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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의 희망탐사 26>

도시에 색깔을 입히다

무색무취(無色無臭)만큼 무미건조한 것은 없다. 사람을 만나도 그 사람만의 개성이 보여야 매력을 느낄 수 있고, 그것은 세상 모든 일에 적용될 것이다. 하다못해 어느 지역을 방문했을 때, 해외로 여행을 갔을 때 내가 살고 있는 지역과는 다른 색깔을 지닌 곳에 왔구나 하는 느낌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여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서울을 떠나 다른 도시를 방문했는데 서울과 비슷한 느낌이라면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할 터이다. 무색무취는 건조함과 다를 바 없다.

서울을 비롯한 우리네 도시는 전통과 현대가 뒤섞여 있다. 물론 전통이 깊을수록, 역사가 오래될수록 그 도시에서 풍기는 색깔과 향기는 깊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이 깊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전통의 색깔을 유지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관건이다. 옛 유적과 어울리지 않는 현대 건축물이 그 도시에 세워질 때 도시가 간직해온 고풍스러운 색깔과 향기는 흐려질 수밖에 없다. 아니 세월이 흘러온 만큼 흐려지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 도시가 가지는 이미지를 흐릴 정도로 색깔 자체가 탁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도시와 차별성을 갖는 도시는 그 자체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 도시가 갖고 있는 색깔은 탁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탁한 색깔을 계속 탁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지점에서 그 도시의 고유색을 재창조해내는 게 필요하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여있고, 그 뒤섞임만큼 도시에는 여러 색깔이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그 색깔을 통일해 그 도시만의 색깔과 향기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경주의 아이덴티티
”?” 경주에서 활동하는 건축가 손명문 씨는 경주라는 도시만의 색깔과 향기를 낼 수 있는 건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신라와 고려, 조선이라는 무수한 세월의 흔적이 쌓여있는 곳이 경주고, 세월의 켜만큼 수많은 전통과 유적이 쌓여있는 곳이 경주다. 이런 문화자산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경주라는 도시가 갖고 있는 이미지, 혹은 색깔을 더 선명하게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경주다운 특색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현실입니다. 한국성에 기인하는 건축이 되어야 하는데 쉽지는 않아요. 유수한 건축가들이 한국성을 표현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그렇게 잘 되지 않습니다. 건축으로 우리의 민족성과 풍토성을 드러나게 해야 합니다. 한국성에 기인하면서도 경주 지역의 아이텐티티를 표출해야 하는데, 사실 그것이 어렵습니다. 건축주가 그것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런 점에서 시민들의 의식이 중요합니다.”

그는 건물이 도시 전체적인 관점에서 설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무보다는 숲을 봐야 한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이를 위해서는 건축가뿐만 아니라 공무원, 주민들이 서로 노력해야 한다. 그는 일본 이즈모시의 예를 들어 경주의 정체성을 확립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의 이즈모라는 도시는 원래 황폐화된 도시였습니다. 그러다 새로운 시장이 부임하면서 이즈모시를 새롭게 조성하려는 뜻을 품게 됐고, 이즈모를 가꾸기 위해 시민단체들, 관계 공무원, 전문가들이 모여 노력하게 됐습니다. 그 결과 이즈모시는 현재 일본에서 두 번째로 살기 좋은 도시가 되었습니다. 경주에도 그런 노력이 필요합니다. 현재 경주라는 도시의 사업 중에 역사문화조성사업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문화경관회복사업인데, 막대한 사업비가 들어가기 때문에 중앙정부에서 문화재청을 통해 보조금을 내려 보내주고 있습니다. 이 사업의 내용은 의미 있는 장소에 건물을 사들여 옛 모습을 복원하는 것입니다.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경주를 보는 세 가지 관점
-역사도시, 자연경관, 현대적 재창조의 공간
”?” 손명문 씨는 경주에 건축물을 세울 때 세 가지 관점을 고려한다. 경주의 정체성과도 관련 있는 이 세 가지 관점은 경주라는 도시의 색깔을 내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된다. 그가 바라보는 경주에 대한 세 가지 관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경주가 역사도시라는 점이다. 막연한 역사도시가 아니라 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 그리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생명력을 유지해온 도시가 경주다. 그래서 그는 과거의 소중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어야 한다고, 시가지 내에 신라시대뿐만 아니라 고려, 조선의 문화유적을 충분히 살려내야 한다고 말한다.

