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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숙의 낮은 목소리

나쁜 일 많은 한 해가 지나갑니다. 아주 떠나간 친구들, 병마에 잡혀 고생하는 친구들, 힘겨워지는 살림살이에 지쳐가는 친구들을 생각하며 거리를 떠돕니다.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에게 화가 납니다. 쌩쌩 달리는 자동차들이 일으키는 바람이 걷는 사람을 주눅 들게 합니다. 큰 길을 피해 곁길로 접어듭니다. 햇살이 찰랑이던 골목길에도 추위가 한창입니다.

남루한 집들의 낮은 담 너머 마당에서 얼고 있는 빨래와 발의 온기를 기다리는 신발들이 보입니다. 몇 해 전이던가, 신문에서 본 백담사 무문관(無門關)앞 풍경이 떠오릅니다. 한번 들어가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문 없는 방, 자진하여 그 방에 들어간 이의 흰 고무신에 비와 낙엽과 거미줄이 담겨 있었습니다. 절대자유를 위한 절대고독의 흔적이겠지요.

세상엔 스스로 도를 닦는 사람들이 있고 하는 수 없이 도를 닦게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시를 채우고 있는 고통은 말하자면 후자를 위한 장치입니다. 골목길은 제법 가파르지만 길의 끝엔 길이 있다는 믿음을 지팡이삼아 씩씩하게 올라갑니다.


”?”

그러나 기대는 대개 배반을 품고 있는 것, 군데군데 금이 간 시멘트 담벼락이 덜컥 앞길을 막습니다. 길이 이렇게 뜬금없이 끝나버리다니, 낙담하여 돌아내려와 다른 갈래로 접어듭니다. 어디로 이어진 길을 꿈꾸며 휘적휘적 오르는 길, 북풍이 얼굴로 달려듭니다. 여긴 내 영토라고 외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새 길을 보고 싶은 열망은 가라앉지 않습니다. 아니 북풍의 만류가 심하면 심할수록 열망은 더 뜨거워집니다.

하지만 다시 길의 끝입니다. 마구 자란 풀들이 누렇게 바랜 채 바스러지고 있습니다. 한 가운데 험상궂은 몰골로 서있는 나무 조각에 “사유지! 이곳에 쓰레기 버리지 마시오!”라고 쓰인 검은 글씨가 무섭습니다. 몸의 힘이 쭈욱 빠져 달아납니다. 얼굴을 때리던 북풍이 어느새 스며들어 온 몸이 떨려옵니다.

“사는 게 막다른 길의 연속 같아.” 병원에 누운 친구의 말이 떠오릅니다. 친구의 삶이 꼭 이 골목들 같았나 봅니다. 겨우 두 번 막힌 길을 만났다고 이렇게 힘이 빠지는데 늘 막다른 길을 만나는 삶이 어떻게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지친 몸을 간신히 싸들고 버스에 오릅니다. 밍크코트를 입은 중년 여인이나 검은 파카를 입은 젊은이나 추워 보이긴 마찬가지입니다. 모두들 침묵 속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일들과 싸우고 있는 듯합니다. 버스는 꽁꽁 언 부암동 언덕배기를 내려갑니다. 파란 하늘을 받치고 선 나무 꼭대기의 까치집으로 까치들이 들락거립니다. 이렇게 꼭꼭 싸매고 있어도 추운데 저 얼기설기한 집에서 겨울을 난다니 가능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버스는 길을 바꾸어도 마음은 까치집에 머뭅니다. 그러기를 한참, 아, 마침내 알 것 같습니다. 저 집의 비밀은 아무 것도 담아두지 않는다는데 있을 겁니다. 추위도 더위도 아무 것도 붙들지 않고 그냥 왔다가 가게 하는 길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추워하는 건 추위를 붙들고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우리가 괴로운 건 고통과 열망을 붙들고 있어서일 겁니다. 우리가 길이 되면 추위도 고통도 다만 지나갈 것 같습니다.

마침 버스는 친구가 누워 있는 병원 앞을 지나는 중입니다. 어서 내려야겠습니다. 올 줄 몰랐다며 기뻐할 친구에게 까치집 얘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아니 말없이 손만 잡고 있어도 내 마음 속 까치집이 친구의 마음속으로 흘러들 것 같습니다. 들어온 것은 나갈 때가 있을 거고 생겨난 것은 사라질 때가 있을 거라고, 막다른 길에선 돌아설 수 있으니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릅니다. 무문관을 박차고 나올 만큼은 아니어도 조금 자유로워질지 모릅니다.

나쁜 일 많았던 한 해가 지나갑니다. 다시 한 해가 시작됩니다. 새해, 길이 되고 싶습니다. 트랙터 못 다니는 경사진 땅에 호리쟁기(소 한 마리가 끄는 쟁기)가 내는 길 같은, 그런 길이 되고 싶습니다.




”?”

* 이 칼럼은 자유칼럼에 함께 게재합니다.

코리아타임스와 연합통신 (현재의 YTN) 국제국 기자로 15년,
주한 미국대사관 문화과 전문위원으로 4년여를 보냈다.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글을 쓴다.
현재 코리아타임스, 자유칼럼, 한국일보에 칼럼을 연재중이다.
저서로 “그대를 부르고 나면 언제나 목이 마르고”와 “시선”이 있고, 10여권의 번역서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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