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대학에 들어와서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으면 박원순 변호사라고 답하곤 했다. 물론 그 분에 대해 속속들이 잘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참여연대의 주역’, ‘인권변호사’로 잘 알려진 그 분의 이미지는 내가 되고 싶은 인간상과 맞닿아 있었다.

”?”작년인가. 그 분께서 ‘희망제작소’라는, 이름도 생소한 싱크탱크의 상임이사를 맡고 계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뭔가 또 재밌는 일을 벌이시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자주 가는 카페에 글이 올라와 있었다. 희망제작소에서 ‘해피리포터’를 모집한다는 것.

곳곳의 NGO, NPO를 탐방하고 알리는 역할을 한다고 했다. 중학교 때 왕복 2시간이 넘게 걸리는 대학에 NGO 강좌를 들으려 다녔던 내겐 여러 NGO를 가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 뛰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난 흑심(?)을 품고 있었다. 어쩌면 해피리포터가 되면 내가 그토록 동경하던 박 변호사님을 뵙게 될지도 모른다. 기회가 없다면 뵙게 해달라고 떼라도 써 볼 심산이었다.

서류합격이 되었다고. 면접을 보러오라고 메일이 왔을 땐 신기했다. 갈수록 해피리포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은 커져만 가고. 시험기간, 밤을 새서 어리버리한 정신으로 ‘면접’이란 걸 보러갔다. 같이 면접을 본 사람 모두들 대단한 것 같았다. 역시나 밤을 샌 탓에 몽롱한 정신으로 질문에 답을 했다. 떨어지겠지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하는 기대는 버려지지 않았다.

드디어 합격자 발표! 시험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그 날도 도서관에서 밤을 샌 상태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클릭을 한 게시물, 신기하게도 내 이름이 있었다.

와우~^^ 감사합니다. 첫 마음 그대로. 열심히 뛰겠습니다!!

그 때의 감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짧지만 일기를 썼다. 그런데 저 마음이 꾸준히 유지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워크숍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워크숍 공지글에는 박 변호사님이 말씀하시는 시간도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낯선 사람들을 처음 만날 땐 언제나 두려움 반 설렘 반이다. 공지 글의 ‘시간엄수’를 보곤 ‘늦게가면 잘릴지도 몰라’라는 소심한 걱정을 하며 부리나케 워크샵 장소로 달려갔다.

워크숍은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방학 이래로 집에만 갇혀 있다가 새로운 세상을 접한 것 같았다. 같이 활동하게 된 사람들 얼굴에는 모두 ‘나 착해요’하고 써 있었다. 물론 강의를 듣다가 졸기도 했지만 나만 존 건 아닌 것 같아 위안을 삼았다.

”?”가장 좋았던 시간은 마지막 날 맥주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었다. 만난 지 겨우 이틀 된 사람들이었지만 왠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편안했다. 우리의 고민은 비슷했다. 취업문제. 연애문제. 나는 반쯤 취한 사람마냥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낯뜨거운 말을 던졌다. 잘해보리라 마음먹었다. 이런 사람들과 함께라면 괜찮겠다. 워크샵은 내게 해피리포터 활동에 배경지식을 형성해주었고 더불어 좋은 사람들과의 멋진 만남을 선사해 주었다.

하지만 모든 일을 시작할 땐 언제나 의욕만 앞서기 마련. 워크샵을 한다고 갑자기 내가 뚝딱 준비된 기자(?)로 거듭날 리 없었다. 취재, 기사쓰기, 섭외 모두 생소하고 막막했다. 망망대해에 혼자 던져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면 너무 지나친 소리인가.

특히 나를 괴롭힌 건 섭외 공포증이었다. 단체 전화번호만 적어 놓고 내일 해야지, 밥 먹고 해야지 하며 미루기 일쑤였다. ‘들이대기’에는 나름의 소질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전화조차 못 걸었으니. 또한 초기엔 해피리포터의 목적이 정확히 뭔지 몰라 혼란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해피시니어 아래의 사업이라는 생각에 시니어 분들이 활동할 수 있는 단체 위주로 섭외하려다 어려움을 겪었다.

언젠가 엄마께 어떻게 그렇게 음식을 잘하시냐고 여쭤본 적이 있는데 엄마의 답은 간단했다. ‘하다보니까 늘더라.’ 초기의 모든 문제는 ‘하다보니’ 어느새 해결되었다. 섭외가 어려워 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했던 나는 어느 새 웬만한 거절엔 익숙해지게 되었다. 같이 활동하는 친구들과 모였다 하면 고민했던 해피리포터의 정체성 문제도 해결되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해결이 안 되는 건 게으름이었다. 학기중에 한 달에 두 번 기사를 내는 일이 생각보다 벅찼다. 사실 한 편의 기사가 완성되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기초조사에서부터 섭외, 기사쓰기까지. 섭외가 성공하더라도 단체와 나의 스케쥴이 맞지 않으면 포기해야 했다. 간혹 단체 측에서 취재 약속을 미루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려면 기사를 내는 시점도 미뤄지기 마련이었다. 시험기간이 낀 달은 시험 때문에 한 달에 한 편 내기도 힘겨웠다. 학기 중의 대학 생활은 혹자의 말처럼 ‘숨쉴 시간도 없을 만큼’ 나름대로는 바쁘다.

여러 어려움이 있었지만 난 혼자가 아니었다. 전화해서 고민을 늘어놓으면 늘 도움을 주시는 ‘쌀’이 계셨고, 같이 신세 한탄을 늘어놓을 다른 해피리포터들이 있었다. 우리의 고민은 역시 비슷했다. 기사쓰기를 한없이 미루는 게으름도 비슷했고, 섭외하는 걸 힘들어하는 소심함도 닮아 있었다. 초기에는 우리끼리 ‘해피리포터’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했고, 점점 친해지고 나서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지 함께 고민했다. 한 달에 한 번 월례회의에서 함께 밥을 먹고 술잔을 기울이며 그저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수료식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니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이제 모두 한 달에 한 번도 만나기 힘들 거라는 서운한 마음. 취재하고, 기사를 쓰던 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같이 기차를 타고 대성리까지 가서 고기를 구워먹고 마피아 게임을 하던 엠티의 추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사실 내게 해피리포터 활동은 대학에서의 마지막 활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도 취업을 앞둔 대학 4학년이니까. 대학을 다니며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활동에 참여하는 걸 이렇게 열심히 해 본 적이 없었다. 열심히 해야겠다는 의무감에 한 게 아니라 그냥 활동하는 게 즐거웠다. 내 방문에 붙어 있는 롤링페이퍼에 적힌 글들을 새삼 다시 읽어본다. 모두 감사한 말들만 적혀 있다. 나의 4학년 1학기를 이끌어 주었던 고마운 친구들, 고마운 해피리포터. 행복한 기억을 가슴에 안고 나는 또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달려가고 있다.

[김혜영_해피리포터]

해피시니어 프로젝트는 전문성있는 은퇴자들에게 인생의 후반부를 NPO(비영리기구 : Non-Profit Organization) 또는 NGO(비정부기구 : Non-Government Organization) 에 참여해 사회공익 활동에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NPO·NGO에는 은퇴자들의 폭넓은 경험과 전문성을 토대로 기구의 역량을 높이는 데 도움을 주는 희망제작소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입니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대학생 시민기자단 ‘해피리포터’들이 은퇴자와 시민들에게 한국사회의 다양한 NPO·NGO 단체를 소개하는 코너가 바로 ‘해피리포트’입니다. <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