두 번째 관점은 경주 자체가 자연경관이 매우 아름답다는 것이다. 가운데 남산을 기준으로 경주는 오악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하 자체가 도시보다 아름답다. 손 씨는 신라가 경주를 수도로 삼은 결정적 이유가 산하 자체가 아름답고 오악으로 둘러싸여 있는 천혜의 고장이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이런 자연 경관을 헤치지 않는 범위에서 “외곽지에 건축을 할 때에는 겸허하게 건물을 앉힌다.” 자연이 주인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경주의 건축은 겸허하고 차분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 번째 관점은 역사경관, 자연경관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지금 현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과거의 틀만을 고집하는 것은 현실적이지도 않고, 옳은 것도 아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는데 손 씨는 “경주다운 건축은 과거의 모방이 아니라 선조들의 도시, 자연, 집에 대한 좋은 생각을 이어받아 현대적으로 재창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 과거의 복원에만 그치지 않고 재창조가 필요하다
-지역성을 갖춘 건축재료와 건축물들이 필요하다

손명문 씨는 과거의 복원도 필요하고 자연경관과 어우러지는 건축도 필요하지만 현대 건축을 통해 경주라는 도시의 색깔과 부합하는 건축물을 재창조하는 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옛것과 새것이 만나 경주만의 색깔을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은 이럴 때 쓰는 말일 터이다. 온고이지신을 건축물에 적용할 때 현대적인 건축 재료가 빠질 수는 없다. 그는 그 예를 파리의 에펠탑에서 찾는다.

“파리의 에펠탑을 세울 때 철로 만든 탑을 세우니 파리 시민들의 거부감이 높았습니다. 그런데 에펠탑은 철로 만들어진 시대의 창작물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지금까지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도쿄타워는 아무런 건축적, 시대적 의미가 없기 때문에 철거위기에 처해져 있습니다. 지금 파리에 가면 에펠탑부터 보고 관광을 시작합니다. 그 시대의 새로운 소재를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뽕피두 센터도 당시로서는 첨단의 건물이었고 지금도 그 앞에서 많은 이벤트들이 펼쳐집니다. 루브르 박물관도 광장에 피라미드를 건축했는데 그 피라미드를 통해 루브르가 보완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경주에도 그런 건축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옛 건물을 복원하고, 또 한편으로는 현대적 의미가 담긴 건축물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개인적으로 정미소 건물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가장 기능적이고 솔직하게 지었기 때문이다. 정미소를 예를 들어 그는 우리 시대에 맞는 소재와 기능, 건축의 형태를 만들고 싶어 한다. 우리시대에 맞게 한옥을 현대적으로도 지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과거 한옥은 그 시대에 맞게 창조된 것입니다. 마루를 둔 이유는 비가 벽이나 건물을 못 치게 한 것이고 계단을 둔 것은 빗물이 마루나 건물이나 벽에 못 튀게 한 것입니다. 콘크리트 시대에는 다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경주의 지역성을 반영시키기 위해 지역적인 소재로 건축물이 들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재료를 찾는 게 고민이란다.

“경주의 지역성이 잘 반영되려면 건축의 소재가 지역적이어야 합니다. 나무가 많이 나는 지역에서는 통나무집이, 화강석이 많이 나는 지역에서는 돌집이 지어집니다. 제주에서는 화산암이 많이 나니까 그런 집이 지어집니다.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경주에 어울리는 재료가 없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사실 경주에서는 검정벽돌(전벽돌)이 있는데 너무 비쌉니다.”

보존과 복원, 그리고 재창조

손명문 씨는 경주의 색깔을 살리기 위한 방법으로 보존과 복원, 그리고 재창조를 얘기한다.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건물을 보존하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없어진 건물을 복원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이어나갈 수 있는 건물을 재창조하는 작업이 함께 이뤄질 때 경주라는 도시의 정체성을 확립시킬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조선시대의 한옥 뿐만 아니라 일제시대 건물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6년의 치욕의 역사도 역사이기 때문이다.

“가까이에 일제시대 때의 건물도 있습니다. 일본 조동종 사찰이 경주에 있는데 목조나 기와를 일본에서 수입하여 지은 것입니다. 이런 것도 보존의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36년의 치욕적인 역사도 역사이고, 그것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그 시대를 모릅니다. 그런데 이런 건물이 존재함으로써 그 시대의 단면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려서 그 건물을 지나갈 때면 그런 과거의 역사를 떠올리며 머리가 쭈뼛쭈뼛했습니다. 이 건축물처럼 과거를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남아있으면 좋겠습니다.”

조선시대, 일제시대 건물뿐만 아니라 그는 30년 전, 10년 전 건물도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과거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어디 가더라도 그 지역의 모습을 충분히 볼 수 있는 주거패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주의 건축물은 좀 더 심도 있게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경주의 고분 주변의 건물을 시에서 철거하고 있는데 50년, 100년 된 한옥들도 그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건물은 그대로 두면 좋겠습니다. 유적도 중요하지만 우리네 생활을 엿볼 수 있는 50년 전 건물, 30년 전, 10년 전 건물도 중요합니다. 경주시내의 건물들 중에서 리모델링을 해서 몇 십 년 전의 모습, 또 한옥의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사무실을 옮길 예정인데 두 가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외곽으로 가서 사옥도 저층으로 짓고 마당을 만드는 것이 하나고, 천마총 서편으로 한옥지대가 있는데 그 하나를 구해서 사무실로 만들까 하는 것이 또 하나입니다.”

