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죽으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다”

2011년 12월 27일(화) 저녁, 평창동 희망제작소에서 뿌리공부방 다섯 번째 모임이 열렸습니다. ‘지역문화 바로보기’ 라는 주제로 2시간 동안 ‘역사만들기’ 이기만 대표의 강의와 질의응답이 진행되었습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워온 역사는 왕의 역사, 중앙의 역사, 서울의 역사였습니다. 지역은 간혹 특별한 사건이 발생한 장소로서만, 특산물의 산지로서만 언급되었습니다. 현재도 이러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곧 서울의 역사로 인식되곤 하니까요.

하지만 최근 들어 지역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조금씩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중앙 중심 역사의 그림자에 가려서 소외되고 타자화된 지역이 실제로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한 진짜 주인공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지요. 이번 뿌리공부방에서는 역사만들기 이기만 대표를 모시고 ‘지역민과 함께 지역의 전통과 문화의 가치를 재정립하고 보존 · 계승하면서, 지역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활동에 대해 들어 보았습니다. 아래는 이기만 대표의 강연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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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만들기는 20년 간 꾸준히 이 땅 지역민들의 삶의 역사와 그 현장을 찾아다니며 조사 활동을 펼쳐 온 단체입니다. 주로 지역 시·군지 발간 작업을 진행했고, 현재까지 전국 60여 개 지자체의 시·군지를 발간했습니다. 기획에서부터 출판까지 모든 과정을 총괄해 수행하고 있습니다. 7~8년 전부터는 마을만들기 작업의 멘토로서 마을만들기 코디네이팅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역민이 보여주는 다양한 삶의 역사를 그 뿌리에서부터 열매까지 두루 갈무리하는 일과 더불어 문헌 중심, 중앙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사람 중심, 주제 중심, 현재 중심의 새로운 ‘역사만들기’를 실행해나가고 있습니다.
 
영화 ‘밀양’의 딜레마

지난 2007년 칸느영화제에서 배우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로 잘 알려진 ‘밀양’의 영어제목은 ‘Secret Sunshine’입니다. 사실 밀양(密陽)이라는 지명은 ‘볕이 따뜻한 살기좋은 고장’을 뜻하는데, 감독의 의도에 따라 밀(密)을 ‘빽빽하다’가 아닌 ‘은밀하다’ 또는 ‘숨기다’는 뜻으로 바꾸어 해석한 것이지요.

영어제목에서 느껴지는 바와 같이 영화 속 밀양시는 다소 암울한 공간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밀양시에서는 영화세트장을 활용해 영화의 거리를 만드는 등 영화에 기대어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 지역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는 영화를 이용해 홍보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넌센스(Nonsense)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밀양시의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지역이 절박하다는 사실입니다. 그 내용에 관계없이 영화에라도 기대어 지역을 홍보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오지 않고 지역이 활성화되지 않는 것이 우리지역과 지역문화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역문화’란 과연 무엇일까요. 지역문화란 “어느 한 지역에서 그 지역민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었던 특수한 내용으로 지역민들이 역사의 진행과정에서 선택해 자기화한 가치관이자 생명력” (이해준, 2005)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역’이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중앙’과 대비되는 뜻으로 쓰이는 ‘지방’이나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땅’이라는 뜻을 지닌 ‘향토’라는 말과 달리 ‘지역’은 ‘전체 사회를 어떤 특징으로 나눈 일정한 공간영역’(국어사전) 또는 ‘역사와 문화적 배경을 공유하는 일정한 범위의 생활공동체’를 뜻을 지닙니다. 지역문화 연구자와 학계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지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역의 단위에 대해서 광역 단위, 시 · 군 단위, 마을(고을) 단위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서 마을이라는 용어의 의미나 형태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할 것입니다.
 
문화재와 개발 밖에 없나

우리나라의 지역문화는 문화재와 인물 중심, 그리고 관광과 개발 중심의 문화입니다. 우선 문화재에 대해 살펴보면, 상대적으로 전통 문화자산을 중요시하고, 근현대 문화자산을 소홀히 하는 한편, 유형문화재를 중시하고 무형의 문화자산에는 소홀히 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유홍준 교수의《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연작에서 언급하는 문화유산 역시 대부분 유형문화재입니다. 우리 문화유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대단히 유익한 책이지만, 한편으로는 의도치 않게 대중의 문화재관을 유형문화재에 경도되게 이끈 측면도 있습니다. 한편, 무형의 문화자산을 중요하게 다룬 책으로는 주광현 선생의《우리 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책이 있습니다.
 
