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봉과 깃발, 축제같은 집회

유례없는 비상계엄 선포는 국가, 사회, 그리고 시민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분노와 절망 속에서도 우리는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길을 찾아야 합니다. 희망제작소는 2025년을 맞아 <민주주의X마음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광장과 일상의 경계에서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 지금 당신의 마음은 안녕하신가요?

민주주의의 새 물결, 꺼지지 않는 오늘의 촛불

“네 배후 세력이 누구냐?!”

“고양이집사연합: 제 배후에는 우리 집 고양이가 있습니다. 😺”

최근 시위 현장에 등장한 이색적인 현수막과 깃발은 그 자체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며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간 분노와 저항의 목소리가 지배적이었던 광장도 차츰 재치가 섞인 부드러운 장소로 바뀝니다. 대통령 탄핵 촉구라는 막중한 의제를 다루는 시위에서조차, 그 분위기는 엄숙하기보다 해학적이고, 마치 축제와 같습니다.

연일 광장에 휘날리는 현수막과 깃발에는 노동조합이나 시민 단체의 이름이 적혀 있지만, 게 중에는 ‘전국고양이집사노동조합’, ‘만두노총’, ‘강아지발냄새연구회’와 같이 존재하지 않는 단체 이름들도 섞여 있습니다. 이색 깃발들이 등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밈(Meme)과 농담을 활용해 현 시국을 풍자하는 것은 한국의 해학 문화를 계승한 항의 정신의 일부입니다. 과거, 일부 정치인들은 시민들의 시위를 단기간에 집단적으로 일어나는 움직임으로 일축하고, 그들의 배후 세력을 추적하려 했습니다. 풍자적인 단체명과 메시지는 이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습니다. ‘특정 정치적 집단이나 정당에 소속되지 않더라도, 현 상황을 비판할 수 있다.’는 의지의 표현인 셈입니다. 

현대인의 ‘시위 필수템’은 현수막과 깃발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지난 2017년 박근혜 탄핵 집회에서 휘날렸던 촛불은 이제 ‘응원봉’으로 이어져 광장을 밝힙니다. 광장에 새로운 아이템이 등장한 것은 시위 주 참여층의 연령대 변화와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고 수많은 2030세대가 모인 건데요. 이들에게 아이돌 응원봉은 가장 소중하고 친숙한 물건입니다. 광장에서 만난 동료 시민이 내 것과 같은 응원봉을 흔들고 있을 때, 이들은 말로 전달되지 않는 위로와 유대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환대를 넘어 연대로 향하는 민주주의의 마음

이번 시위와 집회에서 눈에 띄었던 점은 참여자 간의 상호작용입니다. 특히 같은 성별이나 세대 내 소통을 넘어서, 나이대, 성별, 직업군, 출신 지역 등 다양한 정체성을 초월한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광장은 단순히 정치적 입장을 표출하는 공간이 아닌, 연대와 이해를 경험하는 배움의 장이 됩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지난해 12월 21일과 22일 있었던 ‘남태령 대첩’이 있습니다. 한덕수 전 대통령 권한대행의 농업 4법 거부권 행사에 반발한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서울로 향한 것인데요. 남태령 고개에서 트랙터 행렬이 경찰 차벽에 가로막히자,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응원봉을 들고 대치 장소로 향했습니다. 함께 ‘농민가’ 가사를 외쳐 부르며, 시민들은 ‘나와 다른 정체성을 가진 자와 환대를 나누는 감각’을 몸소 느꼈습니다. 그날, 트랙터 군단은 과거의 좌절을 딛고 서울 도심으로 전진했습니다. 

‘선결제’와 같은 새로운 문화도 눈에 띕니다. 선결제는 상품 수령자를 정하지 않은 채 미리 대금을 결제해 두는 방식으로, 따뜻한 음료나 국밥, 김밥과 같은 식사류를 나눌 수 있습니다. 결제자의 이름을 말하면 집회에 참여한 누구나 선결제된 음식을 받을 수 있는 것이죠. 이 같은 방법을 통해 해외 거주자와 같이 현장에 방문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물리적 거리를 초월한 연대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선결제 문화를 담아낸 웹사이트도 생겼습니다. 20대 청년들이 만든 ‘시위도 밥먹고 :: 선결제 나눔 지도’인데요. 지도를 통해 서울 주요 집회 장소뿐 아니라 대전, 대구 등 주요 지역의 선결제 가게와 잔여 수량 현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세심한 배려가 하나, 둘 더해지며, 환대로 시작된 시민 간의 만남은 점점 두터운 연대로 향해갑니다.

목표지향적 민주주의에서, 관계지향적 민주주의로

새로운 민주주의의 물결은 단순한 정치적 입장 전달을 넘어, ‘관계’와 ‘연대’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기존 민주주의는 목표 달성을 위해 때로 대립과 분열을 감수했지만, 오늘날 민주주의는 그 과정에서 다양한 목소리를 경청하고, 건강한 문화를 형성하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삼고 있습니다.

광장에서 우리는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청년은 기성세대가 살아온 배경을, 기성세대는 청년의 새로운 문화를 배웁니다. 이질적인 만남은 처음에는 낯설고, 때로는 갈등과 긴장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내가 알고 있던 세상 너머에 누군가 현존하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작금의 상황에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모습이 ‘축제 같은 집회’로 표상되는 이유는, 단순히 큰 노랫소리와 화려한 응원봉 때문만은 아닙니다. ‘남태령 대첩’ 이후 ‘남태령 뒤풀이-남태령 대첩을 함께 한 우리들의 집담회’로 시민들이 한 번 더 모인 것, 그날의 열기가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 현장으로 번진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든, 동료 시민들이 내 목소리를 경청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연일 광장에서 실현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시민들이 한데 모인 ‘민주주의 마음 공동체’에서, 우리는 서로의 상처받은 마음을 다독이고, 분노와 좌절 대신 민주주의의 희망이라는 새 연료를 충전할 수 있습니다. 부러지지 않는 유연한 마음, 그것이 오늘날 광장과 일상의 경계에 놓인 민주주의의 마음입니다.

글: 이채윤 희망제작소 인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