보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복원이다. 그는 현재 경주시에서 진행하고 있는 황룡사 복원, 월정교 복원, 남천의 다리 복원, 교동 교촌의 한옥마을가꾸기 사업 등을 환영한다. 천문학적인 건축비용이 들어가지만 그는 복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복원은 창조가 아니기 때문에 시대에 맞게 만들어야 합니다. 황룡사는 유형적인 고증이 없습니다. 지상에 드러나는 부분에 관한 문헌이 없는 것이죠. 불교종단에서는 복원되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만 문화재 전문가들은 고증이 불충분하기 때문에 복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반대론도 있는 실정입니다. 시민들 대다수는 복원을 바라고 있죠. 그런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황룡사 9층 석탑은 에펠탑이 세워지기 천 년 전에 에펠탑 같은 것이 세워진 것입니다. 남산과 북쪽의 소금금산, 동쪽의 명활산의 교차점에 서 있었습니다. 도시의 중심에 그 탑이 서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신라 사람들도 올라갔겠지만 고구려, 백제, 당나라, 서역 사람들까지 9층 목탑에 올라가 신라와 그 도읍지 꼭대기에서 경탄을 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에펠탑이 파리의 랜드마크로서 파리를 내다볼 수 있도록 한 것이 아닙니까? 9층 목탑의 규모도 대단하지만 거기에 있는 사찰, 대웅전도 규모가 컸습니다. 경복궁을 보다가 중국의 자금성을 보면 왜소해지는 느낌이 듭니다. 만약 황룡사가 불타지 않고 남아있었다면 큰 사찰로서 자긍심을 주었을 것입니다. 황룡사는 이런 점에서 복원할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꼭 그대로 복원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9층 목탑의 규모를 짐작할 정도의 상징을 보여주는 방법도 있습니다. 꼭 나무가 아니라 철제 구조물을 통해 세련되게 보여주거나 밤에는 레이저망가지고 설치미술 같은 것을 보여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큰 돈이 없이도 황룡사가 있었구나 하는 실감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복원사업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어정쩡하게 복원하는 것보다는 더 진솔한 것일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문화직할시를 만들자-중앙정부의 문화도시 역할을 높여야

경주라는 도시에 색깔을 입히고 싶어 하는 손명문 씨는 정부의 지속적인 관심과 재정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경주의 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이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는데 지자체의 재정만으로는 조성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고증을 갖고 품격 있게 복원사업 등을 비롯한 역사문화도시 조성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중앙정부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경주시민들은 문화직할시를 바라고 있습니다. 경주시가 문화직할시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나온 것입니다. 물론 공주는 어떡하고 부여는 어떻게 하냐고 중앙정부 사람들은 걱정합니다만 체계적으로 도시를 문화적으로 가꾸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문화도시를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가까이 있는 유적들을 접하면서 ‘다른 도시와 달리 깊이가 있구나’라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자긍심을 계속 심어주기 위해서는 경주라는 도시를 문화도시로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무색무취만큼 무미건조한 것도 없다. 하나의 색깔에 또 다른 색깔을 덧씌워 본래의 색깔을 희석시키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서울을 비롯한 우리의 도시는 모두 색깔이 희석되어 있다. 그 색깔을 다시 입히는 일, 본래의 색깔을 찾거나 없던 색깔을 만들었을 때 우리네 도시는 경쟁력을 갖게 될 것이다. 알록달록한 색이 입혀진 도시를 꿈꾸어본다.

건축가 손명문

경주 출생인 손명문 씨는 경희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과 연세대학교 산업대학원에서 건축공항을 공부하고 경주대학교 대학원에서 환경조경학을 공부하였다.

울산광역시 건축대전 심사위원과 대한민국 건축대전 초대작가로 활동하였고 부산건축전 당선, 계명대학교 중앙도서관 현상설계 최우수작 당선, 대한건축사협회 작품상 수상, 건교부·대한주택공사 주최 3대 가족 동거형 공동주택 현상설계 공모전 입상, 경향하우징 페어 주택공모전 입상, 경상북도 건축전 작품상 등을 많은 상을 수상하였다.

현재는 경희대학교 건축공학과 겸임교수와 동국대학교 조경학과 강사이자 건축사사무소 건환 대표로 있다.

손 씨가 고향인 경주에 내려온 것은 1987년인데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경주 지역에 자신의 혼을 담은 건물 75개를 지었다. 그의 건축물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역사도시 경제에 새로운 현대성을 접목시켜서 경주의 변화와 역사성을 표현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면담일시 – 2007년 2월 8일

면담장소 – 경주시 성건동 620-166 건.환 건축사무소

면담인사 – 손명문(건축사무소 건.환 대표. 동국대 강사)