관광과 개발 중심의 지역문화도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지역축제, 향토사업, 지역특성화, 마을만들기, 신문화공간 등의 이름으로 지역에서 많은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이러한 사업들이 대부분 관광과 개발 중심으로 이루어져 개성없는 지역축제를 양산하고, 땅을 파고 건물을 짓기에 바쁩니다. 이러한 분위기의 배경에는 상업주의, 성과주의가 자리하고 있고, 지역 현실을 외면한 ‘지역퍼주기’, ‘묻지마식 투자’와 행정 편의주의도 문제입니다.

또한 중앙정부에서 농촌 · 지역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부서간의 과다 경쟁으로 비능률적이고 낭비가 많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특히 지원사업이 일부 마을에 집중되고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하는 지역 간 빈익빈부익부 문제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지난 7~8년 간 수십조 원의 예산이 투입된 지역지원사업이 곧 성과를 낼 것이라고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붓기’ 식으로 진행된 사업의 미래에 대해서는 비판적일 수 밖에 없으며, 앞으로도 상황은 더 안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부터 그간 참여해왔던 지역사업 관련 위원회 등에서 탈퇴했는데 ‘현장에서 작업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관료조직의 문제로만 돌리기보다는 개개인이 밑에서, 현장에서, 더 좋은 사회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역 역사만들기?

지역 기록의 역사는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지역 기록은 지방에 대한 중앙 정부의 통치력 강화와 인력과 세원의 파악이 주목적 이었습니다. 지역 기록의 대표서로는 세종실록지리지(15세기), 동국여지승람(16세기), 여지도서(18세기), 대종지지(19세기) 등이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지역현황 파악과 행정구역 개편을 위해 지역 기록이 추진되었습니다. 이 시대의 지역 기록은 일본인이 편찬한 것과 조선인이 편찬한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조선인이 편찬한 것은 지역(문중)의 역사와 전통 중심으로서 일제에 대한 간접 저항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 60~70년대에는 문화예술인, 상공인, 출향인 등이 중심이 되어 향토지를 만들었고, 90년대 지방자치제 실시에 따라 전국 각 지자체에서 향토지를 발간하고 있습니다. 최근 들어 향토지는 개인과 개별 단체 단위로 많이 대중화되었고, 기술 관점이 연대기적 통사에서 주제별 문화사 중심으로 변했습니다. 또한 작업 단위가 시 · 군 단위에서 마을로 세분화되었으며, e-book 등 웹서비스가 강화되었습니다.
 
지역 역사만들기는 지역의 역사성을 확인하고 새롭게 설정하는 작업입니다. 지역 역사만들기를 위해서는 먼저 지역민의 삶을 기록하고 보존해야 합니다. 개인의 기억 속 역사를 증언이나 구술을 통해 기록하고, 집집마다 일기와 앨범을 수집해 생생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자원을 조사하고 보존하는 데 있어서는 앞서 언급했듯이 전통문화뿐만 아니라 근현대 시기의 자원이 중요합니다. 또한 유형문화 중심에서 무형문화 중심으로 전환해 기록이 없고, 기록을 남길 수 없는 지역민 삶의 문화전통을 복원하고 현재화해야 합니다.

지역의 역사만들기를 위해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은 네트워크 시스템 구축입니다. 지방자치단체, 대학, 지역문화원, 향토기업, 마을조직 등이 함께 연구조사하고 전략을 수립하고, 마케팅, 상품화하는 등 네트워크 시스템을 활용해 작업을 체계화 할 수 있습니다. 지역발전기금을 조성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출향민, 향토기업, 관련 공공기관 등을 대상으로 기금을 모집해 시·군 단위 지역문화재단을 설립해 지자체와는 독립적으로 운영할 수 있습니다. 그 외 지역 역사만들기 활동의 영역으로는 지역활동가 양성, 문화 · 사회교육 강화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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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에 걸친 강의 후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신도시 또는 뉴타운과 같이 전면적인 개발을 통해 조성된 지역이나 마을에서도 역사만들기가 유효한지 여부, 젊은이와 아이들로 하여금 지역의 향토자원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는 방안, 현재 추진 중인 창신동 마을만들기 프로젝트에 대한 조언, 최근에 개관한 전라남도 벌교의 ‘태백산맥 문학관’과 순천 낙안읍성 ‘뿌리깊은 나무 박물관’ 조성사업에 대한 강연자의 견해를 묻는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기만 대표는 지역의 역사만들기를 위한 자세에 대해 “한 사람이 죽으면 박물관 하나가 사라진다”는 말처럼 ‘사람 중심’의 관점을 갖고, 정권과 단체장이 바뀌어도 방향이 바뀌지 않도록 일관성을 유지하고, 지역문화의 재발견은 쉽지 않은 작업이므로 조급성을 버리고 ‘천천히 갈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글_뿌리센터 장우연 연구원 (wy_chang@makehope.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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