄 용지는 인화지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로의 진출이 가능했다. 한지로 만든 달력, 엽서, 카드 등 실생활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소재가 많았다. 인화지 사업에서 실패한 경험을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이번에는 체계적인 준비를 통해 상품화에 나섰다.

“새롭게 개발한 인쇄용 한지로 디지털 출력을 하려고 했어요. 하지만 가는 인쇄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더라고요. 한번도 한지에 인쇄해 본 적이 없는 터라, 기계에 무리가 올지 모른다는 우려에서였죠. 수만은 거절 끝에 한 인쇄소의 승낙을 받았어요. 하지만 밤에만 다른 인쇄가 없을 때 한다는 전제를 달았죠. 총 2천부 인쇄하는데 보름이나 걸렸죠.”

어렵게 첫발을 내디딘 인쇄용 한지 사업으로 미래영상은 다양한 상품 개발에 나섰다. 브랜드도 ‘여백’과 ‘천년사랑’으로 정했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수출계약도 체결하는 등 사업 확대의 발판을 마련했다. 2002년 5월에는 사업 시작 2년여 만에 작은 결실도 맺었다. 특허청이 선정하는 ‘신지식특허인’에 김 대표가 선정된 것이다.



디지털 한지로 부활한 조선왕조실록

김 대표는 최근 조선왕조실록에 흠뻑 빠져있다. 자신이 개발한 인쇄용 한지가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인 조선왕조실록 복본화사업에 채택됐기 때문이다. 총 20억원이 투입되는 이 사업은 2011년께 마무리될 예정이다. 미래영상은 현재 인쇄 과정에서 원본의 느낌을 최대한 그대로 재현할 수 있는 이미지 리터칭 작업을 하고 있다.

이번 복본화사업에 사용되는 조선왕조실록은 전주사고본이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유일하게 보존된 실록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본을 제외하고는 다 불에 타 없어지는 등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요. 이후 목판으로 복원한 실록 중 하나가 태백산사고본인데, 선조 당시의 최고 기술로 만든 것이라 볼 수 있어요. 그로부터 400년이 넘게 흘렀고, 다시 복본화사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현대의 최고 기술인 디지털 프린트 기법으로 진행되는 거죠.”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에 대한 김 대표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몇 년 동안 이 사업의 당위성을 알리기 위해 발 벗고 뛰어다녔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600년 왕조의 역사가 자신의 기술로 재현되는 것 역시 자랑스럽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 역사와 문화의 위대함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 같아서 설렌다.

”사용자
“전세계적으로 이러한 사업을 해본 전례가 없어요. 우리나라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어요. 600년 왕조가 지속됐고, 그 600년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긴 나라도 우리나라가 유일하죠. 이를 보면 기록문화는 우리나라가 전세계에 으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저는 이를 기회 삼아 우리의 기록문화와 한지의 우수성을 전세계에 알리고 싶어요.

한지는 ‘닥’이 주원료로 사용되며, ‘외발’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뜨는 방식을 통해 만들어진다. 중국 화지(華紙)나 일본 화지(和紙)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우리 한지(韓紙)에 대한 세계인들의 인지도는 아직 낮은 편이다. 그래서 김 대표는  조선왕조실록 복본화 사업을 단지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제품을 단순히 상품으로만 팔고 싶지는 않고, 가치 중심의 제품을 팔고 싶어요. 중국과 일본이 무서운 점은 그들의 문화를 세계인들에게 알게 모르게 침투시키는 데 있는데, 우리 역시 이러한 것들에 주목해야 한다고 봐요. 조선왕조실록을 언젠가는 전세계 모든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날이 오겠죠?”


”사용자글쓴이 노준형은 전공이 뭐냐고 물어볼 때가 제일 난감하다. 전자공학과 글쓰기의 상관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회로설계(Circuit Design)와 글쓰기의 원리는 동일하다고 종종 주장한다.
몇 차례 취재기자를 꿈꾸며 <코리아포커스>, <아시아경제 브이에스뉴스> 등에서 짧게나마 기자생활도 했으나 불가항력적 상황에 밀려 지금은 PR 대행사 커뮤니케이션플러스에서 일하고 있다.
 ‘노대리의 직딩일기’와 같은 자전적 에세이를 쓰고 싶지만, 잦은 야근에 치여 하루하루 꿈을 내일로 미 루고 있다. 희망제작소의 소중한 부름을 받게 된 것에 감사하며 사는 소박한 직장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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